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종(송) (문단 편집) === 즉위와 표독스런 황후 === [[효종(송)|효종]]의 3남이자 [[성목황후]] 곽씨[* 남편인 [[효종(송)|효종]]이 즉위하기 전에 사망하여 황후로 추존되었다.]의 소생으로 1147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효종의 총애를 받았던 장남 장문태자가 요절하자 [[태자|황태자]]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태상황]]인 양할아버지 [[고종(송)|고종]][* 아버지 효종이 [[고종(송)|고종]]의 [[양자(가족)|양자]]로 입적했다.]과 아버지 효종이 아직 건재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태자로 있었다. 이런 까닭에 황태자 시절 자신이 40살이 넘어감에도 아버지가 [[양위]]할 의사가 없어보이자 자신의 하얗게 된 수염을 보이면서 주변에 이를 한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187년 태상황 고종이 세상을 떠나고 3년상을 치른 효종이 1189년 퇴위하여 상황이 되자 양위를 받아 43살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기본적으로 효성이 지극하고 온순하며 신중한 성격이었지만, [[명군]]인 아버지 효종과 달리 심약하고 의심이 많았으며, 끔찍한 [[공처가]]라서 아내 [[자의황후]](이봉랑)[* [[1144년]]생으로 하남의 절도사 이도의 딸이다. 송 고종이 황보탄의 건의를 받아 간택된 뒤, 광종과 결혼하였다.]의 말밖에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봉랑의 질투가 심하고 성격이 영 좋지 않아서, 이봉랑을 간택한 시할아버지 고종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고, 시아버지 효종도 이봉랑을 싫어해서 시행하지만 않았을 뿐 폐후로 만들려고 했을 정도로 영 사이가 나빴다. 이에 이봉랑도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한다며 광종과 효종 사이를 이간질하여 부자 사이를 시간이 지날수록 갈라놓았다. 즉위 후, 자의황후의 친정 아버지 이도(李道)를 왕에 봉하고, 이씨 일족들을 대거 등용하면서 자의황후와 이씨 일족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거기다 투기와 질투가 심한 자의황후는 광종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는데, 한번은 광종이 자신의 발을 씻어주는 [[궁녀]]의 손이 뽀얗고 아름답다며 웃으며 쓰다듬자, 그날 밤 광종의 처소로 그 궁녀의 잘린 두 손을 찬합에 넣어 배달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판국이니 광종의 [[후궁]]들 역시 자의황후의 마수에 자유롭지 못했다. 예를 들어 귀비 황씨는 광종이 공왕 시절 맞아들인 후궁으로 사려 깊은 성격이라 광종이 총애했는데, 자의황후는 질투심 때문에 광종이 없는 사이 사람을 보내 귀비 황씨를 때려죽이고는 횡사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다른 후궁인 귀비 장씨와 첩여 부씨는 궁궐 밖으로 내쫓았는데, 그녀들은 다른 사람에게 재가했다.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2359|자의황후의 투기심]]. 이렇듯 심약한 성격에 연달아 아내 자의황후에게 시달리던 광종은, 고작 즉위한지 2년만에 [[정신질환자]]가 되어 결국 맛이 가 버렸다. 갑자기 한밤중에 발작해 혼자 울부짖기도 하고 침실에서 뛰처나와 미친 듯이 궁궐 안을 방황하기도 했다. 이때 자의황후는 남편을 대신해서 국정을 주관했는데 자신의 친척 100명에게 관직을 하사하는 등 권력을 남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