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명시/역사 (문단 편집) ==== 1963년 서울특별시 도시계획 편입 ==== [[파일:attachment/광명시/역사/gwangmyeong-1963_2.jpg]] 1963년 당시 광명시 지역 모습. 주변 지역이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빨간 선은 서울시 도시계획구역 경계. 본격적인 광명시의 시작은 당시 시흥군 서면 지역인 광명리, 철산리, 하안리 지역이 ~~1963년 1월 1일에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행정편입은 되지 못하고~~[* 광명시 북쪽 월경지가 1949년부터 서울시와 접경했음에도 서울 편입 대상지에 포함 안된 것은, [[안양천]]과 [[목감천]]이라는 자연장벽과 지금의 [[금천구]], [[관악구]] 일대가 원래는 서울시 편입 대상지역이 아니었다가 추가되어 서울 편입이 된 점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1963년 9월 17일에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 1982년에 광명시 북부가 서울시 도시계획 구역에서 해제. 고양시 지축-신도 지구와 남양주 별내/구리 갈매 지구는 1995년경, 과천시 일대는 1990년경에 해제. 이것이 '''50년 넘도록''' 광명시에서의 서울시 편입 논란의 근원이 되고 말았다. [[행정구역 개편/수도권/서울개편론/광명시 서울 편입|관련 항목]] 참조. '''만일 1963년 1월 1일 서울 대확장때 경기도 시흥군 서면 광명리, 철산리, 하안리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광명동, 철산동, 하안동으로 행정편입되었더라면 지금쯤 광명시 지역의 역사는 상당히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참고로 서울시 도시계획에 편입되지 않은 소하리, 일직리, 노온사리, 가학리는 1978년부터 1982년까지는 안양시 도시계획구역에 속했다.]에 편입(편입 면적 12.37㎢)되면서 시가지로 개발되면서부터다.[* 한국민죽문화대백과사전 광명시 항목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cid=1588&docId=524218&mobile&categoryId=1588|#]]] 서울시 도시계획에 의해 조성된 도시라고 하니까, 으레 서울 위성도시였으니 그랬으려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서울시 도시계획에 의해 조성된 위성도시는 과천과 광명 둘 뿐으로, 부천, 고양, 안양, 성남(분당 한정. [[광주대단지사건|구성남은 애매하다]]) 등지는 서울시 도시계획과 무관하게 조성된 위성도시라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이 1963년 서울시 도시계획구역 편입 내용은 광명시청 당국에서 '''[[흑역사|애써 은폐하려는 역사]]'''이자[* 광명시의 근원 자체가 서울특별시의 서자(庶子) 도시라는 사실은 광명시 당국에서는 당연히 숨기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과사전과 다르게 광명시청 측 공식 연혁란에는 해당 내용이 빠져있다.] 정작 옆동네 구로구 홈페이지 연혁란에서 [[https://www.guro.go.kr/www/contents.do?key=2138&|언급되는]] [[https://www.guro.go.kr/www/contents.do?key=2139&|내용이다]]. 그런데 최근 박승원 광명시장이 구로차량기지 광명 이전에 반발하는 페이스북 글에서 그 역사를 실토하기도 했다. [[파일:attachment/광명시/역사/seoulurbanplanningdistricts-map.jpg]]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 변천 지도 참고로 시 승격 이전인 1973년에는 전국적인 연탄 품귀현상으로 정부가 서울시내 연탄의 외부반출을 통제하면서 ~~생활권이 그 생활권인지라~~ 예전부터 서울쪽 연탄공장으로부터 연탄을 공급받았던[* 광명리, 철산리 주민들은 신도림쪽 연탄공장, 하안리, 소하리 주민들은 시흥동쪽 연탄공장으로부터 연탄을 공급받았다고 한다.] 광명주민(당시 시흥군 서면주민들)이 이에 항의하여 [[http://gwangmyeong.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3100408|집단농성에 들어갔던]] 흑역사가 있다. 결국에는 두손두발 든 서울시측의 타협으로 광명지역으로의 서울시내 연탄의 제한적인 반출이 이루어졌다. 광명주민으로서는 서울로 편입되지 못한 한이 커졌을지도(...). 당시 광명동 지역은 서울 개봉지역의 일부로서 주거지로 개발되었고, 철산동 지역은 서울 [[구로공단]] 배후 거주지로 개발되었다. 서울시 편입 예정지였던 시절에 건설되었거나 계획되었던 아파트 단지로는 광명동 구 광명아파트(현 광명한진타운아파트), 철산동 구 광복아파트(현 광복현대아파트)[* 참고로 [[광복절]]의 그 광복 맞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나 유족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데서 광복이라는 이름을 따온 것.], 하안동 구 하안본주공 1단지(현 광명e편한세상센트레빌), 철산동 구 철산주공 2단지(현 철산산푸르지오하늘채), 하안동 구 하안본주공 2단지(현 광명두산위브트레지움), 철산동 구 철산주공 3단지(현 [[철산래미안자이]])가 있다. 여담으로, 혹자는 광명시는 서울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이 모여서 형성된 도시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성남시]] 본도심처럼 아예 노골적으로 정부와 서울시가 합세하여 서울시내 빈민들을 몰아넣기 위해 만든 도시는 아니며, 구로공단 근로자들을 위한 주거지역 성격이 강하기 때문. 다만 철산4동 고지대, 하안동[* 지금은 고층아파트단지로 개발되어있지만 당시에는 판자촌, 논밭으로 어지럽게 혼재되었던 동네였다.], 소하동(특히 시흥대교 주변) 등지에 철거민들이 모여 불량주택지대가 형성된 것은 사실이다. 1971년 그린벨트 제도 시행에 따라 남부지역은 그린벨트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북부 지역인 광명동, 철산동, 하안동의 대부분의 지역은 서울시 도시계획에 따라 주거지 개발지역으로 계획이 잡혔거나 이미 주거지로 개발된 상태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린벨트에 편입된 적이 없다. 1973년에는 구로구 가리봉동(현 금천구 가산동) 일부와 시흥군 서면 철산리 안양천 이동 일부 월경지에 [[구로공단]] 제3단지가 준공되었다. 1976년 서울시에서 시흥군 서면 광명리와 철산리를 서울특별시 산하 광명시로 편입하는 방안의 검토 문서를 작성하였다.([[https://archives.seoul.go.kr/item/850179|#]], [[https://archives.seoul.go.kr/item/850208|##]]) 1963년~1982년의 기간 동안에 지어진 광명시 광명동, 철산동, 하안동 지역의 학교, 관공서, 교량, 도로 등의 시설물은 서울특별시의 도시계획의 손길이 다 닿았다고 봐야 한다. [[http://opengov.seoul.go.kr/rms/291164|광명고등학교 설치에 관한 서울특별시 도시계획 공문서]] 광명동(+옥길동)과 철산동의 서울전화(지역번호 02) 편입은 1978년에(편입 시작은 1970년), 하안동, 노온사동, 가학동, 소하동, 일직동의 서울전화 편입은 1980년에 완료되었다. 1980년 소하읍 행정관할지역의 서울전화 편입으로 시흥군 서면 자체 통화권이 폐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