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개토대왕릉비 (문단 편집) === 20세기 일본의 접근 === [[제국주의]] [[일본]]은 이 비문을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써먹었다. 첫째는 신묘년 기사를 자기들 입맛대로 해석해서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는 근거로 써먹은 것이다. 그러나 위의 서술과 같이 그들이 주장하는 해석만을 놓고 봐도 어떻게 그런 주장이 가능한지 의문이 들게 할 정도로 허술하다. 설사 아무런 과장을 섞지 않았다 해도, 왜군은 신묘년(391)에 쳐들어와서 경자년(400)에 박살났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오히려 반박하는 근거가 된다. 설 자체는 [[1960년대]] 이후 일본 학계에서조차 주류에서 밀려나서 폐기되다시피 한 논의지만, 어쨌든 한반도 남부에 군사를 진출시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해석은 일본 입장에서는 의미가 크다. [[야마토]] 정권이 체제를 굳히고 (비록 백제 및 가야의 동원에 의한 것이기는 했지만) 외부로 군사력을 투사할 정도로 기반을 마련했다는 주장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즉 야마토 정권의 초기 발전 단계상을 추측해볼 수 있는 기사가 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왜가 패했으니 일본에 불리한 기사가 되는 셈이지만. 둘째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내용 중 [[고구려]]와 [[왜#s-2]]의 대립에서 왜가 패한 점을 부각하여, 과거에는 [[고구려|북방 세력]]에게 패배했으니 이번 [[러일전쟁]]에는 [[러시아 제국|북방 세력]]을 이겨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당시 역사학자들은 이 4-5세기의 고구려 - 왜 관계에 [[19세기]] 말 러시아 - 일본의 긴장 상태를 투영하여 '옛날 왜가 고구려에 패해 한반도 경영이 좌절되었듯 지금 전 국민이 합심하여 러시아를 물리치지 못하면 제국의 대륙 진출도 어려워질 것이라는 경각심을 고취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노골적이고 공공연하게 목적의식을 드러냈다. 심지어 공식적으로 비석을 구입해서 일본으로 반출 하려는 계획까지 있었다. 이외에도 몇몇 제국주의 학자들은 일본제국이 만주와 한반도를 동시에 경영한 고구려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정작 광개토대왕은 한반도 남부 주민들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했고, 일본을 불쾌하게 여기며 토벌까지 했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