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광해군/생애 (문단 편집) === 전후 복구 === 호적과 토지를 다시 조사하여 세수를 확보하고, [[임진왜란|왜란]]으로 인해 소실된 여러 서적들을 복원했으며 [[동의보감]]을 발간했다. 또 [[창덕궁]] 등을 지어 왕실의 권위를 바로 세우려 노력했다.[* 다만 창덕궁 공사 자체는 선조가 시작했고 광해군 2년 대에 완성되었으니 실질적으론 선조가 추진한 공사였다.] 또 [[임진왜란]] 과정에서 [[한성부|한양]]이 생각보다 방어에 취약하다는 것을 느꼈던지 일찍부터 [[천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에 [[지관]] 이의신의 견해에 따라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요지인 [[파주]]의 교하로 천도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신들이 [[묘청의 난]] 등의 전례를 들어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결국 [[인조반정|반정]]으로 실각함에 따라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 외에 [[광해군]] 시기 적상산성과 [[남한산성]] 석성 개축, 북방 성벽 강화, [[강화도]]에 진지 구축, [[조선 수군|수군]] 훈련 등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다만 [[광해군]] 대부터 [[인조]] 대까지 [[이괄의 난|반란]]과 [[정묘호란|호]][[병자호란|란]]으로 소실된 기록이 많아 구체적으로 얼마의 병사들이 전방에 배치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부실한 편이다. [[인조반정|반정]] 세력은 집권 후 민생 파탄의 주범이었던 궁궐 공사를 중지하는 제스쳐를 내보여 급작스런 정권 교체로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 물론 [[인조]] 정권 역시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호]][[병자호란|란]]으로 궁궐 등을 공사를 하긴 했지만 [[인조]] 대의 그것은 규모와 필요 성면에서 [[광해군]] 대의 그것에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