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개토대왕릉비 (문단 편집) === 신묘년 기사(신묘년조) 논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6px" [[파일: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조 해석.png|width=100%]]}}} || 비문 1,775자 중 이른바 '신묘년 기사' 32자를 두고 지난 1세기 동안 학자들이 집중적으로 달려들었다. 본문은 다음과 같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 대개 海로 판독된다.]破百殘□[* 이 □는 광개토왕비으로 탁본업을 했던 초균덕이 남긴 수초본과 조선유적유물도감 등에서 이미 東으로 판독했고, 최근에도 국어사학자인 권인한이 중연본에서 東의 7, 8획에 해당하는 사선의 흔적을 근거로 東으로 판독했다.]□□羅 以爲臣民. ,,,([[https://archive.is/cSegu|탁본]]),,, >백잔[* 여기서 잔은 殘(남을 잔) 자로, 먹고 남은 밥을 의미하는 '[[잔반]](殘飯)'의 잔 자와 같다. 즉 '백제 찌끄러기'라는 멸칭이다. 반대로 백제에선 고구려를 박적(狛賊)이라고 불렀다. 박적(狛賊)의 박(狛)은, 외관상에서도 알수 있듯이, 곰을 뜻하는 맥(貊)과 닮아있다. 짐승이라는 표현으로 해석 할수 있다. 아마 맥족인 고구려가 곰을 숭상하는 것을 빗대어, 비하한게 아닌가 싶다. 일본어에서도 고구려 =고려는 Koma라고 읽는데, 이것은 곰의 貊 일본어 훈독인 Kuma에서 유래한 것을 알수 있다. 또한 狛의 일본어 훈독 또한 koma이며, [[안장왕]]의 후손들은 일본으로 망명 했는데, 성씨로 狛를 사용했으며, 이 또한 koma라고 부른다. 다만, [[웅진]]을 백제 훈독으로 Komanari라고 부른 경우에서 알수 있듯이, 백제에서 유래한 훈독일 가능성도 크다. 웅진에서 웅(熊)에 해당하는 문자는 곰을 뜻하며, 일본어와 마찬가지로 koma라고 불렀나보다. ]과 신라는 과거에 속민이었기에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신묘년(영락 원년)에 왜가 와서 □[* '海'일 경우 '바다'.]를 건너 백잔□□□[* 이 부분은 훼손되었는데, 여기에 '가야신'을 넣어서 '백제 가야 신라'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묵본에는 羅 바로 앞 글자의 오른쪽에 斤부가 확인된다.][* 한편 앞의 두 칸을 '...와 함께'로 보고 마지막 칸이 '신'이라고 본다면 '신묘년에 왜가 (백제의 요청으로) 와서 바다를 건너 백제와 함께 신라를 깨뜨렸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백제-일본 연합군이 신라를 이긴 것을, 일본 단독으로 신라는 물론 백제까지 이긴 것으로 왜곡한 게 된다.]라를 쳐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일본은 당대부터 이 구절을 [[임나일본부설]]로 이어지는 일본서기의 [[삼한정벌]] 기록에 대한 증거로 쓰고자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가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해석을 꾸준히 밀었지만, 한국이나 북한 학계는 이를 부정해 왔다. 예컨대 [[정인보]]는 이 비석이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찬양·미화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므로 '왕의 훈적을 나열한 비에서 유독 고구려에 불리한 기사를 실을 까닭이 없다.'며 의도적인 생략이 있는 것으로 보고, '''오히려 주어를 [[고구려]]에 두어''' '왜가 신묘년에 와서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토벌하였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맥락상 왜가 오자 박살내고 백제와 신라를 좀 더 낮은 예속 단계였던 속민에서 종속국 수준인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한 듯하다. 渡□破를 渡海破[* 도해파, 즉 바다를 건너 격파하다]라고 해석할 경우, 고구려 주어설의 근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혹은 백제 본기 392년]로 교차검증된다. >冬十月, 攻䧟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撃二十日, 乃拔. >겨울 10월에 백제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그 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바닷물이 둘러싸고 있어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관미성이 어디로 비정되는가는 차후의 문제이다. 하지만 최소한 관미성은 사면이 바다로 이루어진 요새로, 수군을 이용하여 함락할 수밖에 없는 곳일 것이다. 이 기록 이외에는 삼국사기, 일본서기와 중국 사서를 통틀어 당시 왜국이 4세기 후반 (391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복속시켰음을 증언하는 사료는 없다. 즉, 시기적으로도 문맥상으로도 일치하는 기사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신묘년에 실시한 백제 원정밖에 들어맞는 게 없다. 391년은 광개토대왕 즉위 원년이다. 아들 장수왕으로서는 부왕의 즉위 원년에 실행한 군사 원정을 공덕비에서 빼놓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의 백제를 격파한 기록과 신묘년의 도해파 기록은 동일한 사건일 터이니, 왜국이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도해파 (渡海破) 라고 해놓고, 딸랑 성 하나 공략했는데 이걸 전치문까지 기록하며 남길 껀덕지가 되겠냐고 반문하겠지만, 관미성은 백제에게 아주 중요한 요충지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보면 백제 측에서 이 성을 빼앗긴 이후로 다시 수복하겠다고 의지를 불태운 기록이 있다.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 >"관미성은 우리 북방 끝의 요새이다. 오늘은 고구려의 가지고 있는 바가 되었다. 이는 과인의 슬픔이 아플 정도인 바이니, 경이 마땅히 마음을 쓰는 바로 부끄러움을 씻도록 하라." >----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2년([[393년]]) 8월 애초에 이러한 학설은 김석형 등에 의해 릉비와 삼국사기의 격절문제를 기초로 하여, 관미성 함락 기사는 391년의 사건이라는 주장이 제기 되었으며, 후술할 광개토대왕릉비의 일본측 최고 권위자라고 하는 다케다 유키오 도쿄대 동양사학과 학장에 의해서도 제기된 주장이다. [* 겨울 10월에 … 빼앗았다 : 본서 권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즉위년(391)조에는 고구려군이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관미성을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시켰다고 하여 보다 상세하게 나온다. 관미성이 함락된 시기는 본 기사에 진사왕 8년(392)으로 나오나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대왕 원년(391)으로 나와 1년의 차이가 난다. 이는 즉위년 칭원법과 유년칭원법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동일한 기사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관미성이 광개토대왕이 영락(永樂) 6년(396)에 백제를 쳐서 함락시킨 58성 중의 하나로 나와 본 기사와 5년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광개토대왕릉비」에서 광개토대왕의 백제 정복을 영락 6년(396)조에 일괄적으로 기록한 것에서 빚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광개토대왕의 정벌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즉위년인 신묘년(391) 기사가 전치구로 강조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된다(武田幸男, 271~273쪽; 李基東, 49~52쪽).] 즉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백제본기의 동일 기사를 비교해봐도 고구려측 기록이 더욱 자세하게 나왔으므로, 고구려측 전승일 가능성이 크며, 백제본기의 기록은 고구려 기록을 바탕으로 축약한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술 했던 광개토대왕릉비 기년 문제를 토대로 복원된 광개토왕 치세기인 영락원년 391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이 밖에도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백제를 수군으로 공격한 기록은 또 등장한다. 396년의 기사에 한강(아리수)를 건너서 위례성을 포위한 내용이 나온다. 고구려하면 개마기병만 떠올리지만 수군도 개마기병 만큼 주력부대 였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396년에 대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이 밖에도 ‘파백잔□‘ (破百殘□)에서의 □에 해당하는 결자를 추론하자면, 東이라는 글자가 유력하다. 이 학설은 릉비 앞에서 탁본을 업으로 삼던 중국인 왕건군의 필사본에서 비롯된 학설이다. 왕건군이 초씨 부자에게 얻은 초기 필사본이 위조가 아니라면 신묘년의 비석의 기사가 東이 맞고, 渡□破 百殘東□가 되고 신묘년의 기사는 이렇게 재해석할 수 있다. 다만 소설가 [[김진명]]이 주장하길, 왕건군의 저서에 수록된 광개토대왕릉비 앞에서 탁본 장사를 하던 초균덕 부자가 필사한 문서로, 진위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와 도쿄대 교수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 또한 김진명이 주장한 신묘년 기사에서 파손된 문자를 東으로 해석하며, 역사학계에서도 어느 정도 근거가 명확하다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1437499|#1]],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04k.pdf|#2]](289쪽 참조), [[https://hflib.kr/#/search/detail/208726|#3]](230쪽 참조),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allj.pdf|#4]](115쪽 참조)] 그러나 다케다 유키오 또한 다른 일본사학자들과 다르지 않게 대전치문설을 지지하는 학자로, 비문에서 '왜가 백제를 도해파하여, 동쪽에서는 신라를 ○했다.'고 해석한다. 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에 의하면, 초씨 부자가 만든 저본은 원래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광개토대왕릉비에 동물의 분변을 바르고 불지르기 전에 훼손될 경우를 대비하여 자신들이 보이는 대로 필사했다고 밝혔다. 이 저본은 초씨가 죽고 조카 딸에게 맡겨졌으며 왕건군은 저서를 발간할때 부록으로 첨부한 모양이다. 그의 수기에 따르면 김진명이 이를 발견하여 왕건군의 저서를 갖고 도쿄대 동양사학과 학장을 만났다고 하는데, 그 교수는 다케다 유키오인 것 같다. 다케다 유키오는 이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 후로 東이라고 해석한다고 밝혔지만 진위는 알수없다. 다만 다케다 유키오[* 제2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일본 학자가 주목한 학설이다. 아마 다케다 유키오가 東으로 판독한다는 사실을 알고 김진명이 자신의 소설에서 각색한 듯하다.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allk.pdf|#]]][* 석회가 발라지기 전 원석 탁본 여러 개를 연구하여 내린 결론이다.]가 東으로 판독하는 것은 맞다. 안동대 임세권 교수[* 그의 부친 [[임창순]] 선생이 소장한 원석탁본을 기초로 한 논문이다. 원석탁본, 즉 석회가 발라지기 이전의 탁본이다.]가 발간한 논문에서도 초균덕 부자의 필사본[* 보통 자신이 본 문자를 자의적으로 판독하여 해석하는 것을 석문이라고 하지만, 논문에 언급했둣아 초천부 초균덕 부자는 고문서에 일가견이 없는 소시민으로, 그들의 주관이 개입할 여지가 낮다고 판단하여, 필사본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을 언급하며 東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왕건군 또한 결자를 東으로 해석한다는 풍문도 있지만, 진실은 알수 없다. 그는 자신이 확인 할수 있는 글자에 한해서 해석을 내놓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고로 파손된 문자에 대해 필사본을 근거로 주장을 하는 것을 꺼려 하는것이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참고된 논문 <廣開土王碑의 硏究 -청명본 원석탁본의 검토->는 1997년에 발간되었단 것이다. 김진명이 최초 소설에서 첨부한 사진은 1995년에 출판된 가즈오의 나라라는 책이므로 임세권 교수가 이것을 보고 논문을 집필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김진명이 첨부한 사진의 진위여부를 판단해줄 만한 자료는 아니다.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74_0060&fileName=kn_074_0060.pdf|〈廣開土王碑의 硏究 -청명본 원석탁본의 검토〉 참조된 논문 273,274쪽 참고]] 사실 이것도 어폐가 있는게, 임세권 교수는 한학에도 조예가 깊고, 역사학을 전문적으로 배운 학자이다. 사료비판과 자신의 주장의 근거가 될 자료들을 검토하고 또 검토해서 학설을 제기해야하는 학자가 김진명의 소설을 보고 논문을 집필 했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무리인 주장이긴 하다. 그러므로 임세권 교수는 다른 자료들을 근거하여 이 논지를 전개 한것으로 보인다. 북한 사학자 손영종도 2001년에 발간한 책에서 임세권 교수와 같은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사실 백잔의 다음 결자를 東으로 파악한 것은 북한학계가 제일 처음 제기했고, 북한학자 손영종이 꽤 오래 전부터 주장한 내용이다. 즉, 초천부 부자의 수초본에서는 백잔의 다음 문자로 東이라고 적혔다는 것이다. 임세권 교수의 논문 274쪽에 첨부된 내용인데 白崎昭一郞는 백잔의 다음 결자는 更로 보았다. 일본 학계에서는 갱토신라(更討新羅)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菅・三宅을 비롯하여[* [[https://www.i-repository.net/contents/outemon/ir/301/301811209.pdf#search='%E6%9B%B4%E8%A8%8E%E3%80%8C%E8%BE%9B%E5%8D%AF%E5%B9%B4%E3%80%8D+%E6%9D%B1+%E6%B8%A1+%E6%AC%A0%E5%AD%97|#]]] 여럿 있는데 내용은 '신라를 같이 치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백제와 연합하여 공격했거나 백제를 치는 김에 신라도 공격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更와 東는 외관상 비슷하다. 이것이 능비가 훼손되기 전의 탁본을 기초로 한 해석이라면 두 글자는 모양이 매우 흡사하기 때문에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단순히 초천주 초균덕 부자의 수초본에 東자가 있다더라에 입각한 결자 예측이 아니라, 실제로 東의 7, 8획에 해당하는 사선과 日자의 형태를 근거로 東나 更로 판독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높다. 뒤에 나오는 기사들의 문맥을 파악 했을때, 백잔의 다음 결자가 更라면 신라를 같이 (협공하여) 치다라고 해석하는게, 문맥상 어그러짐이 없다고 본다. [* 예를 들어 화통이라는 표현은 양자가 상호 동등한 입장에서 맺는 협약이라고 할수 있다. 즉 399년의 화통이라는 표현은 백제의 왕이 대왕 앞에서 다시는 왜의 세력을 끌여들여 신라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맹서한 모양이지만, 이를 깼다고 해석할수 있다. 또 하술 하겠지만, 이런식으로 왜를 백제의 단순 지원 세력으로 보고, 391년 신묘년 기사를 396년 병신년 기사의 전치문으로 본다면, 왜의 면모가 백제 정벌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을 설명 할수 있다.] 제2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의 토론에서 일본 측 사학자로 참여한 하마다 고사쿠도 다케다 유키오의 연구에 주목하며 일본 사학계의 최근 트렌드는 백제의 다음 결자는 東으로 읽는 것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allk.pdf|#]] 582쪽 참고. 일본 학계에서는 이렇게 해석한다고 하마다 고사쿠가 발언하였다. >왜가 백제를 무찌르고 동쪽으로 가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그러나 왜가 하필 본국에서 먼 백제를 왜 먼저 격파하고 동쪽으로 진군해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는지 동선 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어쨋든 백잔의 다음 결자를 동쪽으로 파악한다면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東□新羅以爲臣民. >왜국이 신묘년에 건너왔기 (신라를 침략해왔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 (왜와 화통한) 백제를 격파하고, 군사를 동쪽으로 보내 신라를 신민[* 고구려가 신라를 속민에서 신민으로 예속관계를 강화하여, 왜와 백제로부터 구해주고 보호해줬다는 뜻이다.][* 광개토대왕릉비 10년 경자년 기사에 고구려가 신라를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신라에는 5세기 중반 나제 동맹 이전까지 고구려군이 주둔했다. 일본서기 464년 2월의 기사를 참조하자. 지금으로 따지면 한미 상호 보호조약에 따른, 주한미군의 주둔과 비교할 수 있다.]으로 삼았다. 라고 해석한다. 실제로 백제의 왜국과의 공동전선을 고구려가 탐탁치 않아 했다는 근거로 광개토대왕릉비의 399년의 기사를 예시로 들 수 있다.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 > 영락 9년 기해년,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내려가 순시하였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신라의 국경에 들어차 성지(城池)를 부수었습니다. 노객(신하, 즉 신라 내물왕)은 (그 신분이 대왕의) 민(民: 백성)이니 왕께 귀의해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와서 그 충성심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 고하게 하였다. 이를 미루어봐선 396년에 이미 백제의 아신왕은 비석의 기사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앞에서 스스로 노객이 되겠다고 천명했다. [*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이때, 다시는 왜와의 공동전선을 구축해 신라와 고구려를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모양이지만, 후에 약조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고 신라를 침략하자 광개토대왕이 분노했으며 신라를 구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신묘년을 전치문으로 상정하고 이 병신년의 기사를 해석한다면, 애초에 고구려의 백제 원정 명분은 왜와 결탁한 백제를 정벌함에 있고, 화통이라는 단어를 보면 백제 왜 양국이 수직적인 관계를 내포하기 보단, 수평적인 관계임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백제가 문제의 신묘년 기사에 주동세력이 되고 왜는 단지 지원세력이라고 해석할수도 있다. 비문의 기사대로라면 391년에 고구려는 신라를 신민으로 여겼다. 삼국사기 392년 1월 신라본기의 기사로 교차검증이 된다. >三十七年, 春正月, 髙句麗遣使. 王以髙句麗強盛, 送伊湌大西知子實聖爲質. >37년(392)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냈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했으므로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 [* 402년에 신라왕이 되는 실성마립간이다.]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즉 요약하자면, ||옛부터 백제와 신라는 우리 고구려의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그러나 391년 신묘년에 (백제의 요청으로) 왜국이 건너왔기 때문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서 백제를 격파하고 그 후에 군사를 (동쪽으로) 보내 신라를 신민으로 보호했다. 396년에는 대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백제 또한 후에 신민으로 삼았다는 뜻을 내포함.)|| 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396년에 아신왕이 직접 항복하여 스스로 노객이 되겠다고 선언한 광개토대왕릉비의 기사와도 일맥상통하며 문맥도 어그러짐이 없다. 즉 신묘년 이전에는 조공만 바치는 속민[* 조공을 바치고 받는 관계가 속민의 관계임은 용례로써 알수 있다. 廣開土王陵碑의 다른 기사에 의하면 東夫餘는 '鄒牟王의 屬民이었는데 중간에 조공하지 않으므로' 廣開土王 20년에 고구려에 의해 정벌되었다고 한다. 즉 속민이냐 아니냐의 기준은 조공을 바치냐 안바치냐의 상대적으로 느슨한 개념이었을 수도 있다.][* 광개토대왕릉비 영락 10년에 신라가 조공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전해지지 않는다.廣開土境好太王 □□□□ 寐錦□□僕 勾□□□□朝貢.]의 관계였지만 396년을 기점으로 백제 국왕이 직접 항복하고 노객이라고 선언했으므로, 최소한 고구려 측에서는 예속관계가 강화되었다고 여겼을 수 있다. 그러나 하마다 코사쿠 이래 이성시를 거친 ‘대’전치문설이 알려지면서 현재는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견해가 통설이다. 앞서 소개한 이진희의 비문조작설은 근거가 부실하고, 위 문단에서처럼 문장의 주체를 고구려로 보는 견해도 한문에서 주어가 지나치게 생략한 것이 되어 과하게 어색한 해석을 이끌어낸다고 하여 신뢰받지도 못한다. 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주어가 생략된 부분은 비문 도처에서 발견된다. 예시를 들자면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 백제와 신라는 옛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쳐왔다.[* 명백히 말하자면 고구려에게는 문장의 주어가 아니지만, 고구려측 기록이므로 누구의 속민인지는 서술할 필요가 없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영락 10년 경자년, (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에서도 주어가 생략되었다. 더구나 강력한 고구려가 남하하고 있는 시점에서 왜가 신라뿐만 아니라 동맹 관계였던 백제까지 공격해서 신민으로 삼는 것은 삼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짓이므로, 전략적으로 볼 때도 왜가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은 납득되지 않는다. 이해 이후에도 백제와 왜는 멀쩡히 협력관계를 잘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광개토대왕의 치적을 강조하기 위해 왜의 행적을 과장했다는 전치문설도 다음 기사에서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한다는 점에서 흐름이 부자연스럽다는 지적이 있다. 따라서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잔을 깨뜨렸다는 기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주된 쟁점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 백제 아신왕이 스스로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칭하며 광개토대왕 앞에 무릎을 꿇어 약조하는 기사, 또 그후에 신라 내물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奴客을 자청하며 왜군으로부터 방위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기사가 연달아 나오고 있다. 상술한 고구려 주체설 해석이 맞다면 奴客이라는 단어가 고구려에선 백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근거로 제시한 것이다. 실제로 아신왕과 내물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노객을 자처했든 고구려가 과장과 윤색을 덧붙였든간에 奴客이라는 단어를 프로파간다로 사용해 신묘년조의 신민이라는 단어를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선택해 백제 신라가 노객을 자청하고 그들을 굴복 시켰다는 해석이 된다면 고구려 주체설이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학계에서 노객을 당대에 사용하던 신하[* 같은 용례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광개토대왕비릉 말고도,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에서도 등장한다. 참고: 〈고대의 奴 관념〉, [[이영훈]]]라는 뜻으로 쓰인 단어라고 의역하는데, 백제와 신라를 신민(臣民)이라고 언급한 신묘년조 해석과도 썩 어울리는 분석이다. 고구려에서는 당대에 신하가 왕에게 고할 때 자신을 노객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로, 이 노객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부각시켰다면 왜국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은 모순이다. 광개토대왕릉비 원문에 나온 속민과 신민의 용례를 조사하자면, 속민은 형식적으로 조공을 바치는 상대국의 왕이나 백성들을 뜻하고, 신민은 신하로써 복종하여 상대국 왕 스스로가 직접 대왕께 조공을 바치거나 항복하여 정복한 주체에 마음으로 감화하여 적극적으로 협조 공조 복종하는 백성으로 해석할수 있는 것이다. 백제의 아신왕과 신라의 내물왕은 그들 스스로가 대왕을 직접 알현하고 아신왕의 경우에는 노객이 되겠다고 스스로 선언 했고, 내물왕 또한 사신을 보내어 대왕의 노객으로써 왕께 귀의한다고 말하였으며, 후에는 직접 대왕을 알현하고 조공까지 바쳤다. 반면에 속민은 소극적으로 복종하고 형식적으로나마 정복한 주체를 따르는 뜻으로 해석할수 있다. 그러므로 신민은 속민보다 예속성이 더 강하며 신민의 정의는 단순히 조공을 바치는 속민의 관계에서 +@로 해석 할수 있다. 특히 신라와 백제의 왕들이 대왕을 스스로 알현하는 모습을 상세히 기록한걸 봐서는, 신묘년조 논란을 떠나서[* 신묘년조를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해도, 릉비는 고구려의 질서에서 이탈한 백제와 신라를 다시 고구려의 질서로 편입 시킨 영웅에 대한 헌사이므로, 노객에 대한 해석은 신묘년조 논란과는 별개로 백제와 신라를 다시 고구려의 질서로 훈도 시켰다는 논거임에는 한일 사학자 사이에서도 이견이 없다.] 신민은 말 그대로 대왕에게 절대 복종하며 대왕을 알현하고 섬기는 신하나 백성(지금으로 치자면 소시민)으로 살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단순히 조공을 바치는 속민의 관계보다는 누가봐도 종속성이 강하다. 실례로 삼국사기에서 제일 신묘년에 제일 근접한 왜국의 신라 침공 기사(393년)를 보면, 왜국이 침공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신라에게 패퇴당하는 모습이 기록되었으므로 왜국이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사는 교차검증되지 않는다. 만약 진짜로 393년에 왜국이 침입했다면 어떻게 신민으로 만든지 1~2년 만에 신라에 통제력을 잃고 재차 침공했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금적기주심입(今賊弃舟深入), 즉 배를 버리고 쳐들어왔다고 기록되었는데, 진짜 신민으로 삼았다면 배를 타고 재침공을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들이 누누히 말하던 천황의 직할지 임나와 신라는 육지로 연결되는데 무엇하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침공하겠는가. 그리고 백제와 신라를 스스로 복종시키고[* 신민의 뜻] 신하로 삼았는데 왜 저항하고 있는가. 게다가 단순 교전을 한 것이 아니라 심지어 패주까지 한다. >三十八年,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將士皆請出戰, 王曰, "今賊弃舟深入, 在於死地, 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歩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 > >38년(393) 여름 5월에 왜인을 포위하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깊숙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다." 하고 말하고 이내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 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여 합동으로 공격하니 그들을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