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주학생항일운동 (문단 편집) === 크게 번진 싸움 === 같은 해 '''11월 3일'''은 음력 10월 3일 [[개천절]], 성진회 창설 3주년, 그리고 [[메이지 유신]]을 기념하는 명치절[* 일본에서는 1947년에 [[문화의 날(일본)|문화의 날]]로 개칭되었다.]이 겹치는 [[일요일]]이었다. [[일본 제국]]은 [[2.28 학생민주의거|학생들에게 등교할 것과]] [[신사참배]]를 요구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명치절 기념식에서 [[기미가요]] 제창과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10월 30일 사건을 편향되게 보도한 광주일보사[* 현대의 광주-전남 지역의 지역신문인 [[광주일보]]와는 별개의 신문사다. 현대의 광주일보는 1952년에 창간한 전남일보가 시초고 광주일보라는 이름도 1980년부터 썼다.]에 찾아가 편파 기사에 대한 정정을 요청하였으나 신문사에서는 성의 있게 대응하지 않았고 화가 난 학생들은 신문사로 몰려와 윤전기에 모래를 끼얹어 파손시키며 분풀이를 하였다. 그러던 중 [[광주신사]][* 현 [[광주공원]]에 위치. 1926년에 신사의 대문인 토리이(鳥居)가 세워졌다.]에 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던 광주중학 학생 14명과 광주고보 학생 8명과의 패싸움이 또 벌어졌다가 일본 학생들이 한국 학생 최상현을 단도로 찌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몰려가 광주중학교 학생들을 [[충장로(광주)|충장로]]에서 두들겨 팼고 얻어맞은 광주중학교 학생들은 광주동부소방서 방면으로 도망쳤다. 이 일이 알려지자 산발적인 싸움이 아닌 학교간의 전면적인 패싸움이 벌어졌다. 수백명의 광주중학교 학생들이 '''학교 유도교사의 인솔 하에''' [[야구방망이]]나 [[죽창]] 따위를 들고 광주역으로 가 하교하려는 한국인 학생들을 공격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가만있지 않고 몽둥이 등을 급히 들어 곧바로 달려갔고 한국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의 싸움으로 광주시내는 [[개판]]이 되었다. 양교 교사들과 경찰, 소방대원까지 동원되어 싸움을 말렸지만[* 소방대원들은 한국 학생들에게 물을 뿌리기까지 했다.]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한편 광주중학교의 교사가 광주고보의 교사 와타나베에게 학생들을 데리고 물러갈 것을 제안하였고 이에 와타나베는 먼저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물러나게 하는 것은 우리 학생들을 깔보는 태도니 양쪽이 물러나야 싸움이 끝난다고 응답했다. 광주중학교의 교사들이 이를 인정하며 학생들을 이끌고 물러나자 광주고보의 교사들도 학생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그렇게 싸움은 끝났으나 일요일 정오인데도 학교로 돌아온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일본에 대항하는 항일투쟁을 할 것을 논의했다.[* 이때 학생들이 다칠 것을 우려해 와타나베 교사가 말렸으나 결국 광주고보 학생들의 행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시내 각 학교 학생들도 투쟁에 동참할 뜻을 밝혔다.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고등학교, 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 학생들은 [[괭이]]자루, 장작개비, [[목검]] 등으로 무장하고 오후 2시경부터 행진가를 부르며 시내로 진출했다. 시위대는 '[[조선독립만세]]',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일제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고 [[애국가]]와 응원가를 부르며 우선 광주중학교로 향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소방대, 재향군인을 동원해 광주중학교로 가는 동문다리를 틀어막자 시위대는 충장로로 방향을 틀었다. [[전라남도청|전남도청]]에 이르자 전라남도공립사범학교 학생 100여명을 비롯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와 수피아여자고등학교 학생들, 학생이 아닌 광주 시민까지 시위대에 합류했다. 30,000여 명에 이른 시위대는 도립병원(현 [[전남대학교병원]] 위치) 광장에까지 진출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방향을 돌려 [[광주천]]변을 행진하다가 해산했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와 비상 연락과 부상자 입원 문제를 의논한 뒤 해산했다. 한편 광주시내의 일본인들은 시위대와의 충돌을 피해 가게 문을 닫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 사태의 결과 일본 경찰에서는 소란을 피웠다는 이유로 한국 학생 75명을 체포했지만 일본 학생들은 10명 정도만 잡아가는 시늉을 하였다. 그리고 11월 9일까지 임시 휴교 처분을 내렸다. 한편 조선총독부 학무국장은 이 일이 전국으로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학생운동의 철저한 탄압을 각지의 학교장들에게 지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