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황/역사 (문단 편집) === [[동아시아]] 및 한자문화권 각국 역사와의 관계 === * '''[[한국사|한국]]과 [[북한/역사|북한]]:''' [[18세기]] 말 [[청나라]] [[베이징]]을 방문한 [[이승훈 베드로]]가 영세를 받은 것을 계기로 [[조선]]에 [[가톨릭]]이 전파되었다. 그러나 [[제사]] 금지 등 조선의 국교인 [[성리학]]과 충돌하는 교리가 많은 특성 때문에 [[조선의 천주교 박해|초기부터 박해를 받았고, 그 중에서 대규모 박해만 4번이나 있었다.]] 그 중에서 마지막 대규모 박해인 [[병인박해]]는 가톨릭을 신봉하는 서구 열강인 [[프랑스 제2제국|프랑스]]의 [[병인양요|군사적 개입]]까지 야기했는데, 이는 가톨릭에 대한 조선 조정 및 [[유림]]의 반감을 더욱 강화시키는 역효과를 불러와, [[조선의 천주교 박해|조선의 가톨릭 박해]]는 [[강화도 조약|개항]]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조선과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의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조선의 가톨릭은 마침내 [[신앙의 자유]]를 획득했는데, 당시 [[교황청]]은 [[바티칸 포로|보유한 영토가 없어서]] 기독교권 내에서도 외교 주체로 인정하지 않은 나라가 많았기에, 조선과 교황청의 직접 수교는 실현되지 않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교황청은 [[국가 무신론]]을 추구하는 [[북한]]에 맞서기 위해 [[대한민국]]을 승인했고, [[1963년]]에는 공식 수교까지 맺어 지금까지 우호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반면 북한은 초기부터 국가 무신론을 추구하며 가톨릭을 강경하게 탄압했는데, 현재 북한에는 조선카톨릭교협회[* [[문화어]]에서는 가톨릭이 아닌 카톨릭이라는 표기를 사용한다.]라는 어용 가톨릭 교회와 [[장충성당]] 등 가톨릭 [[성당]]들이 존재하지만, 교황청으로부터 정식 [[성품성사|사제 서품]]을 받은 [[성직자]]는 전멸한지 오래돼서 북한 내 다른 어용종교들[* [[조선그리스도교련맹]], [[조선불교도련맹]] 등]이나 [[중국천주교애국회|중국의 어용 가톨릭 교회]]와는 달리 형식적으로나마 성직자 행세를 하는 사람마저 존재하지 않으며, [[평신도]]들 역시 외부에 보여주기 위해 만든 가짜 신도일 가능성이 높다. * '''[[중국사|중국]]과 [[대만사|대만]]:''' [[중국]]과 [[가톨릭 교회]]의 접촉 자체는 [[원나라]] 때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중국인]] 신자들이 생겨난 건 [[마테오 리치]] 등 [[예수회]] 선교사들이 활동한 [[명나라]] 시대였고, [[서광계]] 등 [[신사(중국)|지배층]] 내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들도 생겼다. 이후 [[청나라]] 시기에 가톨릭 탄압이 있기도 했지만 동시대 [[조선]]이나 [[에도 막부]]만큼 강경한 탄압이 장기적으로 지속되진 않았다. [[중화민국 국민정부|중화민국]]은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에 [[교황청]]과 수교했는데, 이는 [[국부천대|중화민국이 대만으로 추방]]된 이후에도 지속되어 현재 교황청은 [[유럽]]에서 유일하게 대만과 수교하고 있다.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은 국가 무신론을 추구하며 건국 초기부터 가톨릭을 강경하게 탄압했고, 현재 중국에는 [[중국공산당|공산당]]의 [[중국천주교애국회|어용 가톨릭 교회]]가 존재하며 [[성직자]]들도 있지만, 해당 교회의 성직자들은 교황청으로부터 직접 서품을 받지 않았기에, 지금도 교황청과 중국의 험악한 관계는 지속되고 있다. 한편 [[마카오]]와 [[홍콩]]은 현재 중국령이지만 [[포르투갈 제국|서구]] [[대영제국|열강]]의 [[포르투갈령 마카오|지]][[영국령 홍콩|배]]를 받은 역사가 있어서, [[일국양제]]에 따라 정상적으로 사제 서품을 받은 가톨릭 성직자들이 교회를 이끌고 있다. 다만 마카오는 수백년에 걸친 가톨릭 국가 포르투갈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도교]]와 [[불교]]보다도 가톨릭 교세가 약하며, 홍콩 역시 도교와 불교가 강세를 보이는데 [[성공회]] 국가 영국의 지배를 받은 특성상 홍콩 최대 기독교 교파는 가톨릭이 아닌 성공회다. * '''[[일본/역사|일본]]:''' [[일본]]은 [[센고쿠 시대]]에 [[포르투갈인]]과 접촉하여 처음으로 가톨릭과의 접점이 생겼는데, 지배층인 [[다이묘]]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가톨릭으로 개종할 정도로 가톨릭 선교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전투]]를 통해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는 가톨릭 신앙 자체를 강경하게 탄압하고 외국인 선교사의 입국을 금지하는 [[쇄국]] 정책을 실시했고, 이로 인해 일본 내 가톨릭 신자 공동체는 [[카쿠레키리시탄|성직자 없이 평신도들끼리 숨어서 신앙 생활을 하는 상태]]로 200년 이상 연명하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가톨릭 탄압이 중지되면서 숨어 살던 신자 상당수가 가톨릭으로 원복하여[* 그동안 카쿠레키리시탄의 교리와 가톨릭 교리가 상당히 달라져 있었기에, 일부 카쿠레키리시탄들은 끝내 가톨릭으로 복귀하지 않고 하나레키리시탄이 되어 카쿠레키리시탄 교리를 계속 믿고 있다.] 일본 각지에 [[성당]]이 건립되었지만, 센고쿠 시대의 교세를 끝내 회복하진 못해서 현재 일본은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등 여러 기독교 종파를 다 합쳐도 1% 남짓할 정도로 기독교가 약한 나라가 되었다. * '''[[베트남/역사|베트남]]''':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프랑스 지배 기간]]에 가톨릭이 들어와 확립된 특성상 당연히 민감한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1955년 [[사이공]]의 [[남베트남]]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공인[* 프랑스도 대공산 견제책으로 자유진영 남베트남의 독립은 승인하였다.]됨에 따라 남베트남과 바티칸의 국교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던 남베트남 대통령 [[응오딘지엠]]의 인간성 문제 등 이래저래 남베트남은 제살깎아먹기를 시전했고 20년 내전 끝에 1975년 북베트남이 사이공을 함락시켜 남베트남은 지도에서 지워지고 바티칸과의 국교도 단절되었다. 2007년 통일 베트남과 다시금 국교가 회복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