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주광역시/정치 (문단 편집) ==== 제2장: 호남 포위의 시작, [[3당 합당]] ==== 한반도 남부가 넷으로 갈라져 있는 상황이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1990년]] [[1월]]에 평화민주당을 제외한 세 당이 [[3당 합당]]을 선언하고 [[민주자유당]]이 창당되는 식으로 끝나게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가뜩이나 박정희 때부터 이어져 온 노골적인 지역 감정 부추기기가 5.18 민주화운동을 기폭제로 하여 호남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전국적으로 퍼져있는 마당에, 호남 정당인 평화민주당을 남겨놓고 나머지 세 당이 합당해 버리면서 지역적으로 완전히 갇히는 구도가 생겨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3당 합당에 반대한 통일민주당의 몇몇 의원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노무현]]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이었다.]이 탈당하여 [[민주당(1990년)|새로운 민주당]]을 결성하였고 1991년에는 평화민주당의 후신인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하면서 [[민주당(1991년)|단일 야당]]을 탄생시켰다. 그렇게 민주당계 정당 역사상 가장 험난한 싸움을 하게 되었고 그 중심에 있었던 광주광역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2년 뒤 있었던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는 3당 합당 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전국단위 선거였다. 6년 전과 마찬가지로 민주당 후보들이 광주광역시 5개 선거구를 압도적인 득표율로 싹쓸이했으나 이전보다는 소폭 감소하여 최저 58%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이는 공천에서 불복해 탈당한 사람들이 무소속 출마하여 표를 갉아먹은 것도 있었고, [[정주영]] 현대 회장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면서 민주당 지지도를 일정 부분 얻은 것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1992년 12월 18일에 열린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다시 민주당 김대중 후보가 95.84%로 5년 전보다 더 압도적인 득표율로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비호남권에서는 서울특별시를 제외하고 전지역에서 김영삼 후보에게 패해 낙선했는데, 거듭된 낙선과 지역 차별로 인해서 대통령 선거에 한해서는 광주광역시 유권자들이 하나로 결집되는 성향이 점점 강해졌던 것으로 분석된다. 김대중이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민주당이 사실상 공중분해되면서 광주광역시 유권자들은 절망에 빠졌고, 구심점이 사라지면서 정치적 관심도가 크게 낮아졌다. 그 결과 1995년 열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불과 64.83%의 득표율로 이전 선거들에 비해 투표율이 크게 하락하였고, 집권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득표율이 박정희 : 김대중 양자구도였던 제7대 대통령 선거 이후 24년 만에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