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괴팅겐 (문단 편집) == 역사 == 고고학 발굴 결과 서기 7세기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또한 이 일대에 10세기 무렵 구팅기(Gutingi)라는 명지명이 기록에 언급되며 처음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10세기 무렵 이 곳에 새워진 수도원과 그 주변의 주거지에 흐르던 작은 개천의 이름이 Gote였고 여기서 유례된 이름으로 여겨진다.] 이후에도 듣보잡에 가깝던 이 곳에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머물던 성(Pfalz Grona)이 지어지면서 그 중요성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본래 하르츠 지역에는 황실소유 광산들이 있었기 때문에 팔츠(Pfalz)가 흔했던 곳이다.] 특히 당시의 작센과 헤센을 이어주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무역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12세기에 도시 지위를 부여받는데, 구체적으로 누가 도시 지위를 준 것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하인리히 사자공]][* Heinrich der Löwe. [[작센]]과 [[바이에른]]의 공작을 겸했으며, [[동방식민운동]]에도 많은 기여를 한다.]이 부여했다는 설이 가장 자주 언급되는 편. 명목상 하인리히 사자공의 가문이었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 훗날 세를 키워 [[하노버 왕국]]의 왕실이 되었으며, 현재 영국 [[윈저 왕조]]의 조상이기도 하다.]이 대대손손 소유하기는 했으나 상당한 자치권을 보유했으며, 앞서 말했듯이 독일 남부와 북부를 오가는 교통로의 가운데에 있다는 이점[*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이 무렵 독일의 양대 상업 거점이던 [[뤼벡]]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중간지점이었다.]을 활용하여 [[한자동맹]]에 가입, 직물과 양모 무역을 통하여 중세 말기 경제적 번영을 누린다. 하지만 16세기 초반 칼렌베르크 공작 에리히 1세[* 괴팅겐을 다스리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의 대가 일시적으로 끊긴 이후 새로 이 지역의 패권을 차지한 인물이다.]의 간섭에 반발하여 그에게 충성 맹세를 거부하였다가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무법 도시로 명명되는 홍역을 치르면서 그 세가 빠르게 악화됐고,[*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이 홍역을 치른 뒤 칼렌베르크 공작과 괴팅겐 사이의 사이가 막상 꽤나 우호적이었다는 점이다. 칼렌베르크 공이 괴팅겐에게 금전적으로 많이 의존했기 때문(...) ~~역시 [[쇼미더머니]]는 만고불변의 진리~~] 엎친데 덮친 격으로 16세기 후반 급성장한 영국의 모직물 산업에 밀리면서 완전히 몰락하고 만다. 이후로도 여러차례 주인이 바뀌는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애초에 오늘날 [[니더작센]] 일대가 중세-근대 시기 독일 문화권 내에서도 가장 군소공국이 난립하던 지역이었다. 니더작센이라는 지명이 등장한 것은 빨라야 19세기 후반 [[독일 제국]]의 성립 이후이며, 늦으면 [[1920년대]]까지로 그 시기가 밀린다.] 1692년 [[하노버]] [[선제후]]가 이 곳을 차지한다. 1737년 [[동군연합|하노버 선제후이자 영국의 국왕이었던]] 조지 2세의 명령에 의해 [[괴팅겐 대학교]]가 건립된다.[* 참고로 하노버와 영국의 동국 연합은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면서 끝이 난다. [[살리카 법]]에 따라 독일에서는 여자 군주가 즉위할 수 없었기 때문.]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프랑스 군이 이 곳을 점령하면서 일시적으로 베스트팔렌 왕국의 영지에 편입되었다가[* 이 때 나폴레옹이 전투를 수행하던 도중 괴팅겐을 포격하려다가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우스]]가 이 곳에 머무른다(당시 괴팅겐 대학교에 교수로 재직중)는 소식을 듣고는 포격을 포기했다는 [[카더라]]도 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다시 하노버 왕가의 소유지로 넘어온다. 하지만 하노버 왕국은 [[7주 전쟁]] 당시 줄을 잘못섰다가 공중분해되어버렸고, 하노버 일대가 [[프로이센 왕국]]에게 흡수되면서 괴팅겐 역시 프로이센의 일원으로 편입된다. 이후 [[독일 제국]] 시기에도 괴팅겐 대학교의 학문적 성취에 힘입어 괴팅겐은 독일 내에서도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맡았지만, 1933년 [[나치]]가 집권하면서 암운이 드리운다. 당시 괴팅겐 대학교에는 무수히 많은 유대계 학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대거 쫓겨났던 것. 특히 [[에드워드 텔러]]를 비롯한 유대계 학자들이 많았던 물리학 계열에서 타격이 컸다. 당시 나치는 이른바 아리안 물리학을 내세우면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주창한 [[상대성 이론]] 등을 유대인 물리학이라고 배척했기 때문.[* 여담이지만 순수 독일인이었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도 나치 독일 집권 직후 무심코 상대성 이론을 인용했다가 [[게슈타포]]로부터 [[코렁탕|코시지]]를 먹을 뻔 했다.] ~~그리고 에드워드 텔러는 미국으로 망명해서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는 것으로 복수를 했다.~~ 물론 유대계 학자들 뿐만 아니라 나치에 반대하는 학자들, 다른 이민 배경의 학자들, 여성인 학자들도 모두 떠나야 했다. 괴팅겐 대학교는 당시 여성인 [[에미 뇌터]]를 1919년 교수로 임명했을 정도로 독일 내에서도 당시 기준으로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의 대학교였다.[* 물론 괴팅겐 대학교 내에서도 에미 뇌터의 교수 임용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존재했었다. 물론 [[다비트 힐베르트]]가 "이곳은 대학교지 목욕탕이 아니지 않은가?"라며 반대목소리를 씹어먹었다.] 결국 대다수 교수들이 193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교직에서 쫓겨났고, 괴팅겐과 괴팅겐 대학교는 한동안 예전과 같은 학문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다.[* 이건 단순히 괴팅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독일 학계 전체가 나치로 인하여 겪어야 했던 댓가였다.] 2차 대전 중에는 교육 산업 중심의 소규모 도시라는 점 덕분에 융단폭격은 피했지만, 위에서 언급한대로 독일의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간선철도가 통과하는 지역이기에 철도와 역 그리고 철도를 따라 조성되어있던 산업시설들 중심으로 폭격을 맞았으며, 구시가지도 역에 가까운 지역은 큰 피해를 입었다.[* 괴팅겐은 여전히 2차세계 대전 불발탄들이 몇년 주기로 발견되는 곳 이며, 2010년에는 폭탄 해제 과정에서 폭탄이 폭발하여 폭발물해체요원 3명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종전 이후 이 지역 하노버 왕국과 관련이 많은 영국 관할지역으로 들어갔으며, 이후 서독의 성립과 함께 하노버 왕국 영역을 기반으로 새로이 편성된 행정구역인 니더작센 주에 편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