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광서제 (문단 편집) === 즉위 배경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uangxu_Emperor.jpg|width=100%]][* 이게 광서제의 사진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사진이 아니고 초상화이며 초상화를 사진으로 찍은것이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Emperor_Guangxu.jpg|width=100%]] || [[도광제]](道光帝)의 황7자 [[순현친왕]](醇賢親王) [[아이신기오로 이후완|혁현]] 의 2남으로, 어머니가 [[서태후]]의 여동생인 예허나라 완전(葉赫那拉 婉貞)이기 때문에 모계로 보나 부계로 보나 [[동치제]]의 사촌동생이 된다. 사실 광서제는 청나라의 종법상 원래는 황제 계승 자격이 사실상 없었다. 청나라의 황제 계승 원칙상으로는 '''1개 항렬에 1명의 황제'''가 원칙이었는데 광서제는 전 황제인 동치제와 항렬이 같았기 때문에, 원칙대로라면 그 다음 항렬인 '부'(溥)자 돌림자의 황족이 제위에 올라야 했다. 이렇게 입양이 불가피한 상황에 놓인 청 황실은 마땅히 다음 항렬을 둘러보기 시작했지만, [[기상정변]]에 참여했던 도광제의 아들들이 다들 늦둥이라서 도광제의 족보상 후손 중에는 '부'(溥)자 항렬을 쓰는 양자감이 부륜(溥倫)[* 1874~1922. 참고로 먼 친척 할아버지인 [[혁광]]과 그의 아들 [[재진]]과 친한 사이로 이 사람 역시 경친왕 라인을 타고 서태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선통제]] 즉위 후 경친왕 내각에서 상부대신(호부상서)를 맡게 된다. 허나 이 내각의 대다수가 황족과 만주족(경친왕과 부룬 외에도 선통제의 숙부인 재순, [[강희제/가족관계|유각군왕 윤우]]의 5대손인(이자 서태후의 조카사위이며 선통제의 이모부)보국공 재택, 숙친왕 선기 등이다. 참고로 선기와 재택은 청조 멸망 후 [[만몽독립운동]]에 참여한다.)인 관계로 신해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신해혁명 당시 [[위안스카이]]에게 동조하여 선통제의 퇴위를 주장한다.] 외에는 마땅치 않았다. 그런데 부륜은 족보상으로만 도광제의 후손이었다. 도광제는 일찍이 혁위를 황장자로 낳았으나 천한 시녀와의 [[원나잇 스탠드]]로 태어난 사생아 취급을 하며 홀대하다 혁위가 자식 없이 요절하고서야 안타까워하며 양손을 들였는데, 그 양손은 '''[[건륭제]]'''의 황11자 성철친왕 영성의 아들 면의의 아들 혁기의 아들인 재치이고, 그 재치의 아들이 부륜이었다. 이렇듯 부륜은 실제 혈통상으로는 멀어도 너무 먼 방계라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렇게 되었으면 영성의 친모인 [[숙가황귀비 금가씨|숙가황귀비 김가씨]]가 [[정묘호란]] 전후로 만주족에 귀화한 조선인의 후손이었으므로 희미하게나마 조선 혈통이 이어지는 청나라 황제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계승 원칙대로라면 동치제의 아랫항렬에 해당하는 황족이 계승해야 했지만 그 항렬의 황족은 가장 가까운 황족도 혈연상으로 동치제의 9촌이라, 다들 촌수가 멀어 차선책으로 같은 항렬의 황족을 물색하게 되었다.] 결국 대안이 없으니 차선책으로 같은 항렬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는데, 도광제의 손자 항렬에서 가장 상식적인 대안은 아이러니하게도 서태후의 라이벌인 도광제의 황6자 '''공친왕의 둘째아들 재형(載瀅)'''이었다.[* 도광제의 1~3남은 요절하여 친아들이 없었고, 5남 돈근친왕은 아들이 많았지만 가경제의 3남인 돈각친왕 면개의 양자로 들어가서 족보상으로는 도광제의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에(함풍제는 4남), 이들을 모두 제외하면 공친왕이 도광제의 아들들 중 가장 연장자였다.] 재형은 3살 위의 형 재징(載澂)이 그럭저럭 잘 컸기 때문에 공친왕가를 계승할 종법상의 후계에 여유가 있었고 나이도 마침 10대 중반이었기 때문에 즉위하면 곧장 친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흥친왕|이재면]]이 있어서 후사에 문제가 없던 [[흥선대원군]]과 [[신정왕후 조씨]]의 합의로 임금에 오른 [[고종(대한제국)|이재황]]의 포지션인데 나이까지 적절했던 셈. 한편 양국의 왕가 내에서의 항렬자 '재'자도 한자까지(載) 같다. 하지만 이렇게 된다면 청나라의 모든 이들이 공친왕의 1인 영도에 엎드려 절하는 세상이 열릴 것이므로 권력에 환장한 서태후는 이를 용납치 않았고, 재형이 도광제의 황8자 종단군왕 혁합의 후사로 입적했다는 핑계로 재형의 제위 계승을 반려한 후[* 서태후는 동치제와 함께 자금성에서 자라던 시절부터 재형을 진심으로 싫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형을 혁합의 후사로 출계시키는 입양을 주도한 것도 [[서태후]]였는데 정작 혁흔의 사후 터진 [[의화단의 난]] 때 서안으로 몽진하면서 서태후는 가만히 있던 재형의 작위를 빼앗기로 결정, 재형은 혁합의 양자로서 얻은 버이러 작위를 박탈당하고 파양까지 당하고 말았다. 쉽게 말해 모든 의전을 박탈하고 공왕부의 뒷방 짐덩이 신세로 만든 것. 재형의 아들 부위가 공왕작을 계승하긴 했는데 이조차도 재형의 아들이 아닌 후사 없이 요절한 재징의 양자로서 계승케 한 것이라 의전상으로 재형에겐 별 예우도 없었다. 이후 혁합의 가문은 재형이 아닌 황7자 혁현의 아들 재도가 계승하게 된다.] 보다 적당한 꼭두각시감을 찾아 다시 족보를 뒤져보기 시작했다. 한편, 함풍제의 동생들 중에는 공친왕 혁흔 외에도 [[순친왕|순현친왕 혁현]]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혁현은 원래 도광제의 황7자로, [[동치제]] 즉위 직후 [[서태후]]와 혁흔이 [[기상정변]]으로 숙순 등 보정대신들을 제거할 때 태후들이 조서를 내려 보군통령으로 임명되어서 북경의 군사력을 장악함으로써 보정대신들을 체포한 덕에 동치 연간 내내 서태후의 신임을 받아온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혁현은 부인이 서태후의 여동생이었기에 서태후는 혁현의 형수이자 처형이었는데, 동치제가 후사 없이 요절하자 서태후는 차마 공친왕의 아들을 데려올 수는 없다는 의도로 자신에게는 조카인 4살짜리 어린아이인 재첨을 양자로 뺏어와서 [[광서제]]로 즉위시킨다. 허나 이는 평범한 사촌 간 입양이라기엔 상당히 부적절했다. 종법상으로도, 인정상으로도 자신의 외아들이 죽었으니 동생의 외아들을 뺏어오는[* 혁현의 첫 아들은 요절했고, 재첨을 양자로 뺏긴 뒤 낳은 3, 4남도 요절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잘 키워낸 5남이 바로 [[선통제|부의]]의 친아버지인 재풍.] 무례한 행동이었다. 이를 통보받은 혁현은 서태후의 권력욕을 체감하며 '''통곡'''하다 실신을 할 정도로 충격에 빠졌다. 이후로도 혁현은 광서 연간 내내 서태후에게 인질로 잡혀있는 아들의 안위를 지키는데에 골몰하며 서태후의 [[예스맨]]이 된다. 유일하게 서태후를 제지할 수 있었던 [[효정현황후|동태후]]마저 의문사하자 더욱 넙죽 엎드리며 서태후에게 설설 기었던 혁현은 명목상으로는 [[청불전쟁]]에서 복건함대가 전멸하며 혁흔이 총리아문과 군기처 직책에서 물러나자 군기대신이 되며 정계의 전면에 나섰으나, 실상은 아들을 인질로 잡아간 서태후가 시키는대로 행동해야 하는 방탄대신에 불과했다. 혁현은 물론 재풍보다 어린 다른 친가 동생들인 재순, 재도도 기껏 외국에 유학 갔다와서 해군대신, 양황기 몽고도통[* 재도는 승마덕후여서 프랑스에서 배워온 군사학도 기병전을 중심으로 공부했고, 덕분에 청나라의 마지막 남은 기병 전력인 몽골 기병대의 수장이 되었다. 물론 밀덕한테 실권을 쥐어준다고 잘할리는 없었다.]에 앉혀줬건만 유폐된 큰형에게는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렇게, 평범한 방계 황족으로 잘 먹고 잘 살 것만 같던 재첨에게서 '''서태후의 꼭두각시'''로서의 불행한 삶이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