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황/역사 (문단 편집) == 중세 중반, 교황권의 전성기 == [[파일:external/www.traditionalcatholicpriest.com/Pope-Innocent-with-St.-John-of-Matha.jpg]] [[카롤루스 대제]]의 치세를 전후로 하여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에는 세속군주가 [[기독교]]의 교황보다 더 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카롤루스 대제]] 이후 프랑크 왕국은 [[게르만족]] 고유의 분할 상속 제도에 따라 [[루도비쿠스 1세]] 사후 서프랑크·중프랑크·동프랑크 왕국으로 삼등분되었으며, 중프랑크 왕국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로타리우스 1세]] 역시 그의 아들들에게 자기 왕국을 분할하여 물려주었고,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 왕국(중세)|중세 이탈리아 왕국]]이 떨어져 나왔다. 교황은 이탈리아 국왕의 권력 하에 있게 되었고, 군주의 뜻에 거스르면 살해되거나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하였다. 프랑크 왕국이 분할 상속에 의해 분열의 분열을 거듭하면서 세력이 약화되는 동안 북쪽 [[스칸디나비아]]와 [[유틀란트 반도]] 지역에서부터 바이킹이 대규모로 남하하며 서유럽은 국왕이 아닌 각 지역의 영주들이 실질적인 지역의 통치자로 권한을 행사하는 [[봉건제]] 사회로 접어들게 된다. 프랑크 왕국의 후신인 이탈리아 왕국의 통제로부터 점차 벗어나면서 이 시기 교황은 [[교황령]]에서 비롯된 세속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바탕으로 각 지역의 영주들의 복속을 시도하였다. 이는 교황의 권력이 급격히 증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이런 교황권의 강화는 교황령의 증대를 불러왔다. 그리고 이렇게 늘어난 권위와 권력 그리고 교황령은 다시 교황의 권위와 권력 교황령을 증대시키는 순환을 야기했다. 962년 이탈리아 국왕인 베렝가리오 2세가 교황령을 침략하자, 교황 요한 12세는 [[독일 왕국]]의 국왕이던 [[오토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오토 1세는 알프스를 넘어와 베렝가리오를 물리쳤고 교황령을 교황에게 돌려주었다. 그 대신 오토 1세는 그동안 자신이 이교도인 마자르족과 슬라브족을 격퇴하여 기독교 사회를 보호한 공로를 제시하며 신성 로마 황제로 대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요한 12세는 이를 수용하여 오토 1세에게 황제 대관을 해주었고, 이로서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오토 대제가 독일로 돌아가자 요한 12세는 황권으로부터 교황권을 독립하려 시도하였고, 이에 오토 황제는 요한 12세를 폐하고 새로운 사람을 교황으로 임명했다. 이후 한동안 신성 로마 황제가 교황을 임명했다. 그러나 교황과 로마 시민들은 황제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다. [[오토 2세]]가 사망한 후 어린 황제가 즉위하고 황실의 대가 끊겨 왕조가 교체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신성 로마 황제들은 로마에 신경쓸 여력을 잃었고, 이에 교황좌는 다시 로마 귀족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교황청의 부패가 심각해졌다. 10세기 중반 로마의 명문 귀족 출신인 [[베네딕토 9세]]가 부모의 재력에 의해 20세의 젊은 나이에 교황에 오르면서 교황의 타락과 부패는 절정에 달했다. 베네딕토 9세는 [[살인]], [[강간]], [[남색]]을 일삼았고, 이에 로마 시민들은 봉기를 일으켜 교황을 추방했으나 [[베네딕토 9세]]는 군사를 모아 다시 교황좌를 강점했다. 이에 보다 못한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3세]]가 개입하여 베네딕토 9세를 강제로 추방시켰다. 이어 하인리히 3세는 독일 출신의 클레멘스 2세를 새로 교황에 앉혀 성직 매관매수를 금지시키는 등 강력하게 교회 개혁에 나섰다. 이후 하인리히 3세에 의해 [[클뤼니 수도원]] 출신의 5명의 독일인 교황들이 연이어 임명되며 타락한 교회가 대대적으로 정화되었다. 특히 하인리히 3세가 임명한 클리뉘 출신의 교황 레오 9세는 주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의 결혼을 엄격히 금하는 등 교회 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였으며, 1054년 동로마 총대주교를 파문하여 [[동서 대분열]]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인리히 3세가 임명한 클리뉘 수도원 출신 교황들에 의해 교회는 크게 개혁되었고, 로마 귀족들이 돈으로 매수하여 교황이 되는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새로운 교황 선출 제도인 콘클라베가 시작되었다. 초기에 추기경들은 하인리히 3세의 의중을 따라 교황을 선출했다. 하인리히 3세의 간섭으로 교황청은 크게 정화되었으나 이방인인 독일 출신의 교황들이 잇달아 선임되자 교황청의 본거지인 이탈리아 및 우호 세력인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추기경들은 은근히 황제에게 반발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황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황제의 권위는 물론이고 황제의 교황청 정화에 저항할 명분도 없었다. 하지만 하인리히 3세가 죽고 어린 [[하인리히 4세]]가 즉위하자 교황청과 추기경들은 어린 황제를 감금하는 등 억누르면서 황제의 권력으로터 벗어나 다시 독자적인 세속 권력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서로 다시 강해지려는 황권과 교황권의 대립은 마침내 [[카노사의 굴욕]]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른 불운한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섭정이었던 모후가 영지를 자신의 내연남들과 친척들에게 마구 떼어준 바람에 영지가 크게 축소되었고, 황제의 권위 또한 크게 실추되었다. 모후의 실정에 반발하는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쾰른 대주교가 어린 황제를 납치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렇게 신성 로마 제국이 만신창이가 되자 교황들은 황제에게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되찾게 되었다. 10대 청소년으로 자란 하인리히 4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숙한 책략으로 스스로 쾰론 대주교를 따돌리고 황권을 되찾았다. 그리고 하인리히 4세는 어머니가 애인들과 친척들에게 마구 뿌린 영지를 되찾기 위해 내전이 발생한다. 신성 로마 제국이 내전에 들어가자 교황들은 더욱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내전이 한창 진행될 때 [[그레고리오 7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하인리히 3세]]에 의해 발탁되어 교황청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그후 수십년간 교황청의 요직을 거치며 실세가 되었고 마침내 교황에 선출되었다. 그레고리오 7세는 독일의 혼란한 상황을 이용하여, 위조문서인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근거로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하인리히 3세 시절 교황들이 추진했던 교회 개혁도 다시 한번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가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하자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을 폐위시켰다. 그러나 내전으로 바빴기 때문에 직접 로마로 가서 새 교황을 새울 수는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레고리오 7세가 황제의 파문을 선언했다. 하인리히 4세는 오랜 내전에서 거의 승기를 잡았으나 파문에 처해지자 다시 반대파 제후들이 결집하게 되었다. 이때 하인리히 4세는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가 직접 자신을 폐위시키려고 오는 줄 알고 투스카니 백작의 카노사 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알프스를 넘이 이탈리아에 도착한 황제는 군대를 멀리 주둔시키고 단신으로 카노사성 앞에 오더니 맨발로 서서 교황에게 파문을 철회해달라는 퍼포먼스를 벌였던 것이다. 그레고리오 7세는 황제의 파문을 철회했고, 하인리히 4세는 독일로 돌아와 반대파를 제압 및 숙청하고 내전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그레고리오 7세를 폐위하고 새로운 교황을 앉혔다. 이렇게 결국 황제의 승리로 끝나는 듯 했으나,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등 많은 상처를 받아와 인간불신이 심했던 하인리히 4세는 아들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이에 교황과 반대파 제후들이 하인리히 4세의 아들 [[하인리히 5세]]를 부추겨서 반란이 일어났다. 하인리히 5세는 아버지를 감금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백성들의 위한 민생정치를 펼쳐 국민들에게 인기와 존경을 받았던 하인리히 4세[* 하인리히 4세는 중세 관습법에 의해 용인되던 기사들의 특권 및 횡포로부터 평민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칙령을 반포했다. 하인리히 4세의 칙령은 중세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평민들의 인권이 크게 개선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인리히 4세의 칙령은 불입권에 의해 철저히 보호되던 제후들의 권한을 황제의 칙령으로 제한했다는 점에서 중세 법학사에도 크게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하인리히 4세는 독일 지역 백성들에게 큰 지지와 존경을 받았다.]는 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다시 반격했고 이에 하인리히 5세는 패배 직전까지 갔지만 하인리히 4세가 노환으로 사망하고 만다.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정권을 찬탈하여 제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제위 기간 내내 하인리히 5세의 족쇄가 되었고, 이를 가장 잘 활용한 이는 교황이었다. 한편 그레고리오 7세 폐위 이후 한동안 교황권은 약화되었으나 [[우르바노 2세]]가 교황좌에 오르면서 다시 강력한 교황권 강화 작업이 진행되었다. 우르바노 2세는 동로마 황제의 원군 요청을 받자 [[십자군 원정]]을 일으켰다. 아울러 우르바노 2세의 후임 교황들은 인내심 있게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의 군주들과 서임권 투쟁을 벌였다. 1107년을 전후로 한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와 잉글랜드 국왕은 교황과 서임권에 대한 비슷한 내용의 타협안에 서명했다. 즉, 국왕들은 성직 임명 과정에 참여할 수는 있지만, 최종 임명 권한은 교황이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 대신 타협안의 내용에 따라 교황에 의해 임명된 성직자는 동시에 세속의 주군인 국왕에게 봉신으로서 충성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국왕들과 달리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5세는 선조들이 가졌던 성직 임명권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지만, 반란으로 아버지의 권좌를 탈취했다는 원죄 때문에 강력한 황권을 행사하는데 제약이 있었던 하인리히 5세는 결국 1122년 보름스 협약에서 프랑스나 잉글랜드와 비슷한 내용으로 서임권에 대한 타협을 보았다. 이후 한동안 교황과 군주들 간에 큰 대립이 없었다. 12세기를 거치면서 세속 왕권은 더욱 강화되고 있었으나, 십자군 원정의 연이은 실패로 교황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12세기 말 추기경단들은 그동안 너무 연로한 성직자가 교황이 되어 젊은 군주들에게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는 데에 인식을 함께하고 왕권에 강력히 대응하기 위해 젊은 교황을 뽑기로 했다. 그리하여 선출된 이가 그 유명한 [[인노첸시오 3세]]다. 인노첸시오 3세는 무려 37세라는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교황에 선출되면서 교황권은 외견상 절정에 달하게 된다. 당시 교황의 힘은 단지 종교계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영적 권력뿐만 아니라, 교황령이라는 이탈리아 중부 지역 전체를 비롯한 이탈리아 곳곳의 노른자위 땅에서 나는 경제력과 인구에 더해, 각국의 교회에서 걷히는 세금과 헌금, 기부금을 바탕으로 한 세속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비록 교황이 황제나 왕과 직접 군사력으로 맞서는 것까지는 불가능했지만, 당시 황제나 왕들도 자국 내에 자기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왕 혹은 황제 못지않게 강력한 대영주들이 많이 있었고, 또한 주변에는 자신을 대신해 언제든 왕위 혹은 황위에 오를 정통성과 의사가 있는 동생이나 아들 등 왕족들이 있었기에 그들의 눈치를 계속해서 봐야 했다. 교황은 이들에게 황제나 왕의 관을 씌워줄 권한이 있었고, 현직 황제나 왕보다는 약간 못 미치는 세력의 이들을 지원해 줄 군대와 돈이 있었기에 이렇게 강력한 교황권이 가능했던 것이다. 흔히 교황과 황제의 대립 과정에서 황제들이 옹립한 [[대립교황]]들의 존재가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교황이 이런 목적에서 세운 대립왕(Contrarex, 다른 번역명으로는 반왕)들도 있었다. 또한 당시 잉글랜드-프랑스-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세 주요 왕국들 뿐만 아니라, 서유럽의 여러 군주국들은 중첩된 정략결혼에서 야기된 혼맥으로 복잡하게 연결된 사이였다. 이는 그 결혼으로부터 한 두 세대 뒤에 결혼의 결과물들이 왕좌에 오르게 되면 각국의 국왕들이 삼촌이나 사촌 등 제법 가까운 혈연 관계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이는 다시 말해 해석에 따라 혈연에서 비롯한 정통성에 기반해 다른 국가의 왕위 계승권에 개입할 수 있는 관계가 서유럽 각국 사이에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서유럽과 북유럽 각국 사이에는 왕위 계승권과 복잡한 토지 계승 문제로 말미암은 갈등 관계가 팽배해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교황들은 이를 잘 파고 들었는데, 교황에게는 국왕과 황제의 기독교적 정통성을 부정할 수 있는 파문권이 있었고, 동시에 새롭게 국왕이나 황제의 자리에 오른 사람의 정통성을 인정해줄 권한이 있었으며, 갈등 관계에 있는 왕국들 중 하나를 지원하여 힘의 우위를 갖도록 도와줄 세속적 권력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노첸시오 3세가 자신이 세운 대립왕들과, 서유럽 각국의 불안정한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교황권을 강화시키려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젊고 야심만만한 다혈질의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교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으면서 좌충우돌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두 살짜리 아들을 남기고 사망하자 황제 선출에 적극 개입했다. 또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 신성 로마 황제 [[오토 4세]], 잉글랜드 국왕 [[존 왕]]에게 파문을 날렸다. 그리고 잉글랜드-프랑스-신성 로마 제국 주요 세 국가 사이의 상호 갈등관계를 적극 이용하여 실질적인 군사력을 지닌 국왕들과 황제가 군사적으로 교황에게 위협이 되는 상황을 막고자 하였다. 또 성지를 재탈환하기 위해 4차 십자군을 소집하여 원정을 출정시켰다. 그렇게 외견상 무소불위의 교황권이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교황권이 실추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인노첸시오 3세 때부터였다. 여러 군주들과 제후들 심지어 십자군들에까지 파문을 날리며 태양과도 같은 자신의 권한을 과시했지만, 너무 파문을 남발한 나머지 이제는 아무도 파문에 신경쓰지 않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인노첸시오와 그 전임 교황들이 조성한 국가들 간의 갈등은 결국 서유럽 각국 사이의 전쟁을 야기하며 혼란을 불러왔다. 인노첸시오의 정책들은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왔는데, 서유럽 각국의 국왕들과 황제는 각국 간의 국제전과 내부의 계승 문제로 말미암은 내전에 묶여버렸다. 그리고 인노첸시오와 척을 진 주요 귀족들이 파문당했다는 핑계로 십자군에 출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렇게 각 왕국들의 지원도 끊긴 상황에서, 실세 제후들 마저 대거 불참을 선언하면서 4차 십자군 원정은 별 다른 재산이 없는 영세 제후들 위주로 구성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원정 예산에 있어 북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상인들, 특히 베네치아의 지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약탈이라는 역사상 최악의 재앙으로 이어졌다. 결국 인노첸시오 3세는 자신의 부름에 응해 십자군 원정에 출정한 기사 전원을 파문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4차 심자군 참사로 귀족들과 민중에 의한 자발적 십자군 원정은 온갖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사실상 막을 내렸다. 게다가 인노첸시오 3세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서유럽 각국 사이의 갈등을 심화하는 데에는 큰 성공을 거뒀으나, 세속 군주들과의 약속을 손바닥 뒤집는 바람에 그렇게 심화된 갈등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수습하는 데에는 실패하였고, 이는 오히려 세속 국가들이 교회와 교황의 통제력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 일례로 존왕을 파문시키고 프랑스 필리프 2세에게 하나님의 명령으로 존왕을 치라고 했으나, 얼마후 말을 바꿔 출정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필리프 2세는 교황을 말을 무시하고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그리고 잉글랜드 내에서는 필리프에게 패배하고 잉글랜드의 경제적 곤궁을 심화한 존 왕의 실정에 질린 귀족들이 국왕과 교회의 통제를 벗어나 반란을 일으켜 [[마그나 카르타]]를 통과시키고 이로 인해 그 아들 시대에는 [[헨리 3세]] 시대에는 국왕권을 두고 내전이 일어나고 프랑스인 [[시몽 드 몽포르]]가 집권하여 입법 의회를 소집하는 등, 입헌주의와 의회주의와 관련된 일련의 역사적 혼란이 펼쳐지게 됐다.] 왕권을 견제하기 위해 대립왕을 세웠으나 곧 그 대립왕과 척을 지고 다른 편을 드는 등[* 하인리히 6세 사망 이후 프리드리히 2세 시기까지] 격국 모든 군주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교황은 자신의 권한을 뽐내기 위해 1305년부터 [[삼중관]]이라는 관을 쓰기 시작했다. 삼중관은 왕관 3개가 쌓여 있는 형태로 [[서유럽]], 더 나아가 전체 [[가톨릭]] 세계의 왕과 황제, 대통령, 총리 등의 세속 지도자들보다도 교황의 권위와 권세가 높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장치였다. 그러나 삼중관을 쓰면서 교황의 명예와 권한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최초로 삼중관을 만들어 쓴 클레멘스 5세는 교황이 되고 로마에 가보지도 못하고 [[아비뇽 유수]]를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에 교황들은 줄기차게 세속적인 권력을 추구하다보니 교황 자리를 놓고 암투가 벌어지곤 했으며, 이런 암투 끝에 오른 교황들이 성품이나 자질에서 막장인 사람이 많았다는 점이 비판받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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