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황수위권 (문단 편집) ====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 ==== 적어도 루가는(혹은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로에게 이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여기서 루가가 제시하는 바울로의 모습을 살펴보아야겠다. 루가는 역사를 당시 규준들에 따라, 그러나 신학자로서 서술한다. 루가의 바울로상은 그가 펼쳐보인 신학적 구상에 맞추어져 있어서, 역사상 바울로와는 거리가 있다. >아마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울로가 루가에게는 여느 사도들처럼 진짜배기 사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도는 열둘이니, 곧 세례자 요한의 세례부터 예수 부활까지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들이다(1,21-22 참조). 루가는 사도 칭호를 이 열두 사람에게 국한하기 때문에, 바울로에게는 사도 칭호 부여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루가가 바울로와 바르나바를 사도로 칭하는 경우가 한 번 있는데(14,4.14), 사도 칭호를 좀 헐값에 내주었다고 하겠다.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사도들, 즉 교회가 선교 과업을 위해 가려내어 파견한 "사자들"(13,2-3), 안티오키아 그리스도인들의 사자들이다. >----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바울로》, 분도출판사, 2008, 467-468p >사도 개념을 폭넓게 이해·사용하는 경우 ―예컨대 루카 복음서 11,49나 바르나바와 바오로(순서 주목!)를 사도로 지칭하는 사도행전 14,14[* (책 속 주석) 사도행전 14,4 참조. SCHNEIDER(''Apg'' I 228)는 14,14에서 사도 칭호가 없는 서방 텍스트의 '더 어려운 이문(異文)'을 우대한다.] ― 는 아주 드물다. 열두 사람 사도직이라는 강령적 의미에서는 바오로도 당연히 사도일 수 없다. 열두 사도는 바오로의 활동에 앞서 존재하는 일종의 제도다. 열두 사도는 사도회의와 거기서 내려진 결정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언급되는데(사도 15,22-23; 16,4), 바로 이 대목 이후에는 오로지 바오로의 선교 활동만 보도된다.[* (책 속 주석) 사도행전 18,24-28에 삽입된 아폴로의 활동에 관한 짧은 보도는 전적으로 바오로에게 정향되어 있다.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때 바오로는 한 명의 사도도 만나지 못하고 (주님의 아우) 야고보만 만난다(21,18).] 열두 사도의 활동 장소는 예루살렘이다. 여기서 그들은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고(4,33; 참조: 2,43),교회 지도 직무를 맡았다(4,35 이하 5,2 등). 또한 필리포스의 선교 활동을 확인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냈다(8,14). 스테파노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갑자기 들이닥친 박해가 그리스도인들을 그 도성에서 쫓아냈으나, 사도들은 예외였다(8,1). 사도들은 그곳에 계속 남았다. 베드로는 리따와 야포의 교회들을 방문하고(9,32.43), 이방인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를 최초로 교회에 받아들였다(10,1-48). 이 일은 한편으로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적극적 선교 결정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15,7-11). 예루살렘은, 그러니까 루카 이부작의 전체 구도에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장소일뿐더러, 열두 사도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베드로는 그들의 특출한 대표자다. 그는 그리스도교 최초의 설교를 하고(2,14 이하)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을 방문하여, 성령에 부추겨져 이방인을 최초로 교회에 받아들인다. 갈라티아서 2,7.9에 따르면 루카는 사도회의에서 확증된, 베드로에게는 유다인 선교를 그리고 바오로에게는 이방인 선교를 할당한 결정을 알고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사도행전에서 이 결정은 베드로(그리고 다른 사도들)는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에서 활동하고, 바오로는 땅끝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사도 1,8 참조). >사도행전의 바오로상{{{-2 像}}}은 양면적이다. 한편 바오로는 열두 사도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른 한편 이 책 둘째 부분에서는 열두 사도의 과업을 이방인 지역에서 속행하는 권위 있는 증인이 된다. 물론 바오로상의 좀 더 상세한 규정에는 논란이 많다. 사도행전의 묘사는 저술 당시 교회 내의 분규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연구 경향이 있다. 이단적·영지주의적 동아리들이 바오로를 빙자하고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 그의 자유와 독자성을 끌어댔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카는 이에 맞서 바오로를 대교회에 맞춰 넣으려는, 요컨대 길들이려는 목적으로 사도행전을 저술했다는 것이다.[* (책 속 주석)참조: G. GLEIN, ''Die Zwölf Apostel''(FRLANT 77) (Göttingen 1961) 특히 11-188: J. ROLLOF,''Apostolat ― Verkündigung ― Kirche''(Gütersloh 1965) 199-211; C,BURCHARD, ''Der dreizehnte Zeuge'' (FRLANT 103) (Göttingen 1970); G.LÜDEMANN, ''Paulus, der Heidenapostel'' I (FRLANT 123) (Göttingen 1980); K. KERTELGE (Hrsg.), ''Paulus, in den ntl. Spätschriften'' (QD 89) (Freiburg 1981) 중 P.-G. MÜLLER(157-201)와 K. LÖNING(202-234)의 논문.] 이 역사적 배경의 재구성은 매우 가정{{{-2 假定}}}적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신학적 관심사들이다. 또한 루카가 바오로 사후 약 30년이 지난 자기 시대 교회의 바오로상에 부합하는 바오로의 모습을 많이 전해 주고 있음을 셈에 넣어야 할 것이다. 바오로 활동의 방사력{{{-2 放射力}}}은 과장되어 있다. 바오로는 총독과 임금들 면전의 탁월한 연설가(사도 24-26), 대단한 이적가(19,11-12), 아레오파고스에 등장하고 그 옛날 소크라테스처럼 아테네 아고라에서 철학자들과 논전을 벌이는 철학자로 나타난다(17,16-34). 바오로는 시종일관 그리스도인 2세대 사람으로, 그러나 사도들의 전승을 계속 교회에 전해 주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사울/바오로가 열두 사도에게 결부되어 있음은 두 차례 예루살렘 방문을 토해 표현된다: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었다"(9,28; 참조: 11,30; 12,25).[* (책 속 주석)갈라티아서 1,18-19에서는 바오로가 사도회의 전에 한 차례만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한다.] 세 번째 방문의 목적인 사도회의에 바오로는 물론 참석했지만, 중요한 결정을 한 이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다: "그때에 사도들과 원로들은 온 교회와 더불어, … 결정하였다"(15,22). 또한 바오로가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 교회(15,2-3)뿐 아니라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15,22)의 사절 역할도 했음을 유념해야 한다. 부활화신 그리스도에 의해 종과 증인으로(26,16) 그리고 '이민족들의 빛'으로(13,47) 세워진 바오로는,교회일치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사도들과의 결속을 통해 자기 교회들에 보증한다. 역사상 바오로에게는 복음의 일치가 확실히 중요한 관심사였는데(참조: 갈라 2,1-2; 1코린 15,11), 루카는 자신의 바오로상에서 독자성과 자주성을 많이 깎아 냈다. 루카는 자기 교회들(예전 바오로 교회들의 영향권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이 예루살렘이라는 원천에 정향되어 있는 질서로서 구상된 교회일치를 받아들이게 하려고 노력한다. >----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신약성경신학》, 분도출판사, 2014, 293-295p >부활후대에는 열두제자단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상징적 의미가 뒷전으로 물러난다. 예루살렘 공동체에서는 그들이 지도 구실을 별로 취하지 않는다. 사도 6,2는 그렇다는 근거라고 보기에 너무 어렵다. 이제는 그들의 의미를 새로운 빛으로 보게 된다. 비록 1고린토 15,5.7에서는 아직 그들이 모든 사도와 나란히 거명되지만(이때 열두 제자는 모든 사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루가가 강력히 추진하는, 사도라는 이름을 열둘에 한정시키는 발전이 있다. 열두 사도로서 그들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표준적이며 권위적인 증인들이다. 사도단 안에서 시몬 베드로는 이미 말한 의미에서 특별한 공식 증인{{{-2 testis qualificatus}}}이 되고 또 따라서 그 위에 메시아의 교회가 건설되어야 할 바위가 된다. 부활전대 상황에 연결점이 있는 시몬 베드로의 이 빼어난 소임이 부활후대에서는 열둘보다도 먼저 그에게 몸소 나타나시는 부활자의 첫 발현으로 밑밭침된다(1고린 15,5; 루가 24,34). 이 첫 제자는 두 번, 예수 활동의 시작 때와 십자가와 부활 후의 새 시작 때, 교회의 케파가 되었다. >----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나자렛 예수》, 분도출판사 2002, 253-254쪽 즉 루가는 바울로를 진짜배기 사도로 보지 않으며, 열두 사도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쓴다. 바울로를 무작정 깎아내리지는 않지만 독자성과 자주성에 관해서는 깎아 내렸으며, 이는 설령 바울로의 역사적 자주성을 높게 잡더라도 후대의 교황권 논쟁에서 바울로를 단순한 반대 사례로 제시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오늘날 가톨릭에서든 개신교에서든 바울로는 사도라고 불리지만, "바울로가 그렇게 했다"는 "초대 교회에서는 이렇게 하는 것을 옳다고 봤다"와 별개의 명제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혼란의 중심에서 베드로의 자리는 루가의 시대에 기억되었던 바 그대로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사도행전에서 56회 거명되는데 열둘 중 으뜸가는 이가 지닌 준거적 중요성은 지대했다. 베드로는 으뜸자리를 지켰고 다른 사도들과 단연 구별되었으며 주님의 형제로서 그 중요성이 돋보였던 야고보와도 차별되었다(사도 12,17; 15,13 이하; 21,25). 베드로는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보고할 의무도 있었다. 그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선교한 내용을 예루살렘의 신도들에게 보고하여 묵시적인 동의를 얻어냈으며 아울러 성령의 결정을 전해주었다(사도 11,1-18). 영은 베드로의 선교 활동을 인증해주었으나 사도행전의 저자는 공동체의 암묵적인 수용도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오늘의 용어로 말해서 "수용의 기준"은 성령과 공동체의 인준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상황은 상당히 복잡하다. 확실히 루가는 열둘에 속하면서 지속적으로 "말씀의 봉사"에 기여하는 베드로의 준거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되 또 한편으로는 영의 주도 아래 파란 많은 선교 활동을 전개한 베드로의 사도적인 행위도 차별화하였다(11,12). 그러나 베드로에게 특징을 부여하는 것은 특정 공동체의 섭정이 아니라 교회 일치의 중심에서 그가 준거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이었다.[* (책 속 주석)이 주제에 대한 비판적인 토론에 대하여 참조: Christian Grappe, ''Images de Pierre aux deux premiers siècles'', PUF, Paris, pp.49-81.] 이제 사도행전으로 다시 돌아와 사도 6,1-7의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 이야기는 열둘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완성하고 직무의 계승을 보장하는 새로운 실행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 >-샤를르 페로, 《예수 이후-초대교회의 직무》, 가톨릭출판사 2002, 208-209p 그리고 루가에 의하면 베드로는 나머지 사도들과도 구별되었고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도 차별되었다. 또한 갈라디아서 2장의 이야기는 베드로와 바울로 사이의 논쟁 승패에 대해서도 명시하지 않는다. >주석학에서는 갈라디아서 2장 15-21절이 바울로가 게파에게 했던 항의와 관계가 있는지, 있다면 어느 정도나 그러한지가 논란되고 있다.[* (책 속 주석) 수사학적 · 양식비판적 주석에서는 갈라 2,11-21을 갈라디아의 거짓 선생들과의 대결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Wechsler, ''Geschichtsbild'' 373 참조. 특히 번역에서부터 문제가 되는 것은 2,15("우리는 태생이 유대인들이며 이방인 출신 죄인이 아닙니다")인데, 여러 주석자는 이 구절을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의 논증에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본다. 앞의 책, 363 참조.] 물론 이 대목은 당시 실제로 했던 말의 복사본이 아니다. 본문은 일차적으로 갈라디아의 거짓 선생들과의 투쟁에 의해 꼴지어져 있다. 그러나 율법의 행업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의 대비·대립은 이미 당시에도 근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실로써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향한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2,16). 바울로는 "오직 믿음으로만"{{{-2 sola fide}}}을 주장하고 있다. >게파는 무슨 생각으로 태도를 바꾸었던가? 바울로는 게파의 할례받은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위선, 복음의 진리에서의 이탈을 비난했다(갈라 2,12-14). 이것이 바울로의 관점이다. 게파는 두 맷돌, 야고보와 바울로 사이에 끼었다. 바울로는 베드로의 두려움이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과 주님의 아우 자신 그리고 유대인 선교에서의 주도 역할 상실 가능성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그 밖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획책하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정치권력자들과 관련되었을 수도 있다.[* (책 속 주석) 사람들은 이와 관련하여 예수 수난 당시 베드로의 처신을 거듭 지적한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비판은 신학적 비일관성, 올바른 앎과 상충되는 행동을 겨냥한다. 게파는 유대인답지 않고 이방인다운 자신의 생활 방식을 통해 모세 율법은 구원에 본질적인 의의를 더 이상 보유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 확신을 이제 버렸던가? 그렇지 않았음은 거의 확실하다. 다만 그는 이 충돌에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에게 부추겨져, 율법을 이스라엘 역사를 틀짓고 유대인의 고유성을 꼴지어 온, 유대인들이 언제까지나 보존해야 할 제도와 문화적 생활 공간으로 인정하려 했을 수 있다. 게파는 유대인 선교를 책임진 사람으로서 이런 상황에선 (게파를 인격적으로 모욕하기까지 한) 바울로와의 충돌을 결연히 감수하고자 했을 것이다. 게파는 바울로와는 달리, 기꺼이 타협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필경 그는 훗날을 위해 그런 타협을 바랐을 것이다. >이 충돌이 어찌 끝났는지 바울로는 말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결말이 낫다면, 그에 관해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입 다물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게파는 자신의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여기서 승자와 패자에 관해 말하면 안 된다. 바울로는 안티오키아를 떠났고 (우리가 아는 바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함께 일했고 사도회의에서도 자신과 함께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했던 바르나바가 그 충돌에서 자기편에 서지 않은 일이 바울로에게는 특히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르나바가 이방인들 가운데서의 선교 활동을 포기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마 바르나바야말로 제3의 길을 모색했던 것 같다. 충돌이 바울로에게 쓰라린 결과로 끝난 것이, 그가 바르나바 및 게파와의 결속을 영구히 깨버렸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훗날의 진술들, 특히 고린토 교히에 보낸 편지가 확인해 준다(1고린 9,5-6 참조). 무엇보다도 바울로는 고린토 전서 15장 1-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복음에서 자신이 게파와 다른 모든 사도 그리고 주님의 아우 야고보와 일치함을 확언한다. 바울로는 (사도회의의 합의에 따라) 이방인들 가운데서의 복음 선포에 온전히 헌신했다. 또한 예루살렘 교회와의 유대를 보존하고자 한 사도의 의지는 모금 활동을 통해 인상 깊게 입증되거니와, 이 일을 그는 자기 교회들에서 성심으로 수행했다(갈라 2,10). >----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바울로》, 분도출판사, 2008, 159-161p 위에서 발췌한 그닐카는 바울로에게 "유리하게 결말이 낫다면, 그에 관해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입 다물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말하고 있으며, 결국 갈라디아서의 사례를 후대 교황직 논쟁에서의 반례로 삼기엔 부적절함을 보여준다. 갈라 2,15-21은 실제로 했던 말의 복사본이 아닐 뿐더러, 이 구절은 바울로가 실제로 베드로에게 어떤 말투로 말했는지, 저자세였는지, 만약 자주적이였다면 베드로는 뭐라고 받아줬는지 등을 명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의 서술은 초기 교회를 실제보다 더욱 통일되었던 것으로 묘사하여 실제 존재하였던 분열을 은폐하는 것으로서, 1세기 중반 당시 베드로의 권한이 전체 교회에서 역사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근거로서 누가 문서를 제시하기는 어렵다. 즉 사도의 권한에 대한 보편적인 동의가 존재했다거나 나아가 당시 교회가 통일된 집단으로서 존재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기 보다는 후대 교회가 당위로서 요구한 신학적 해석에 가깝다. >우선 고찰할 것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확장하는 이방인 선교 사이의 매우 심각하고 깊은 분열을 누가가 어떤 방법으로 은폐시켰는가 하는 점'''이다. 그는 히브리인들과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의 내적인 분열을 단순히 행정상의 얽힘으로 묘사했으나 (행 6장) 실재 상황은 훨씬 더 심각했다.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유대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 사이에 할례에 대한 불일치는 심각했으나 예루살렘 회의에서 원만하게 만장일치로 해결을 보았다.(행 15장) 그렇지만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분명히 극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바(갈 2장), 바울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을 포함하여) 안디옥에서의 베드로 사이의 차후에 계속된 대결에 대해서, 또한 갈 1. 6-9, 5. 12, 그리고 빌 3. 2 이하의 격렬한 감정적인 폭발, 혹은 그 폭발의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고후 10-13장에 나타난 바울과 팔레스틴 출신의 사도들 사이의 깊은 적대감에 대해서도 전혀 무지하다. 마찬가지로 행21장에 기록된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에 대한 기사도 (기부금 전달을 위한) 그의 방문 목적을 누가는 훌륭하게 묵살해 버리며 바울과 예루살렘 지도력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가장 지독한 불화의 내용을 베일로 가리고 있다. (중략)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것으로 보이는 설교들의 특성도 사도행전 전반부에 나타난 설교들과 매우 흡사하며 바울적인 특징을 전혀 포함하지 않고 있다.(참고. 특히 2.22-40과 13.26-41을 대조할 것)이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보아 누가는 거의 자신이 다루려고 했던 일화들과 분야들에 대해서 조차 편견이 없는, 그리고 매우 세련된 영상을 얻지 못했다. 누가가 이런 세부 사실 모두를 혹은 대부분을 창안했다고 결론지을 필요는 없으며 또한 우리는 바울이 자신과 예루살렘 교회 사이에 대두된 문제들을 다루는 태도가 완전히 객관적이며 공정하다고 추정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바울의 태도가 일방적이라면 누가의 태도도 분명히 그러할 것이다.''' 기껏해야 누가는 원시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통일화된 영상속에 스스로를 안락하게 조화시킬 필요성을 느꼈던 것 만큼이나 바울의 인격과 논박의 날카로운 국면을 제해버렸다. >---- >제임스 던,『신약성서의 통일성과 다양성』, 솔로몬, 2010, 550-551p. 이하 『신약성서의 통일성과 다양성』 사도행전 15장에서는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나 바울이 아닌 야고보의 지도력에 의존했다는 것이 암시된다는 점을 제시한다. >놀라운 것은, 이 결정은 원래 제자들의 주요 대변인인 베드로에 의해서 내려지지도 않고, 사도행전 이야기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 바울에 의해서 내려지지도 않는다. 이 결정은 [[예수의 형제 야고보]]에 의해서 내려진다. >분명히, 베드로(행 15:7-11)와 바울(행 15:12)도 이 논쟁에서 공헌을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야고보이다. 야고보는 베드로의 편을 들고, 교회가 취할 입장을 말로 표현하고, 그런 후에 바울, 바나바, 소수의 다른 사람들에게 이 결절을 바울이 복음 전도와 선교 사역에 종사해왔던 이스라엘 땅 밖에, 즉 디아스포라에 알려줄 임무를 부여한다. >---- >크레이그 A. 에반스, 위의 책, 140p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