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복 (문단 편집) === 근대와 교복 자율화 이전 === 교복이라는 개념 자체는 [[영국]]의 [[헨리 8세]] 때부터 있었으며, 이후 대부분의 [[사립학교]](Public school)[* 당시 영국에서는 사립학교를 Public School이라고 불렀다.(물론 지금도 그러는 사람들도 있다.)]에서 교복을 채택하게 되었다. 물론 이 당시에는 옷을 수공업으로 만들었던지라 초등학교급은 교복이 없는 경우가 대다수였기는 했다. 한국에서는 [[성균관]]의 [[https://blog.naver.com/good7101910/221492089500|청금복]]이 교복의 [[http://www.edupo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358|원조]]라 할 수 있다. 청금복은 [[태종(조선)|태종]] 11년(1411년) 6월에 처음 제정되었는데, 이 때의 청금복은 '청금난삼'을 의미했다. [[세종대왕|세종]] 때는 '흑령+유건' 조합이었다고 하며, [[성종(조선)|성종]] 8년 [[경국대전]]에 '성균관 유생은 청금[[단령]]을 입는다'라고 명시되었다. [[명종(조선)|명종]] 때 '청색 옷에 검은 금을 단 유복'으로 변경되었다가 [[선조(조선)|선조]] 때에는 '벽색 옷'이라 하는데, 태종 때의 청금난삼으로 돌아갔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혼란에 빠진 성균관을 본 [[영조]]가 "가벼운 일에는 홍단령을, 공식 행사나 재례 때에는 청단령을 입고, 더욱 중요한 일에는 흑단령을 입도록 하라"고 재정비했다. 청금복은 중국 [[시경]]의 한 구절인 '靑靑子衿 悠悠我心(청청자금 유유아심)'[* 푸르고 푸른 임의 옷깃, 기나긴 것은 이내 마음이로다.]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교복은 성균관을 비롯한 소수의 상급학교에서나 지정했고, 서당은 교복이 따로 없었으며 당연히 사복차림이 일상적이었다. 옷을 기계가 아닌 일일히 사람손으로 만들었던 만큼 옷값이 현저히 비쌌을뿐더러 서당의 규모는 오늘날로 치면 영세학원 정도의 규모를 지닌 경우가 많았고, 당연히 교복을 따로 지정할만한 형편이 되지 않았다. 이후 개화기때 서양식 학교가 들어오면서 서양식 교복 개념[* 이때는 일본의 [[쇼세후쿠]]처럼 [[학생모]]에다가 [[두루마기]]를 입었다.]도 점차 등장하기는 했지만, 이 시기까지도 교복은 보편적인 복장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성균관]]의 기능이 강제로 중단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그 명맥만이 유지되고 있을 당시 일제의 조선지배 정책의 일환으로 일제의 인가하에 등장한 새로운 대학들에서 서구식 복장의 교복의 형태들이 등장하였다. 교복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1886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의 치마저고리 교복을 들 수 있다. [[이화학당]]을 설립한 [[미국인]]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부인은, 빨간 옷감으로 저고리와 치마를 지어 소녀들에게 단체복으로 입혔다. 그러다가 곧 흰 저고리와 검정 치마로 이루어진 교복(일명 [[유관순 교복]])으로 바뀌었고, 한동안 이 양식이 쭉 이어진다. 이 한복 차림은 당대 새로이 등장한 계층인 '여학생' 및 '신여성'의 상징이었다. 오늘날에는 이 교복을 보면 특히 [[이화학당]]에 재학했던 [[유관순]] 열사를 흔히 떠올려서, 일명 [[유관순 교복]] 등으로 불리는 교복이다. 지금도 [[조선학교]] 여학생은 교복으로 입게 하기도 하지만, 남학생 교복은 일본 학생과 똑같은데 여학생 교복만 구시대적 교복을 고수하는 것에 대해 성차별 논란이 있고, 조선학교 학생에 대한 괴롭힘으로 이어진 경우도 매우 많아 문제가 되어, 현대식 교복으로 바꾼 학교도 많다.[* [[원불교]]의 여성 성직자들도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 일명 [[유관순 교복]] 차림을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 남자는 [[가쿠란]], 여자는 [[세일러복]]을 착용하였다. 이와 같이 교복은 원래 [[영국]] 등 서양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더구나 양복 [[정장]] 형태의 교복은 [[한국]]에서는 비공식적으로는 1970년대에도 일부 [[사립학교]]에 소수 [[http://arch.goeia.go.kr/archmain/?menugrp=cafe&master=bbs&act=view&cafe_sid=3530&master_sid=14120&sid=10064&Page=3&SearchColumn=&SearchValue=|존재]]했지만, 공식적으로는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30400329207002&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3-04&officeId=00032&pageNo=7&printNo=10592&publishType=00020|1980년 3월]]에 [[김옥길]][* [[이화여자대학교]] 제8대 총장을 지냈으며, [[김동길]] 前 [[연세대학교]] 교수의 친누나이다.] [[문교부]] 장관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도입이 시작되었다. [[http://www.korea.kr/archive/todayInHistoryView.do?themekey=todayinhistory&bbsKey=3474|1980년대 초반 과도기의 여학생 교복은 이렇다]]. 다만, 이 시절에는 한국의 양복 정장형([[테일러드 재킷|블레이저]])형 교복은 이제서야 막 도입하게 된 상황이라 [[일본]]보다도 도입 사례가 적은 데다가(양복 정장형 교복의 도입 자체가 사실 일본보다 훨씬 늦었다.),[* 이 때문에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조차도 [[군국주의]]의 잔재인 기존 교복([[가쿠란]], [[세일러복]]) 대신에 양복 정장형으로 바꾸고 있는데[[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001140032920802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0-01-14&officeId=00032&pageNo=8&printNo=7468&publishType=00020|#]](1970년 기사), 한국은 [[군국주의]] 잔재의 기존 교복을 충실하게 고수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의견도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일 따름.] 1970년대에 이미 양복 정장형 교복 차림의 일본 학생들이 한국으로 [[수학여행]]을 오는 경우도 많이 있다 보니, 1980년대 초반에 양복 정장형 교복을 입고 다니다가 일본 학생으로 오인당하는 웃지 못할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4240020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4-24&officeId=00020&pageNo=4&printNo=18015&publishType=00020|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로도 1970년대까지도 교복디자인의 개정이 없던 탓에 교복은 일본 가쿠세이후쿠(학생복) 형태를 본딴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가쿠세이후쿠의 유래는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블레이저형 교복도 원형은 [[군복]]이었으며, 학생용 겨울 코트로 애용되었던 모직 더플코트도 원래는 해군복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도입된 양복 정장형 교복은 1980년대 중반 ~ 1990년대 중반에 재도입된 교복들보다 색상[* 붉은색, 초록색, 베이지색, 보라색 같은 원색적인 색상이 쓰이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이나 디자인이 화려한 경우가 많았다. 이는 당시 양복 정장형 교복의 도입 취지가 기존의 획일적인 교복에서 벗어나 학교와 학생들의 개성을 최대한 살리려는 취지였기 때문. 이 무렵에 국내에 화사한 타탄 체크 무늬를 사용한 교복이 처음 등장하였으며, 심지어 오늘날과 같은 [[리본]]이 달린 여학생 교복도 나왔을 정도였다. 이당시 등장한 양복 정장형 교복들은 동시기 서구권에서 유행하던 프레피 스타일 교복이나 일본에서 일부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하던 화사한 색상과 화려한 디자인의 DC(Designer & Character) 브랜드 교복을 많이 의식한 모습이었으며, 기존 교복보다 가격이 2배 가까이나 크게 오르면서 이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그러다가 [[전두환 정부]]의 1983년 복장 자율화로 1986년 상반기까지 3년 간 사라졌다가[* 이 때문에 1983년의 복장자율화와 1986년의 교복부활이 한동안 한국 교복의 디자인을 크게 후퇴시켰다고 보는 견해도 있기는 하다. 오히려 그당시의 화사하고 화려한 디자인의 새 교복들이 폐지되지 않고 그 디자인 기조를 쭈욱 이어갔다면, 한국에 파이핑 라인이 들어간 교복 블레이저나, 줄무늬가 들어간 교복 넥타이나 리본, 화사한 유채색 타탄 체크무늬의 패턴의 교복 치마를 21세기가 아닌 오히려 훨씬 이른 시기인 1980년대 중후반~90년대 초반에 일찍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서구 국가들이나 일본의 경우는 이미 1980년대 중후반 부터 파이핑 라인이 들어간 교복 블레이저나 줄무늬가 들어간 교복 넥타이나 리본, 화사한 유채색 타탄 체크 패턴의 교복 치마를 쓰는 학교가 다수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 역시도 1990년대 초반 [[버블경제]] 붕괴 당시 일부 학교들이 교복값을 낮춰 학부모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화려하고 화사한 디자인의 교복에서 도로 무채색 계열의 평범한 디자인의 교복으로 되돌리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1980년대 중후반 ~ 1990년대 중반에 무채색 위주로 디자인을 간략화 하고 생산 단가를 절감하는 약간의 개량을 거쳐 부활한다. [[1980년]] 3월에 [[최규하 정부]] 때, [[김옥길]] 문교부 장관의 지시하에서 학교장 재량 하에 교복 디자인과 색상을 다양화하도록 했다. 이에 블레이저 재킷 같은 양복 정장 형태의 교복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가쿠란]]과 [[세일러복]]을 대체하기 시작했으며, 교복의 디자인과 색상이 다양해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등장한 남학생 교복은 지금과 비교해도 크게 차이 없어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