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보생명 (문단 편집) == 역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1jgMuZF3ZM)]}}} || 1958년 6월 대산 [[신용호]] 창업주가 7명과 함께 '태양생명보험'이라는 명칭으로 발기인 대회를 열었으나 11일 뒤 '대한교육보험'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회사 이름에 반드시 '생명보험'이 들어가야 한다는 당시 보험업법 규정 때문에 '태양생명보험'으로 설립 등기를 한 것이다.] 1958년 7월 세계 최초로 '교육보험제도'를 창안해서 첫 상품 '진학보험'[* 자녀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등 학교가 바뀔 때마다 학자금을 돌려주는 상품이었다.]을 내놨고 8월에 정식 개업했다. '화랑계약'이라고 해서 [[군인]] 가정을 공략했으며 저축 장려 방법의 하나로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보험이 육성되면서 같이 컸다. 영업 모델은 방문판매가 주였는데 방문판매 영업 직원에게 줘야할 커미션도 많았고 자기자본이 작으며 보험 레버리지가 높아 위태로웠지만 [[한국]]이 고도 성장기라 버틸 수 있었다.[*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는 부친 [[주종환]] 교수가 신용호 회장이 창업하던 단계 때 불려갔다가 그냥 나왔었다고 말했다. “조그만 사무실 하나에 여직원 1~2명 놓고 [[교육보험]]을 만든다는게 못 미더웠다”고 회고할 정도로 위태로워 보였다고 한다.] 이후 1964년 폐업된 '협동생명보험' 계약 일부를 인수한 후 1967년 [[대한민국 육군]]과 계약을 맺고 대상을 [[대한민국 해군]] 등으로 늘려가는 등 파죽지세로 성장했는데 업계 6위로 출발한 교보생명이 단숨에 업계 1위로 도약하는 해였다. 창업 10년째인 1967년 사업이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왔다고 생각한 신용호는 회장이지만 경영에서 손을 떼고 대표이사를 고용해 경영했는데 사장 평균 근속이 1.7년일 정도로 자주 바꿨다고 한다. 1970년 신용호 회장은 [[동작동]] 3만 6천 평의 자기 땅을 [[국립묘지]] 부지로 대한민국 정부에 넘기면서 대신 [[성북동(서울)|성북동]] 10만 7천평을 받았으며[* 이 토지 중 가장 유명한 곳이 교보주택단지로 불리는 성북동 330번지 일대인데 흔히 말하는 성북동 부촌으로 국내에서 [[한남동]]/[[이태원동]] 다음 가는 단독주택가이다. [[대사관]]저와 [[재벌]]들의 저택이 밀집해있으며 교보생명 일가들도 여기에 터전을 잡고 있다.] 1974년 업계 최초로 모든 업무를 전산화하는 등 선구적인 노력을 계속해갔다. 1979년 [[경복궁 광화문|광화문]]에 24층짜리 교보빌딩[* 해당 건물을 지을 당시 실권자 중 1명인 [[차지철]] 경호실장이 트집을 잡아서 건물의 층 수를 낮추라고 압력을 가한 적도 있었다. 당시 교보빌딩은 건설이 거의 완료되고 외장을 마무리하는 단계여서 이건 건물 자체를 철거하라는 의미와 같았다. 그러자 신용호 회장이 “그럴거면 차라리 내가 할복하겠다”라고 강하게 항의해서 차지철도 압력을 거뒀다고 한다.]을 짓게 되는데 신용호는 “[[서울특별시|서울]] 한복판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점]]이 하나쯤은 필요하다”며 지하 1층을 전부 [[교보문고]]로 만든다.[* 당시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은 신용호 회장에게 직접 “생각만 하던 일을 실제로 해줘서 고맙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고 하는데 [[자서전]]에까지 칭찬하는 글이 있을 정도이다.] 교육보험은 생명보험의 일종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신선한 시도로 평가돼 신용호는 1983년 국제보험회의로부터 세계보험대상을 수상했다. 이전까지 교육보험에 주력해 오다가 1980년대 이후 [[사교육]]이 성행해 교육보험이 다 보장할 수 없게 되자 일반 생명보험 업무를 주로 하기 시작했다.[* 현재 교보생명에서 교육보험 상품이 있는 것은 대한교육보험 시절의 흔적이다.] 1984년 업계 최초로 순보험료식 책임준비금 100% 적립을 단행한 후 1987년 [[충청남도]] [[천안시]]에 있는 '계성원'이란 연수원을 열었고 1988년 교보투자자문을 설립한 후 1994년 서울신탁은행으로부터 [[대한증권]]을 인수하는 등 금융업 중심으로 사세를 확장했다. 1995년 현 명칭으로 변경하고 1998년 퇴출 생보사 BYC생명의 보험계약을 인수했다. 1996년 의사였던 [[신창재]] 회장이 이사회 부회장으로 처음 경영을 맡고 얼마 안 가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졌으며 2000년 회사가 빈사 상태에 빠졌었으나 여러 노력을 기울여 회생하였다. 2003년 [[암]] 투병으로 타계한 신용호 창업주의 1,800억원 상속세 납부는 당시에도 전례가 없는 사상 최대 액수로 화제였다.[* 창업주 신용호의 지분 대부분은 장남 신창재에게 상속되었고 신창재 회장 일가는 일절 경영에 관여하지 않으며 부인과 두 아들 모두 1주의 지분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신창재 회장은 2010년 정혜원 봄빛문화재단 이사장과 사별한 후 2013년 박지영 [[이화여자대학교]] 대외협력처 직원과 재혼했는데 현재 박지영 씨는 평범한 주부로 대외 노출을 극히 꺼리고 있다.] 2012년 [[우리금융지주]], 2013년 [[ING생명]], 2014년 [[우리은행]] 인수를 추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MBC 라디오에서 방송하는 [[잠깐만(라디오)|잠깐만]] 캠페인에 협찬한 바 있다. 2019년 7월 [[삼성생명]]이 보유하던 생보부동산신탁 지분 50%를 인수하면서 완전자회사로 편입하였고 2020년 1월 교보자산신탁으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2021년 하반기 [[AXA손해보험]]과 교보AXA자산운용 인수를 추진하였으나 무산되었다. 2022년 하반기 [[MG손해보험]] 인수를 추진하였으나 무산되었다. 2023년 4월 파빌리온자산운용 지분 100%를 인수하여 교보AIM자산운용을 출범시켰다. 2023년 상반기 [[카카오페이손해보험]] 지분 51%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