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주광역시/정치 (문단 편집) ==== 제1장: [[제16대 대통령 선거]] ==== 이후 열린 선거들 모두 [[민주당계 정당]]이 압도적인 지지도를 받기는 하지만, 집권에 대한 열망을 이루어낸 탓인지 이전만큼의 결집도는 보이지 못하고 유권자들은 빠르게 느슨해졌다. 대선 6개월 뒤 열린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고재유 후보가 당선되긴 했지만 67.20% 득표율로 고작 더블스코어밖에(?) 차이를 내지 못했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공천에 불복한 후보들이 난립하면서 직선제 이후 사상 처음으로 광주광역시에서 다자구도로 선거가 열렸다. 대다수는 낙선했지만 [[강운태]] 후보가 과반의 득표율을 얻으면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첫 무소속 후보로 당선되었는데, 민주당 일색이었던 광주광역시에서 이변으로 받아들여질 놀라운 결과를 일으키며 일대 신드롬을 일으켰다.[* 심지어 문민정부에서 관선 광주직할시장과 장관을 지냈기에 더더욱 놀라운 결과였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나중에 광주광역시장까지 오르게 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 이후 힘을 얻은 광주광역시 유권자들은 민주당 내에서 막강한 힘을 과시하며 당 내에선 동교동계, 당 외부에선 경선에서 민주당의 방향을 결정짓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경선 당시 한화갑, 이인제등 쟁쟁한 경쟁자들 대신에 광주광역시 유권자들은 영남 출신 [[노무현]]을 후보로 선출시키는 대이변을 만들어냈는데, 당시 호남 결과로 인해서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던 만큼 이들의 영향력은 민주당 내에서 매우 결정적이었다. 호남 출신 후보가 있었음에도 당내 세력 하나 없는 노무현을 광주광역시가 선택한 이유로는, 당시 여론조사에서 다른 후보들은 그 어떠한 구도에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패배하는 것으로 나온 반면에, 노무현 후보가 유일하게 양자구도에서 이회창을 이기는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영남 출신이라는 당시로서는 치명적인 단점[* 지금의 지역 감정을 생각해선 안 된다. 이 때도 1980년대에 비하면 누그러지긴 했지만 지역 감정이 상당했던 시절로서, 광주광역시 사람이 영남 사람을 사귀기만 해도 집안에서 좋은 소리 못 듣던 시절이었다.]에도 불구하고 광주광역시 당원들은 한나라당을 '''이기기 위한 전략적 선택'''을 한 것이다. 다만 아무리 전략적 선택이었어도 노무현 후보도 [[제5공화국 청문회]] 당시 [[노무현 명패 사건]] 등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매우 치열한 활동을 했으며 동서화합을 이뤄내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서 민주당 깃발 달고 매번 부산광역시에 출마하며 낙선하는 정말 갖은 노력해온 행보를 광주광역시 시민들도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이전의 선거 양상과는 분명히 다른 결과였다. 이전에는 김대중 한 사람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와 그를 통해 호남이 바뀌기를 바라는 열망에 가까웠다면, 이번 결과는 많은 선택지 중에서 이길 가능성이 있는 답안지를 선택한 것으로, 사실상 '[[영남후보론|호남 유권자들의 선택과 집중]]'을 전면에 드러낸 역사적 사건의 첫걸음이었다. 노무현 후보는 이후 여러 부침을 겪은 끝에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48.91%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광주광역시에서는 이번에도 총 715,182표(95.17%)의 표를 몰아주면서 [[민주당계 정당]]의 2번째 대통령 선거 승리에 기여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26,869표(3.57%)를 득표했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3년]]부터 [[대북송금 특검]] 사태로 동교동계와 친노계가 갈라서기 시작했으며, 당내 쇄신을 놓고 내분이 벌어진 끝에 [[새천년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이 갈라져 나오게 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면서 동교동계에 대한 비판적 뉘앙스의 발언을 여러 차례 했고, 그 와중에 '유권자들이 열린우리당을 선택했으면 좋겠다'는 발언을 하게 되었다. 이것을 문제삼아 동교동계 주축의 새천년민주당은 한나라당을 끌어들어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탄핵을 발의하게 되었으나]], 오히려 새천년민주당 및 한나라당에게 역풍이 불면서 탄핵 가결 뒤에 치러진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열린우리당]]이 지역구 7개를 싹쓸이하는 위엄을 과시했다. 이는 당시 새천년민주당이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과 공조하여 [[노무현]]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탄핵]]을 끝끝내 밀고 간데''' 대한 시민들의 반발과 호남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김대중]]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 마저 탈당 사태에 대해 침묵하고 탄핵에 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사실상 노무현 전 대통령에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은 노무현을 포함한 [[통합민주당(1995년)]]의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소속 정치인들 대부분의 [[새정치국민회의]] 입당을 환영하였다. 그래서 탄핵 사태 때 김대중은 작심한 듯 탄핵 주도 세력에게 쓴소리를 했고 이는 새천년민주당에게 있어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였다. 물론 단순히 탄핵과 김대중 전 대통령 덕분에 열린우리당이 승리한 건 아니다. 이미 탄핵 이전부터 광주광역시뿐만 아니라 호남 전역에서 열린우리당이 새천년민주당을 누르고 지지율 1위를 고수하고 있었다(새천년민주당이 한나라당과 함께 탄핵을 추진했기 때문). 이 결과는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의 입장을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고는 하나 엄연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후신 정당은 [[새천년민주당]]이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광주광역시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감안하면 아무리 역풍이 불었다 하더라도 사실상 광주에서 20여년 간 집권여당 노릇을 한 민주당이 참담하게 버림받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새천년민주당을 큰 차이로 따돌렸을 때에도 많은 사람들은 '''썩어도 준치라고 광주광역시에선 민주당을 뽑겠지'''하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열린우리당]]의 승리였다. 이는 아무리 김대중 전 대통령의 후신 정당이라 해도 무턱대고 지지하지 않는다는 강한 시그널이었으며 광주광역시를 텃밭으로 여기고 소홀히 했다가는 강한 심판을 내릴 것이라는 광주광역시의 경고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선택과 집중 전략이 국가단위 선거에서 처음으로 영향을 발휘했던 선거라고 볼 수 있는 중요한 변곡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