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주고슬 (문단 편집) == 유래 == >時趙奢已死,而藺相如病甐,趙使廉頗將攻秦,秦數敗趙軍,趙軍固壁不戰。秦數挑戰,廉頗不肯。 >趙王信秦之閒。秦之閒言曰:「秦之所惡,獨畏馬服君趙奢之子趙括為將耳。」趙王因以括為將,代廉頗。藺相如曰:「王以名使括,__若膠柱而鼓瑟耳__。括徒能讀其父書傳,不知合變也。」趙王不聽,遂將之。 >趙括自少時學兵法,言兵事,以天下莫能當。嘗與其父奢言兵事,奢不能難,然不謂善。括母問奢其故,奢曰:「兵,死地也,而括易言之。使趙不將括即已,若必將之,破趙軍者必括也。」及括將行,其母上書言於王曰:「括不可使將。」王曰:「何以?」對曰:「始妾事其父,時為將,身所奉飯飲而進食者以十數,所友者以百數,大王及宗室所賞賜者盡以予軍吏士大夫,受命之日,不問家事。今括一旦為將,東向而朝,軍吏無敢仰視之者,王所賜金帛,歸藏於家,而日視便利田宅可買者買之。王以為何如其父?父子異心,願王勿遣。」王曰:「母置之,吾已決矣。」括母因曰:「王終遣之,即有如不稱,妾得無隨坐乎?」王許諾。 > 趙括既代廉頗,悉更約束,易置軍吏。秦將白起聞之,縱奇兵,詳敗走,而絕其糧道,分斷其軍為二,士卒離心。四十餘日,軍餓,趙括出銳卒自博戰,秦軍射殺趙括。括軍敗,數十萬之眾遂降秦,秦悉阬之。趙前後所亡凡四十五萬。 >---- >'''《[[사기(역사책)|사기]]》, 염파·인상여 열전(廉頗藺相如列傳) [[https://ctext.org/shiji/lian-po-lin-xiang-ru-lie-zhuan|#]] [[https://ctext.org/library.pl?if=en&file=79515&page=174|영인]]''' [[조나라]](趙)에서 이름을 날리던 명장 [[조사(전국시대)|조사]](趙奢)가 죽자 그간 조나라와 천하를 다투던 [[진(영성)|진나라]](秦)가 침략했다. 조나라는 장군 [[염파]](廉頗) 로 응전한다. 하지만 염파는 [[농성|성만 고수할 뿐]] 나오지 않으므로 진나라는 [[속수무책]]이다. 결국 계책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염파는 진나라가 두려워 방어만 하니 다행이다, 만약 조사의 아들 [[조괄]](趙括)이 나온다면 큰일인데 다행이다.' 이 소문을 들은 왕이 염파를 해임하고 조괄을 임명하려 할 때 신하 [[인상여]](藺相如)가 만류한다. '그 이름만 믿고 조괄을 대장에 임명함은 __슬의 기러기발을 아교로 붙여놓고 타는 것이나 다름없다__. 조괄은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의 책략을 세우지 못한다'며 간언하지만 왕을 설득하지 못한다. 그렇게 조나라 임금은 인상여의 말을 듣지 않고 조괄을 대장에 임명한다. 한편 그 소식을 들은 조괄의 모친이 조정으로 달려와 이렇게 말한다. “괄이는 제 아비와 다릅니다. 조사 장군은 살아생전 늘, ‘저 녀석은 병서만 붙잡고 있으면서 자기가 군사를 안다고 착각한다. 저 녀석에게 군사를 맡긴다면 반드시 패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디 저 아이를 장수에 임명하지 마시옵소서.” 그러나 임금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모친은 다시 말한다. “그렇다면 전쟁에 패하더라도 우리 식구에게 죄를 묻지는 말아 주시옵소서.” 임금은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장평대전|장평에서 전투가 시작되자]](BC 260) 역시 조괄은 진나라의 계략에 빠져 대패하였고([[장평대전]]), 이때부터 전국시대 강대국 가운데 하나인 조나라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해 급기야 [[진시황|시황제]]에게 멸망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