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황/역사 (문단 편집) == 탄생과 발전 == [[파일:external/catholicharboroffaithandmorals.com/St.%20Peter%20Lives%20of%20the%20Popes%2001.jpg]] [[가톨릭]] 교회에서는 [[마태오의 복음서|마태오 복음]] 16장에 나오는 내용을 바탕으로 [[예수]]의 수제자이자 으뜸제자인 [[베드로]]가 최초의 교황이라고 보고 있다. 이때 예수가 베드로에게 베드로(반석, 터줏돌)라는 말 그대로 베드로에게 신앙의 주춧돌이 되라고 한 말을 따라 베드로가 로마에서 교회의 기초를 닦았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회의 수장이자 반석이라는 것이 [[가톨릭]]에서 교황권의 근거를 보는 입장이다. 또한 동시에 로마는 사도 [[바오로]]가 순교한 장소이며, 로마에서 순교한 바오로의 권위가 교황에게도 영향을 주어 바오로의 가르침에 따라 세계에 복음과 신앙을 전하고 교회를 수호하는 것이 교황의 임무이기도 하다. 다만 교황직의 교회법적 유효성과 계승성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교황권이 어떻게 인식되어왔는가를 논한다면 시대에 따른 변화를 논할 수 있다.[* [[교황 수위권]] 문서도 참고할 것.] 일단 루터교 신학자인 [[https://en.wikipedia.org/wiki/Adolf_von_Harnack|아돌프 폰 하르나크(Adolf von Harnack)]]는 초기 로마교회가 실질적 수위권을 지녔다고 해석하고 있다. >From the close of the first century the Roman church was in a position of practical primacy over Christendom. It had gained this position as the church of the metropolis, as the church of Peter and Paul, as the community which had done most for the catholicizing and unification of the churches, and above all as the church which was not only vigilant and alert but ready[*원서주석1 Evidence is forthcoming from the second and the third centuries, for Corinth, Arabia, Cappadocia, and Mesopotamia (cp. above, pp. 157, 185, 376; and below, Book IV.). In a still larger number of cases Rome intervened with her advice and opinion.] to aid any poor or suffering church throughout the empire with gifts.[*원서주석2 A considerable amount of the relevant material is collected in my History of Dogma, I. pp. 455 f. (Eng. trans., vol. ii. pp.149-168), under the title of “Catholic and Roman.”] >---- >1세기 말부터 로마교회는 전체 그리스도교 지역에 대한 실질적 수위권이 있었다. 로마교회는 메트로폴리스의 교회로서, 베드로와 바오로의 교회로서, 교회들을 가톨릭화하고 통일하는데 최고로 활동하는 공동체로서, 무엇보다도 경계하고 경고할 뿐만이 아니라 제국의 어떤 가난하고 교통받는 교회든 기부로 돕는 교회라는 점에서 이 위치를 얻었다. >---- >-Adolf von Harnack, ''[[https://www.ccel.org/ccel/harnack/mission.html|The Mission and Expansion of Christianity in the First Three Centuries]]'',[*원제1 ''Die Mission und Ausbreitung des Christentums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 James Moffatt 옮김 (Grand Rapids, MI: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395쪽 해당 책을 언급하며 가톨릭 측 교회사 학자인 [[https://de.wikipedia.org/wiki/Ernst_Dassmann|에른스트 다스만(Ernst Dassmann)]]은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도교화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코르넬리우스 주교는 로마에서 노바티아누스를 단죄하기 위해 '60명의 주교와 이보다 더 많은 사제와 부제가 참석한 대규모의 교회회의'가 열렸다고 전한다. 그는, 로마에서 열린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결의 사항에 동의한 주교들의 이름과 교회도 보고하기 때문에 이탈리아에는 백 명 또는 그 이상의 주교 공동체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6,43,1.21-22 참조).[*원서주석3 A. VON HARNACK, ''Die Mission und Ausbreitung des Christentums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 (Leipzig{ }^{4}1924) 807.] >로마는 매우 일찍이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우위를 차지했다. 네로 황제 치하에서 처음으로 매우 혹독한 박해를 겪은 로마 공동체는, 『클레멘스의 첫째 편지』가 입증하듯이 빨리 복구되었으며,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박해들로도 약화되지 않았다. 로마 공동체는 1세기 말부터 전 그리스도인에게 '실질적인 수위권'을 지녔다.[*원서주석4 VON HARNACK, ''Mission'' 487.]로마 공동체는 베드로와 바오로가 세운 공동체로 여겨졌으며 곧바로 교회 신앙의 규범이 되었다. 2세기에 전통 신앙과 이단을 정확히 구분하기 시작했다면, 이는 특히 로마인들이 지닌 신앙의 척도에 따라 이루어졌다. 「사도신경」과 주교들의 '사도 계승'{{{-2 successio apostolica}}}에 대한 고증은 로마 관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공동체는 신앙을 실질적으로 전파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 것 같지 않다. 로마는 곧바로 교회의 중심이 되었지만 선교의 중심은 아니었다. 로마 공동체의 매력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2세기에 (어떤 이유에서든) 로마로 여행한 전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유명 인사들의 목록, 곧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 이레네우스, 헤게시푸스, 유스티누스, 타티아누스, 아베르키우스, 마르키온, 발렌티누스, 사벨리우스, 테오도투스를 한 번이라도 상기해야 한다.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로마에 도움을 청했고, 로마는 조언뿐 아니라 능력에 따라 물질적 원조도 했다. 코린토의 주교 디오니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 >>여러분에게는 모든 형제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돕고 모든 도시에 있는 많은 공동체에 기부금을 보내는 관습이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로마인인 여러분은 전승된 로마 관습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에 예부터 보낸 희사금으로 곤궁한 이들의 가난을 덜어 주었으며, 광산에 사는 형제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여러분의 거룩한 주교 소테르는 이 관습을 철저히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자애로운 아버지가 자식에게 따뜻한 말로 위로하듯이 성도들뿐 아니라 (로마에) 오는 형제들에게도 (많은) 희사금을 나누어 주어 이 관습을 더 확대했습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4,23,10).[*원서주석5 번역: KRAFT 223.] > >실제로 코린토와 아라비아, 카파도키아, 메소포타미아 공동체에 행해진 기부금들은 잘 알려져 있다(381쪽 참조). 이그나티우스가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서론에서 로마는 '사랑의 연맹의 수좌'라고 쓴 표현은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 배경에서 실질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그나티우스는 이 낱말로 2세기 초에 로마가 재판 관할 수위권을 지니고 있다고 내세우는 것도 아니며, 원조를 받은 공동체들이 몇 세기 뒤에도 기억하고 있는 '사랑의 실천'{{{-2 caritas}}}에서 로마가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제국의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줄곧 로마로 왔으며 로마 공동체는 이들을 친절하게 맞이했다. 아직도 많은 점에서 법적·규율적으로 확정되지않은 공동체들의 관계는 대부분 이러한 방문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로마인들은 그들이 지금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새 공동체들의 곤경과 근심거리에 관해 들었으며, 방문자들은 유명한 로마의 사도 공동체와의 친교{{{-2 communio}}}를 진심으로 느꼈다. 그 뒤 그들이, 아마도 그들 공동체를 위한 희사금을 가지고 다시 떠나면, 로마 공동체가 어떻게 살며, 어떻게 미사를 지내고 어떤 신앙을 고백했는지를 그들이 와보지 않고 이야기한 것보다 쉽게 이해되었을 것이다. 변두리의 소공동체들이 로마인들의 '사도적 권위'{{{-2 auctoritas apostolica}}}에 관해 들어 알고 있는 것을 본받고자 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따라서 의도적이든 않은 로마의 사랑 실천 행위는 교회일치를 위해 구심력을 지니는 운동에서 과소평가될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로마가 훈령을 내릴 수 있다는 권한은 아직도 인정받지 못했다. 이는 로마의 주교 빅토르가 양보해야 했던 부활절 논쟁에서 입증된다(277; 340쪽 참조). 로마의 권리를 요구하는 신학적·법적 강구는 이른바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와 로마의 스테파누스(254~257)의 이단자 논쟁에서 시작했다. 이 논쟁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바위)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라고 한 이 말씀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후대의 수위권론은 오래 전부터 로마의 실제적인 우위를 인정한 것보다는 교의적으로 이 약속을 실마리로 삼았다. >---- >-에른스트 다스만, 《교회사 I》,[*원제2 ''Kirchengeschichte I: Ausbreitung, Leben und Lehre der Kirche in den ersten drei Jahrhunderten''] 하성수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7), 410-412쪽 또한, 한스 큉에 의하면 적어도 로마와 베드로의 관계성은 부인하기 어렵다. >'''역사학적 관점'''에서는, 늦게 잡아도 레오 1세 때에 교회 운영의 수위권에 대한 로마의 주장이 ― 언제나 바로 동방에서 그것을 인정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은 어떻든간에 ― 확립되고 명시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 머물렀고 거기서 순교했다는 것도 최근 가톨릭·비가톨릭을 막론하고 갈수록 많은 사학자들이 시인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바티칸 성당 아래의 베드로의 무덤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가톨릭의 유능한 전문가들도 매우 회의적이다. 그러나 문헌상의 증언들은 매우 인상적이다. 「클레멘스의 편지」(1,5-6)를 보면 베드로와 바울로(!)가 네로 시대에 로마에서 순교했을 개연성이 극히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베드로 전서 5,13의 "바빌론"이란 바로 로마가 아닐까?). 이 1세기 말의 로마인의 증언은 또 2세기 초의 소아시아인인 이냐시우스가 「로마에 보낸 편지」(4,3)에서도 확인된다. 95년경부터 분명하고도 이의 없이, 그리고 처음에는 아무런 교회 정책적인 의향도 없이 고수되어 온 이 전통의 신빙성을 부인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라 할 것이다. >---- >-한스 큉, 《교회란 무엇인가》, 이홍근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1994), 180쪽 즉 매우 이른 시기에, 로마의 지역 교회는 베드로와의 관련성이 인정 받았고, 다른 지역 교회에 앞서는 어떤 특별한 무언가가 인정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지역 교회가 가지고 있다는 그 '특별한 무언가'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어왔는지는 시대에 따른 변화가 있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기준으로 할 때, 전체 교회를 이끌어가는 3개의 주교좌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였는데, 이 셋의 주교좌는 각각 전승을 통해 베드로와 연결되었다. 전승상 로마와 안티오키아는 베드로와 직접 연결되고, 알렉산드리아는 마르코를 통해 간접적으로 베드로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천도로 인해 새 수도가 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좌가 동방의 신흥 강호로 올라오려 하자, 기존 동방에서 가장 대우 받던 주교좌인 알렉산드리아가 경계를 했고, [[에페소 공의회]]를 기준으로 할때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신학적으로 대립하고 로마가 알렉산드리아를 밀어주는 교회정치적 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에페소 강도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신학적 동맹이 와해되고, 칼케돈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리아 신학이 타격을 받으며,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5두 체제가 교회에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는 칼케돈 공의회 이후 [[오리엔트 정교회]] 쪽 노선으로 갈라져나가고, 안티오키아는 알렉산드리아만큼은 아니지만 [[오리엔트 정교회]]가 강성해지고, 예루살렘은 실질적으로 교회정치에서 큰 힘이 있는 곳은 아니라서, 결과적으로 서방의 로마 vs 동방의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대립구도가 본격적으로 들어선 것이다. 한편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이탈리아에 건국된 [[동고트 왕국]]은 비록 [[아리우스파]] 신앙을 지니고 있었지만, 동로마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그 영향력 아래에 머물렀기 때문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지는 않았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동고트 왕국을 정복하여 이탈리아 반도가 동로마에 수복되며 로마 주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로마 황제에 의해 독립성이 침해 받기도 했고, 동로마 제국이 북방에서 내려온 [[랑고바르드족]]들로부터 군사적으로 로마를 지켜주던 시기라 황제의 권위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으로 간신히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만을 붙잡고 있던 동로마 제국은 이탈리아에 [[라벤나 총독부]]를 설립한다. 이 무렵의 교황들은 즉위를 위해 동로마 황제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 등 동로마 제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동시에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벌어졌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비질리오]]의 신학적 논쟁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교황들은 자체적인 힘을 기르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그레고리오 1세]] 이후로 서유럽과 북유럽 전체에 걸쳐 교회와 주교들로 이루어진 강력한 행정망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 좋은 예이다. [[이슬람/정복|이슬람의 정복]]으로 동로마 제국은 [[레반트]], [[가나안]], 이집트를 [[이슬람 제국]]에게 상실하여 그 영역이 [[발칸]]과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이슬람의 영향으로 [[성상 파괴주의]]가 발흥하였고, 성상 파괴주의자들이 제위에 오르면서 성상 옹호론을 지지했던 로마 총대주교와의 사이는 악화되었다. 결국 동로마 황제는 [[시칠리아]], [[칼라브리아]], [[발칸 반도]] 지역의 교구를 로마 총대주교의 관할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관할로 넣어버렸다. 8세기에 [[랑고바르드 왕국]]이 라벤나 총독부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중부의 통제권을 잃어버렸고, 로마 교회와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도 약해졌다. 이 때 로마 교회는 8세기 중반 한동안 자신들을 보호해줄 세속 국가로 동로마 제국, 랑고바르드 왕국, 프랑크 왕국 세 나라 사이에서 간을 보며 밀당을 했다. 일각에서는 랑고바르드 왕국이 로마 교회와 적대적이었다고 하지만 이는 다소 과장된 내용이다. 랑고바르드 왕국은 이탈리아에서 200년 가까지 지내면서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였고, 8세기 당시에는 로마 교회를 받들고 있었다. 그들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정치적인 패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이유에서 로마 교회를 압박하기는 했으나 종교 지도자로서 로마 교회를 존중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라벤나 총독부를 점령한 후에도 결코 교황이 다스리는 세속령인 로마 공국은 건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랑고바르드 왕국은 로마 교회의 종교적 패권을 인정하는 대신 이탈리아에서 정치적인 패권은 자신들이 가져가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속적인 권력을 추구해오던 로마 교회는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로마 교황 스테파노는 랑고바르드 왕국과 교섭하는 동시에 동로마에도 지원을 요청했지만 성상숭배 문제로 서로 감정이 상하여 껄끄러운 상황이었고, 게다가 동로마 역시 정치적 상황이 녹녹치 않았다. 결국 동로마는 랑고바르드에게 구두 경고만 할 뿐 거의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로마 교황은 랑고바르드와 협상하는 와중에 몰래 프랑크 왕국에 밀사를 보냈다. 사실 로마 교황청은 20여 년 전 동로마에서 처음 성상숭배금지령이 떨어졌을 때 서유럽에서 유일하게 가톨릭을 믿는 나라인 프랑크 왕국이 도와주길 내심 기대했다. 그리하여 교황은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마르텔]]이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들을 제거하고 실권을 잡았을 때 그를 지지해 주기도 했으며 그에게 귀한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카롤루스 마르텔은 처음에는 자신을 지지해 주는 로마 교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나 나중에는 로마 교회의 호의를 비정하게 배신하고 말았다. 계속되는 반란에 사라센까지 처들어와 돈에 쪼들리자 결국 교회와 수도회 재산을 몰수하는 극단 조치를 취했다. 게다가 랑고바르드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달라는 교황청의 요청에 대해, 카롤루스 마르텔은 랑고바르드와 우호적인 외교 관계에 있다는 이유로 이를 매정하게 거절했다. 이로 인해 로마 교회와 프랑크 왕국은 극도로 사이가 나빠졌다. 그러나 8세기 중반 랑고바르드가 라벤나 총독부를 재정렴하자 로마 교황은 새로 궁재가 된 마르텔의 아들 [[피핀 3세]]에게 접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왕위를 찬탈하고자 했던 피핀과 세속적인 권력의 확대를 추구하고자 했던 교황은 서로 몇차례 밀사를 파견하다가 753년 직접 만나 교섭을 마무리지었다. 교황 스테파노는 피핀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승인하는 교서를 보내고, 파리에서 직접 [[도유식]]을 열어 피핀의 왕위 찬탈을 정당화해주기로 했으며, 그 대가로 피핀에게는 랑고바르드를 쳐서 라벤나 총독령을 빼앗고 그 땅을 교황청에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피핀이 이에 동의하여 754년 교황이 직접 파리에서 도유식을 해주었으며, 755년 피핀이 이탈리아 원정을 가서 라벤나 총독령을 빼았고 이를 교황에게 기증하여 [[교황령]]이 시작되었다. 이때 스테파노 교황은 피핀에게 라벤나 총독령을 요구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Constitutum Donatio Constantini)'라는 위조 문서를 만들었다.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면서 서로마의 정치적 지배권을 로마 총대주교(교황)에게 양도했다는 황당한 내용이었다. 누가 봐도 허위임이 명백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두고두고 교황이 세속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었는데, 특히 서임권 투쟁을 벌였던 [[그레고리오 7세]]가 이 위조문서를 근거로 삼은 것은 유명하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아비뇽 유수]]와 서방 교회 대분열을 거치며 교황권이 땅에 떨어진 후에야 위조문서로 판정되었다. 1440년 문헌학자 로렌초 발라가 논문을 내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 위조라는 것을 입증했던 것이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발라를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화형을 선고했으나, 알폰소 왕이 형 집행을 정지시켰다. 피핀과의 거래로 라벤나를 획득하며 교황령의 군주가 된 교황은 서서히 로마 제국 기독교의 대주교가 아닌, 게르만족이 지배하는 서유럽 지역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는 서유럽 보편 교회의 수장으로 변모를 꾀했다.[* 여담으로 비잔티움 대주교는 계속 (동)로마 황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동방 정교회는 가톨릭에 비교해 상대적으로 교회의 지도자가 수장으로서의 면모가 약하다. 때문에 정교회권에서는 종교에서도 세속 군주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으며, 세속 군주 혹은 지도자가 실질적 수장 역할을 맡았다. 이런 체제를 잘 보여주는 게 [[러시아 정교회]]로, 러시아 정교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아닌 [[러시아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이라는 분석도 있을 정도. 이 때문에 생긴 정교회에 대한 큰 오해 중 하나가 바로 '''황제 교황주의'''이다.] 이는 동로마 제국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자한 교황과, 서부 유럽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한 정통성이 필요했던[* 프랑크 왕국의 국왕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쓰게 되면서 프랑크 왕국의 스위스, 프랑스, 북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구 서로마 제국 영토 통치의 정당성이 확보되었고, 동시에 공식적인 직책으로도 프랑크 왕국이 서유럽의 패자로 등극할 수 있게 되었다.] 이해가 일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카롤루스 대제]]에게 씌워준 것이 중요한 기점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이를 기점으로 교황은 동로마 제국의 직접적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됐고,[* 즉, 더 이상 즉위를 위해 동로마 황제의 재가를 받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동시에 황제라는 가장 강력한 세속군주를 임명할 권한이 교황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고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닌데,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가 교황 [[니콜라오 1세]]를 파문하는 등의 일이 벌어지는 등 서로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칠 수는 있었다. 다만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는 "로마 교회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를 자매가 아니라 마치 여주인의 하녀처럼 취급하는 것을 황제가 용납하고 있다"는[*출처1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122쪽] 불만이 제기될 만큼 로마 측의 힘이 강해져 있었고, 이는 공의회 문서에서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거룩한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 곧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40)와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라는 말씀이, 그들의 뒤를 이어 그들을 따라, 가톨릭 교회의 교황들과 최고 사목자들이 된 모든 이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믿으며너,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권력들도 총대주교좌를 다스리는 이들에게서 어떤 것도 절대로 불명예스럽게 하거나 그들의 주교좌에서 어떤 것도 제거하려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옛 로마의 교황 성하와 그다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그다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그리고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들이 모든 영예와 존경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판단할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옛 로마의 교황 성하를 거슬러, 포티우스가 최근에 한 것과 오래 전에 디오스코루스가 한 것처럼, 마치 어떤 범죄를 알리는 듯한 핑계로, 글들을 쓰거나 이야기를 꾸며 내서는 안 될 것이다. > >그러나 만일 누가 포티우스와 디오스코루스처럼,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 좌에 반대하여 글로써 또는 글을 쓰지 않고 어떤 모욕을 야기시키는 그런 자만심과 대담함을 행사한다면, 그는 저들과 동등하고 같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 > >만일 세속의 권력을 향유하거나 차지하면서 이미 언급한 사도좌의 교황이나 다른 총대주교들 중 어느 누구를 내쫓으려 시도한다면 그는 파문될 것이다. > >더 나아가, 만일 보편 공의회가 소집되어 로마인들의 거룩한 교회에 대해 어떤 의심이나 논쟁이 생겼다면,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마땅한 경의를 가지고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알아보고, 도움을 받든지 도움을 주든지 해결책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결코 옛 로마의 교황들을 거슬러 감히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 >----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카논 21[*원문 사서 아나스타시우스의 라틴어 번역본. 번역 출처: 덴칭거] 때문에 동로마 측은 사략선까지 동원하여 공의회 문서를 탈취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의회는 869년 10월 5일부터 870년 2월 28일까지 황제 특사 바네스의 사회로 회의를 열었다. 개막 당시에는 이냐티우스파 주교 열둘만이 참석한 극히 보잘것없는 회합이었으나, 마지막에는 참석자가 최대 103명까지 늘어났다. 이 공의회의 부수현상 가운데 중요한 것: 포티우스가 로마와의 싸움을 근본적인 차원으로 몰고가자, 로마 교황 사절들 쪽에서도 이 기회를 이용하여 참된 신앙의 규범이자 교회일치의 중심으로서의 교황수위권에 대한 원칙적 인정을 요구했다. 이 일은 '''「명예회복 문서」{{{-2 ''Libellus satisfactionis''}}}를 통해 행해졌던바, 포티우스 추종자들은 복권과 재임용을 원한다면 이 문서에 서명해야 했다. 근본적으로 519년 「호르미스다스 정식」의 표현들을 다시 채택한 이 문서에 따르면, 참된 신앙과 교회일치를 위한 보증은 로마와의 결속에 있다. 포티우스 추종자들에게는 이 문서에 서명하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그 후에 일어난 사건들은 주목할 만하다. 주교들은 황제에게 로마 교회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를 자매가 아니라 마치 여주인의 하녀처럼 취급하는 것을 황제가 용납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황제로서도 로마 사절들이 자신도 원하던 포티우스 사건의 해결을 넘서서서 그것을 교회론 문제의 전반적 해결 기회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 매우 불쾌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명예회복 문서」의 서명본들이 사절들의 숙소에서 없어졌다. 그들에게 배정된 하인들이, 물론 높은 분들의 지시로, 그것들을 훔쳐냈던 것이다. 사절들은 즉시 위협하기를, 자기들은 곧바로 떠나 공의회를 흩어 버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서류들이 "우연히" 다시 발견되었다. 로마 사절인 도서관원 아나스타시우스는 그러나 이 사건 때문에 조심하게 됐고, 그래서 모든 공의회 문서의 사본을 만들어 두었다. >아나스타시우스의 행동이 참으로 적절했음은 공의회가 끝난 뒤에 드러날 터였다. 귀국 길에 사절들의 배가 아드리아 해에서 해적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사절들은 상당히 오랜 기간 잡혀 있다가 개별적으로 풀려났으나, 문서들은 돌려받지 못했다. 그러나 해적들과 그들에게 그 일을 지시했음이 확실한 황제는 도서관원 아나스타시우스가 사본을 만들어 다른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돌아가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튼 그렇게 하여 이 공의회의 문서들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리스 교회는 훗날 공의회를 무효로 선언했기 때문에 문서들도 폐기해 버렸다. >---- >-클라우스 샤츠, 《보편공의회사》, 이종한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5), 121-122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