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개토대왕릉비 (문단 편집) === 광개토대왕릉비 기년 문제 ===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392년 5월에 고국양왕이 죽고, 같은 해 광개토대왕이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광개토대왕은 삼국사기대로라면 392년에 즉위했다. 그러나 능비에는 대왕이 몇 살에 즉위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기년과 육십갑자를 토대로 역산하면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은 신묘년(391)이다. 또 대왕이 사망한 연도를 두고도 두 사료는 서로 말이 다르다.[* 정확히 말하면 광개토대왕이 몇 년에 죽었다는 내용은 능비에 없다. 다만 사망 당시의 나이는 능비에 적혀 있었고, 이를 통해 역산한 것이다.] 물론 고구려인들이 산수를 잘못하거나 세는 나이/만 나이의 착오로 오기를 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 이를 두고 어느 쪽 기록이 맞는지 학계에서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또 삼국사기와 백제삼서를 인용한 일본서기의 기록은 4세기 후반과 5세기 초반의 기록에 한해서는 교차검증이 되기 때문에 더욱 의문스럽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삼국사기와 백제의 실전된 사서인 [[백제삼서]]를 인용한 일본서기는 교차검증이 가능하고 연도도 이주갑인상을 하면 서로 부합하지만 이 두 사서는 광개토대왕릉비와 기년에서 1년 차이가 나는데, 칭원법에서 기인한 오차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당대에는 두가지 원년 기산법이 있었다. 어느 해에 선왕이 죽고 같은 해에 새로운 왕이 즉위했다고 해보자. 새 임금이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삼아야 할까? 아니면 그 해는 선왕의 마지막 통치기간으로 보고 그 이듬해를 새 임금의 원년으로 삼아야 할까? 새 임금이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삼는 것이 즉위년칭원법, 즉위한 이듬해(유년踰年)를 원년으로 삼는 것이 유년칭원법이다. 유교예법에서는 특별한 경우[* 선왕이 폭정으로 쫒겨나고, 새로운 왕이 정권을 잡으면 정당성 부여 차원에서 유월칭원법을 사용했다]가 아닌 한 유년칭원법을 올바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고려말부터 조선시대까지 한정된 예법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유년칭원법이 없었던것도 아니고, 실제로 삼국사기에 유년칭원법을 소개하는 김부식의 사론[* 남해 차차웅 기사에 써 있다.]을 싣기도 하였다. 하지만 삼국사기 자체만 놓고 봤을때 유월칭원법으로 기사가 작성되었으며, 또 삼국시대애는 유월칭원법으로 기록하는 것이 대세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기년과 릉비의 기년의 차이는 이에 기반한 오차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고로, 이 기년 차이는 단지 삼국사기의 오기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 이 경우 고국양왕의 승하를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392년이 아니라 1년 당겨서 391년으로 본다.], 또 최근에는 고국양왕이 승하함으로서 광개토대왕이 왕위를 계승한 게 아니라, 고국양왕이 광개토대왕에게 선위를 했다는 학설도 주목받고 있다.[* 선왕이 살아 생전에 양위를 하면, 유교 예법을 따라서 유년칭원법으로 선위를 한 해당 년도까지를 선왕의 치세기로 보기 때문이다.] 이 경우, 고국양왕이 391년에 광개토대왕에게 왕위를 넘겨줬기 때문에 삼국사기에선 391년은 고국양왕의 마지막 치세 년도로 보고, 392년(유년칭원법)을 광개토왕의 원년이라고 봤으며, 릉비에서는 부왕의 공덕을 높이려고, 이를 소급 적용해서 391년(유월칭원법)을 원년이라고 칭했으며, 고국양왕은 선위한 이듬해인 392년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실질적인 원년은 391년이지만 명목상 392년으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슷한 경우는 꽤 흔하다. 예를 들면 건국 시조의 위엄을 높이려고 후대에 있었던 일을 시조의 업적으로 윤색하기도 한다. 당장 릉비의 동부여 속민의 기록만 봐도 추모왕 시절에 동부여를 복속시켰다고 써 있는 내용을 믿는 사학자는 거의 없다. 어지간해서는 그 후대인 대무신왕 시절의 업적으로 본다. 또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불을 짚힌 [[온조왕]]의 [[마한]] 복속 시기도 사실은 [[근초고왕]] 시절에 이룩한 일을 360년 소급 시켜서 (육주갑인상이다..) 온조왕의 업적으로 윤색한 문헌을 김부식이 그대로 받아적었을 공산이 크다. 물론 최근에는 마한 복속 시기는 근초고왕 시기가 아닌 6세기라는 것이 전방후원분 등을 근거로 지지를 얻고 있다.] 이러한 사정을 몰랐던 [[김부식]]은 유월칭월법으로 392년에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줄로 알았고, 그렇기 때문에 연호를 1년씩 밀려 썼다는 게 골자다. 이 관점에서 접근하자면, 분명히 릉비의 기록과 삼국사기의 기사는 즉위년도에서 사망년도까지 계속 1년 격절이 생기지만, 재위기간을 22년으로 보는데는 서로 부합하는 면이 있는 걸 보면 단순히 삼국사기의 일괄적인 오기가 아닌가 추측된다. 또, 삼국사기와 릉비의 기년 차이 문제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의 기년를 단독표기로 기록한 반면,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육십갑자와 광개토대왕의 기년을 병기하으므로[* 예를 들어 영락5년 병신년(396) / 영락8년 무술(398) 등등]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당대 고구려인들의 계산에 착오가 있었다고 이해하기 어렵다. 고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1년씩 당겨야 한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연도부터 사망한 연도까지 계속 1년씩 어긋나기 때문에, 적어도 광개토대왕의 치세기에 한해서는 삼국사기가 1년씩 오류를 내었다. 혹자들은 일본서기와 삼국사기가 연대가 일치하니깐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년을 1년 뒤로 당겨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신묘년 호태왕이라는 문구가 기록된 청동 방울이 발굴되면서 광개토대왕의 원년은 391년임이 중론이 되었다.[* 왕의 즉위 원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 해에 제작됐을 공산이 매우 크다. 즉, 1차 사료로 아주 의미가 크고, 능비가 오기되었을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그렇다면 삼국사기의 기록이 1년 오차가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조법종 교수는 신묘년에 (예를 들자면 신라를 신민으로 만들었다거나 하는) 특별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신묘년의 주어를 고구려라고 해석했던 듯하다. [[https://news.joins.com/article/283056|#]] 하지만 신라와 관련된 증언이나 유물이나 이에 대한 단서가 나오지 않는 이상 지금으로서는 지나친 억측이라고 해야 한다. 광개토대왕의 즉위 원년을 기념해서 만든 방울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조법종 교수의 주장이 맞을 수 있고 또 신묘년의 주어가 고구려일 수도 있지만, 청동방울에 기록된 '신묘년' 문구 하나 가지고는 억측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다만 신묘년(391)이 이미 광개토대왕의 치세기였으므로 삼국사기의 기록이 부정확하니, 1년 당겨와야 하는 것에는 의의를 둘 수 있다. [[파일:호태왕:신묘년.jpg]] [[파일:호태왕:신묘년2.jpg]] 또 능비는 광개토대왕이 승하한 지 3년이 되는 해에 이장되었다고 기록했다. 능비의 기록대로라면 광개토왕은 412년에 사망했고 414년에 능을 이전했다. 이를 토대로 본다면, 장수왕이 광개토대왕을 3년 동안[* 말만 3년이지 실제로는 24개월이다. 동양에서는 고대에 0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만'으로 세지 않았다.] 상을 치렀다고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의 사서에는 고구려인들은 부모가 죽었을 때 삼년상을 치렀다고 기록되었다. 삼국사기의 광개토대왕의 승하 기록을 1년 당긴다면 능비에서 능묘를 이장 했다고 명기한 시기와 딱 24개월 차이가 난다. 이를 본다면 능비의 기록이 삼국사기보다 더 정확하고 디테일하므로, 광개토대왕이 승하한 연도를 오산해서 향년을 오기했을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곧 무덤을 만들고, 집안에 빈소를 만들어 시신을 모시고 삼년상(혹은 24개월)을 지낸 뒤 좋은 날을 잡아 장사를 지내고 그 후에 시신을 무덤에 안치한다고 기록했다.][* 중국 후한,위촉오 시대에 편찬된 위략(魏略)에서는 고구려인들이 사람이 죽으면 100일 동안(停喪百日) 장례를 치뤘다고 기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광개토왕의 치세기인 5세기보다 훨씬 이전 세대의 기록으로, 2-3세기경의 고구려 풍습으로 볼수 있다. 이후에 삼년상 풍습이 정착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고국천왕]]항목을 참조.] 삼국사기에는 10월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었는데, 능묘를 이전한 날짜는 3년 후(만 24개월) 9월 29일이다. [* 무령왕과 그의 왕비도 승하한지 27개월 후에 장사를 치룬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신라사 연구자인 주보돈 교수도 부왕인 광개토대왕을 위해 장수왕이 [[삼년상]]을 치뤘으며, 능묘를 이전한 시기를 만 24개월 후인 414년 10월로 보았다.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60412/77532701/1|#]] >昊天不弔, 卅有九, 宴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광개토태왕은) 하늘이 돌보지 아니하시어 39세([[412년]], 영락 22년)에 세상을 떠나 나라를 버리시었도다. 이후 갑인년([[414년]], 장수왕 3년)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능을 옮겨 모셨다. >---- >〈광개토대왕릉비〉 >死者,殡在屋内,经三年,择吉日而葬。居父母及夫丧,服皆三年,兄弟三月。初终哭泣,葬则鼓舞作乐以送之.埋讫,取死者生时服玩车马置墓侧,会葬者争取而去. >사람이 죽으면 염하여 집안에 놓는데, 3년 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옷을 3년간 입고 형제는 3개월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울며 읍하는데, 장사의 법칙은 북치고, 춤추고, 음악하면서 죽은 자를 보내는 것이다. 묻을 때에는 죽은 자가 태어났을 때의 옷과 익숙한 수레 말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에 모인 자들이 다투어 취한 후 가지고 간다. >---- >《북사》 〈열전〉 고려 >死者, 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之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 悉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於墓側, 會葬者爭取而去. >죽은 자는 집안에서 염을 하고 3년 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지아비의 상에는 복을 3년간 입고 형제는 3개월을 지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슬피 우는데, 장례를 치를 때에 북치고 음악을 하여 춤추며 이를 보낸다. 이에 이르러 시신을 묻는데 모두 죽은 자가 살아있을 때의 옷이나 수레 말 등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지내는 데 모였던 자들이 다투어 취한 후 가지고 간다. >---- >《수서》 〈열전〉 고려 >비문을 포함한 다른 기록을 종합할 때 장수왕은 즉위 당시 나이가 18세에 지나지 않아 왕으로서의 본격적인 권위를 발휘하기 대단히 힘들었다고 판단되다. 이런 그가 아버지의 삼년상이 끝나는 시점에 맞추어 이 비를 세울 당시에는 21세였다. 동양의 전통적인 왕위 계승 시스템에서는 선왕의 삼년상이 끝나는 시점이 어떤 면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친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본다면 장수왕은 아버지가 죽고 즉위한 바로 그때 실질적인 왕이 아니라 이 비를 세우는 그 시점에서 진정한 고구려왕으로 등극했다고 할 수 있다. >---- >廣開土王碑, 父王의 運柩 앞에서 靑年王이 보낸 경고, 김태식[* 홍익대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과 동명이인의 역사 전문 기자이다.] [[https://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288498545|#]] 주보돈 교수 또한 장수왕이 부왕인 광개토왕이 죽고 삼년상을 치뤘다고 말했다.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60412/77532701/1|#]] 국책사업으로 편찬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해석도 이러하다 >능비는 광개토대왕이 죽은 뒤 만 2년째 되는 414년, 즉 장수왕 3년 9월에 대왕의 능과 함께 건립되었다.[* 종래에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년에 따라 414년을 장수왕 2년으로 보았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유월칭원법을 사용하였던 까닭에 광개토대왕이 죽은 412년은 곧 장수왕 원년이 된다. 따라서 비가 건립된 414년은 장수왕 3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5058|#]] 따라서 결론은 왕이 사망한 년도는 능비에 기록된 412년이 맞고, 생년은 세는 나이로 39살에 죽었다고 하니, 374년이다. 삼국사기에서 기록된 10월에 왕이 죽었다는 기사는 412년을 413년으로 오기 한것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사서의 고구려인들의 장례 풍습이 뒷받침한다. 즉위 원년은 1차사료인 릉비가 증언하는 391년이며, 다른 일차사료인 청동 방울에서도 교차 확인 가능하다. 삼국사기가 1년씩 밀려써서 생몰년도와 치세기가 일년씩 어긋난다는 결론은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