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종(고려) (문단 편집) == 평가 == >[[휘]][* 왕의 이름]는 소(昭), [[자(이름)|자]]는 일화(日華)이니, [[정종(고려 3대)|정종]]의 동복 동생이다. 신하를 예(禮)로써 대우하고, 사리를 듣고 판단하는 데에 밝았다.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고 선비를 소중히 여겼으며, 밤낮으로 부지런하여 거의 태평한 정치를 이루었다. 그의 치세 중반 이후로는 참소를 믿어 사람을 많이 죽이고 불법(佛法)을 지나치게 좋아하였으며, 사치함이 절제가 없었다. 26년간 재위하고 수명은 51세였다. >---- >'''《[[동국통감]]》 권13 <고려기> -광종 대성왕에 대한 평가- ''' >광종은 양면성을 가진 군주였다. 공신세력을 축출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고 고려왕조의 기틀을 다진 위대한 업적을 세운 군주이면서 병적으로 숙청작업에 몰두한 피의 군주이기도 하였다. >---- >'''네이버 캐스트의《인물한국사》中 실학박물관장 정성희의 평가''' 치세 중에 일으킨 숱한 유혈사태와 말년의 편집증적 행태에도 불구하고, 광종은 [[고려]]조의 [[명군]]을 거론할 때 반드시 포함되는 왕이다. 그만큼 그가 고려라는 국가의 기틀을 닦았으며 훌륭한 치적을 많이 남겼다는 대에는 이견이 없는 편이다. [[태조(고려)|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는 엄밀히 말해 겉모습만 국가였지, 후삼국 말기 지방호족들이 중앙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합종연횡과 이합집산, 이전투구를 거듭하던 호족 연맹체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본격적인 중앙집권국가 [[국가]] 고려로 탈바꿈된 것은 순전히 광종이 이뤄낸 업적이었다. 광종이 고려 왕가를 피바다로 만들었다며 비판받는 부분은 '''지나치다고 여겨지는''' [[호족(한국사)|호족]]과의 대립, 숙청 부분인데 광종에 대한 비판적 평가들은 당연하게도 모두 그 학살의 피해자인 공신들의 후손, 대호족이나 신권을 강조한 유학자들에 의해서 나왔다는 것도 꽤 유념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성종(고려)|성종]](제6대) 때 [[최승로]]의 <시무 28조>에선 태조와 함께 가장 자주 거론되는 국왕이 광종이다. 참소를 믿고 지방 영주들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았으며 궁실을 크게 증축하고 사치스러웠는가 하면 [[쌍기|특정 집단]]을 편애했고, [[불교]]를 지나치게 숭상하는 동시에 ([[노비안검법]]으로) 귀•천의 구분도 없어졌고, 궁궐에 호위병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뒀다는 등 온갖 핑계를 대며 그가 거론될 때마다 모진 비판을 가했다. <시무 28조>에서 지적하는 [[고려]] 사회의 폐단은 곧 [[최승로]]가 개인적으로 바라본 광종의 폐단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 시무책 앞에 있는 긍정적인 평가는 <시무 28조> 앞에 실린 <5조 치적평> 초반에 좀 있는 정도이고, 나머진 전부 부정적인 내용 투성이다. 창업 군주의 아들이었지만 장남이 아니었다는 점, 왕위에 오른 뒤 정적들을 냉혹하게 학살했다는 점이 똑같은 [[조선]]의 [[태종(조선)|태종]]과 비교되는 경우도 있으나, 자세히 보면 사정이 꽤 다르다. [[정몽주]]를 제외하면 태종이 상대해야 했던 자들은 [[정도전]] 일파에서 [[심온]] 가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공신과 외척이라는 존재로서 후대의 전주 이씨 왕실에 대한 잠재적 위협이었을 뿐 [[조선]]에 반기를 들거나 왕실을 우습게 여긴 것도 아니고 딱히 태종과 추잡한 이권 다툼 따위로 죽을둥 살둥 대립했던 것도 아니다. 태종과 왕족들이 정도전에게 반발한 것은 표면상 사병 혁파 이전에 왕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신권주의 때문이었다. 심지어 태종에게 충성했거나 혹은 심온처럼 천성이 그런 욕심 자체가 없었던 자들이었다. 반면에 광종은 전국 각지에 깔려있는 [[호족(한국사)|호족]]들, 즉 자신의 영지에서는 왕 노릇하며 중앙의 왕씨 왕실을 우습게 여기고, 왕에게 반항하기를 예사로 하는 그 군벌조직인 호족들, 항상 자신들 입맛에 맞는 왕으로 갈아치우려고 자기네들끼리 공작을 펼치거나 왕위에 오른 [[혜종(고려)|두]] [[정종(고려 3대)|명]]의 형들을 요절하게 만든 바로 그 호족들을 모조리 박살내고 왕권을 굳게 세워야 했다. 때문에 훨씬 더 냉혈하고 과격한 방식으로 숙청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충분히 감안해야 할 것이다. 광종이 태종보다 딱히 더 잔인했다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사병 혁파 정책으로 군세를 거느리는 것만으로도 반역, 혹은 도발이라고 아예 못을 박아뒀던 [[태종(조선)|태종]]과는 달리, 이 시기 [[고려]]의 [[호족(한국사)|호족]]들은 맘대로 사병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병들의 원천은 그들이 불법적으로 노비로 삼은 이들이었다. 광종이 이러한 거센 정치적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양인 출신 노비들을 다시 본 신분으로 되돌린 것도 호족의 경제력 뿐 아니라 사병 집단 자체를 아예 없애려는 목적이 컸다. 호족들은 이러한 조건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군사적으로 [[쿠데타|딴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호족 연합 정권에 가까웠던 고려 초기의 이런 특수성을 감안하면, 고려를 '정상적인' 왕권 국가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선 한 국가의 기득권층을 또 한 번 뿌리째 들어내야 했기 때문에 광종은 태종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피를 손에 묻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단적으로 [[태조(고려)|태조]]의 후비(后妃)(임금의 정실과 후궁)는 29명이나 되었고, 이들은 대부분 호족 집안의 자식들이었다. 자연히 광종이 없애거나 견제해야 할 외척들만 해도 태종보다 훨씬 많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들은 결코 믿을 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또한 당시 [[고려]]의 유학자들이나 [[조선]] 왕조 유학자들은 유교적 덕치에 반했다는 이유로 광종을 맹렬히 비난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학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기반인 '''[[과거 제도]]의 첫 시행자가 광종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고려의 정치가 그냥 쭉 지방 대호족에 잠식되었다면 최승로가 속한 6두품 경주 최씨는 아무리 학식이 뛰어나도 호족들에게 눌려 간언을 하지도 못했으리라. 고려 왕조는 물론이고 후대 조선 왕조까지의 명백한 근간이 되는 제도를 처음으로 들여온 왕이라고 할 수 있다. [[태종(조선)|태종]]이 한 일은 남아있는 약간의 불안요소를 확실히 쳐내서 내정을 확실히 안정화시킨 것이였다면 '''광종은 사실상의 내전 가능성 자체를 최대한 줄여준 것이었다.''' 그나마도 광종이 이 때 호족들을 확실히 박살내지 않았다면 다음 왕인 [[경종(고려)|경종]]이 광종이 했을 일을 대신 수행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즉, 광종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한번은 제대로 호족들을 제압하기 위한 피바람이 불어야만 했고, 그것이 그것을 추진할 의욕도 능력도 있고 시기도 알맞았던 광종 본인이 직접 주도한 것이었다. 비판이라면 지나친 학살로 인해 아들 경종에게 심적인 부담이 지워졌다는 것인데, 이는 [[명나라]] 태조 [[홍무제]]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허나 숙청을 하지 않았다면 어차피 경종은 왕이 되기도 전에 살해당하거나 갈아치워질 수 있는 불안한 정국이었다. 결국 광종의 숙청 덕분에 다음 대의 [[성종(고려)|성종]](제6대)과 [[현종(고려)|현종]](제8대)이 일을 제대로 할 수있었다. '''광종이 자신의 친아들인 [[경종(고려)|태자]]까지 죽이려고 했던 점은 확실히 도가 지나치긴 했다.''' 경종이 유약해진 것의 절반은 광종 탓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 그 탓인지 광종 사후 즉위한 그 후계자인 경종이 '''[[복수법|무고를 당한 자의 가족이 사사로이 복수를 할 수 있도록 한 법]]'''을 제정한 것은 광종 시기 지나친 학살의 여파로 보는 견해가 많다. 물론 하도 정신나간 법이라 경종도 질색하여 금방 없애긴 했지만... 광종이 학살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근본적으로 아버지 태조 왕건의 과오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상황이 많이 꼬여버린 것도 있지만 그 왕건이 1비 [[신혜왕후]] 유씨가 낳은 자식을 태자로 세울 수 있었다면 이 정도의 분란까지는 겪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혜왕후가 자식도 없는 상황에서 사실상 힘을 잃은 바람에 위협거리도 안 되는 집안 출신 [[장화왕후 오씨|2비]]의 아들이 적장자가 되어버린 상태에서 [[신명순성왕후|3비]]와 [[신정왕후 황보씨|4비]]는 알짜배기 대호족 출신이고 [[신성왕후|5비]]는 신라 진골 귀족 출신, [[정덕왕후|6비]]는 1비가 죽었다고 해서 장인인 [[유천궁]]의 가문에 다시 장가들어 얻은 왕후였으니... 결과적으로 혜종은 왕건의 실책으로 불안감 속에서 아무 것도 못하고 죽었으며 정종부터 본격적으로 숙청에 들어가 광종 대에 들어서야 마무리를 짓게 된다. 하지만 한가지 유념해야 할 부분은 광종의 지나친 숙청은 그에 걸맞게 역풍 또한 크게 일으켰다는 점이다. 광종의 대규모 숙청과 개혁은 분명 [[호족(한국사)|호족]]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후 그의 아들인 [[경종(고려)|경종]]과 그 이후 [[성종(고려)|성종]]대에 이르기까지 광종의 정책들은 거의 대부분 롤백을 당하게 되어버렸다. 이 부분에서는 정밀타격식으로 피를 최대한 안 묻히는 방향으로 숙청을 엄격하고 정밀하게 진행하여 [[세종(조선)|자신의 아들]]을 자신을 뛰어넘는 성군으로 만든 조선의 [[태종(조선)|태종]]과 크게 비교되며, 이후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고려)|강조]]가 군사력을 동원해서 [[목종(고려)|목종]]을 무력으로 폐위하고, [[현종(고려)|현종]]을 강제로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한 [[강조의 정변]]으로 고려의 왕권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은 '''과연 광종의 대규모 호족 숙청이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심지어 현종은 이러한 여파 탓에 [[여요전쟁]]으로 인해 퇴각하던 도중에도 지역 호족들의 소규모 군사반란들에 계속 시달리면서 피난을 가야만 했을 정도였었다. 이렇듯 최대한 대상을 가리고 피흘리는 것을 절제해서 엄격하게 숙청을 진행했던 태종과 달리 광종은 자신의 외가와 친조카, 동생들까지 대상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숙청해버려 국왕을 지지해주는 근왕 세력들까지 남김 없이 학살해버렸다. 게다가 아들까지 의심해 아들인 경종은 [[전시과]]를 시행하는 등의 치적을 남겼지만 부왕에게 받은 학대로 인해 말년에 심적 고생을 겪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