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광둥성 (문단 편집) === [[중화민국]] === [[청나라]] 멸망 이후 [[국민혁명]] 이전까지는 [[중국 국민당]]의 본거지나 다름없었다.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호응하는 [[4.15 광저우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광동성 정부주석 [[리지선]]이 광동성의 군정대권을 장악하였다. [[장파쿠이]]가 [[장황사변]]을, [[중국 공산당]]이 [[광저우 폭동]]을 일으켜 광동성을 장악하고자 했으나 모두 진압당했다. 난징 [[국민정부]]에 그런대로 충성은 하지만 중앙과 적대적인 [[계계군벌]]의 수장 [[리쭝런]], [[바이충시]]가 리지선과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우호적인 동맹 관계에 있었다. 1929년 2월, [[호남 사건]]이 발생하자 장제스는 리지선을 광서파와 연대한 혐의로 투옥하고 [[천밍수]]를 신임 광동성 정부주석에 임명하였고 광동의 군권을 [[천지탕]]에게 맡겨 광동성의 지배자를 천지탕과 천밍수가 양분하게 했다. 천지탕과 천밍수는 [[반장전쟁]] 기간 동안 남방에서 광서파와 장파쿠이를 상대로 큰 전공을 세우며 중앙에 충성했다. 1931년 2월, [[탕산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1차 양광사변]]이 일어난다. 장제스에 우호적이었던 천밍수는 천지탕에게 축출되었고 광동성은 천지탕의 지배지역이 되었다. 9월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형성된 거국적인 협력 분위기 덕분에 광동 지역은 현 [[광시좡족자치구]]인 광시성과 함께 [[1931년]] [[12월]], 제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자치를 인정받아 서남정치분회, 서남정무위원회, 군사위원회 서남분회를 설치하고 반독립적인 지역으로 남을 수 있었다. [[1934년]]부터 [[1935년]]에 걸친 [[대장정]], 1935년 [[법폐개혁]]을 거치면서 중앙의 영향력이 계속 강해졌고 [[1936년]] [[5월]], 광동의 정신적 지주인 [[후한민]]이 사망하자 위기를 느낀 천지탕은 1936년 [[6월]] [[2차 양광사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해 홍콩으로 망명했고 광동성은 이후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중일전쟁]] 중 [[일본]]의 침략을 받아 [[광저우]] 등지가 함락당한 바 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하자 다시 [[중화민국]]의 통치에 들어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