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개토대왕릉비 (문단 편집) == 발견과 연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파일:1912 광개토대왕릉비 원경 1.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파일:1912 광개토대왕릉비 원경 2.jpg|width=100%]]}}} || ||<:> 1912년 일제 조사단의 답사에서 촬영된 광개토대왕릉비 주변의 전경.[br]비석 옆에 민가가 들어서 있고, 멀리는 [[태왕릉]]이 보인다. || 고구려 멸망 후 그 존재가 잊혀졌다. 이것이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신라를 도와 왜를 격퇴한 사실이 누락된 유력한 원인으로 추정된다. [[김부식]] 사대주의자설에 따라 신라에 불리한 사실이라 김부식이 알면서도 고의로 누락시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김부식 이외에도 고구려 멸망 후부터 [[19세기]]까지 1,200여년 동안 이게 고구려 비석이란 걸 눈치채고 기록을 남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에서[* 즉 [[한국]]/[[중국]]/[[만주족]]/[[몽골]] 계통 사서, 지리지를 통틀어서] 김부식도 이 사실을 접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광개토왕릉비가 [[고려]] 영토 한참 바깥쪽에 있고, 김부식도 고구려 멸망 후 수백 년 뒤 사람이라 김부식이 살던 시대에는 이미 광개토왕릉비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보는게 훨씬 설득력 있다. 고구려 멸망 이후인 [[남북국시대]]에 이 비석을 당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사실 지안에 고구려 유적은 많아도 [[발해]] 유물이나 흔적은 별로 안 나오기 때문에 일단 발해에서도 세심하게 관리되는 지방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같은 [[만주]]라고 비슷하게 느낄 수 있지만 발해의 중심지는 지안에서 400km 이상 떨어진 곳이고 [[서경압록부]]도 여기보다 좀 더 상류 지역으로 유력시되고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아예 국경 바깥에 위치하게 되어 정체가 잊혔다. 그 시대 사람들도 [[압록강]]가, 현대의 [[지안시(지린성)|지안시]] 근처에 큰 석비가 있다는건 알긴 했지만, 내용은 모르고 그저 옛 [[금나라]] [[황제]]의 비 정도로 여겼다. 현지 농민들은 [[한문]]을 해석할 지식이 없었고 지식인 계층은 [[조선인]]이든 [[중국인]]이든 이런 변방까지 올 일이 거의 없었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소재한 만주 지역은 청나라 건국 이후 시조의 성지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봉금되었으나, 청나라가 열강에 휘둘리던 1876년 봉금이 풀리면서 비석이 중국 금석학계에 알려졌다. 당시 만주로 한족들이 많이 이주했기 때문에 농지 개간 등 과정에서 다소 훼손되었다. * [[고려]] [[공민왕]] 19년([[1370년]]), 당시 [[고려]]의 장군 [[이성계]]가 [[원나라]] 잔존세력 [[북원]]의 [[동녕부]]를 정벌하러 갈 때 집안(集安)을 통과했다. [[고려사]]에서는 이곳을 '황성'(皇城)이라 하였고 [[조선왕조실록]]에는 '황성'을 '여진 황제의 성'이라고 설명했다. * [[조선]] [[세종(조선)|세종]] 27년([[1445년]]) [[용비어천가]]에 '성의 북쪽 7리 떨어진 곳에 비가 있고, 또 그 북쪽에 돌로 만든 고분 2기가 있다.'[* 아마도 [[장군총]]이나 [[태왕릉]] 또는 기타 고구려 능원으로 보인다.]고 언급됐지만 금나라 유적으로 오인했다. * [[성종(조선)|성종]] 18년([[1487년]]) 평안감사 성현이 지안[集安]에 가서 지은 [[http://db.itkc.or.kr/search/group?q=query%E2%80%A0%E6%9C%9B%E7%9A%87%E5%9F%8E%E9%83%8A|망황성교]](望皇城郊, 황성 들판을 바라보며)에서 지안을 황성(皇城), 태왕릉을 황제릉(帝陵), 비는 천척비(千尺碑)라고 하고 주변에 강이 흘러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기에 비문을 읽을 수 없다고 하였다. * [[중종(조선)|중종]] 25년([[1530년]])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지안을 황성평(금나라 수도), 왕릉을 금나라 황제의 묘로 설명하고 높이가 10장이나 되는 농석이 있다고 하였다. * 중종 31년([[1536년]]) 심언광(沈彦光)이 집안 주변에 몰래 거주하는 [[여진족]]에게 압록강가에서 퇴거하라고 타이르란 임무를 받고 파견되었던 때에 지은 시가 [[지봉유설]]에 전하는데, 그 시에서 집안을 황성(荒城)이라 하고 황제 유적의 큰 비(皇帝遺蹟巨碣)가 있다고 하였다. 비석이 크기 때문에 발견한 사례는 몇 번 있지만, 다들 [[여진족]] 관련 비석으로 오인했다. 조선 후기에는 추사 [[김정희]] 등 [[금석문]]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사람도 있었으나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비슷하게 그 정체가 잘못 알려진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의 정체를 고증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정희도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는 존재는 알았어도 직접 보러 가기는 너무 멀어서 마침 근처에 부임하는 지인들에게 여러 번 부탁했는데 하물며 이 곳 집안은 [[한양]] 기준으로 [[황초령]]보다 더 먼데다가 그래도 황초령은 조선 땅이었지 집안은 후술된 내용처럼 청의 영역인데다가 봉금된 지역이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파일:광개토대왕릉비 동면과 북면.png|width=100%]]}}} || ||<:> 1912년 일제 조사단의 답사에서 촬영된 광개토대왕릉비 동면과 북면의 사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파일:광개토대왕릉비 서면 초석.png|width=100%]]}}} || ||<:> 광개토대왕릉비 서면 초석의 사진. || 본격적인 연구는 20세기 초부터 만주를 정탐하였던 [[일본 제국]]이 시작했다. [[일본군 육군|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정탐꾼이었던 사코우 카게노부(酒匂景信)[* 휘명은 사코우 카게아키(酒匂景明).]가 1883년 비문의 탁본을 확보하였고, 이를 토대로 2년 뒤 참모부에서 도본을 내놓았다. 이 자료는 이후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 학자들의 연구자료의 기초가 되었다. 이후 현대에 연구가 심화됨에 따라 비슷한 시기(188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원석 탁본이 중국과 일본에서 여럿 등장했다. 대만의 역사학자 가오밍시(高明士)는 1883년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가장 오래 된 탁본을 입수했다고 밝힌 바 있으며, 이들 원석 탁본을 토대로 하술할 쌍구가묵본의 변조 문제 등이 드러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