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황수위권 (문단 편집) === 요한계 교회 === 요한복음에서만 유일하게 등장하며 요한계 교회에 전해진 전승의 주된 출처인 '애제자'[* 전통적으로 이 제자를 사도 요한으로 보았으나 현대에는 이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와 베드로의 관계에 대해서, 요한계 교회가 베드로의 권위를 받아들인 정도에 대해서 이견이 있다. 가톨릭의 해석에 따르면, 요한 복음서에서는 애제자와 베드로를 특유한 방식으로 맞세우는데, 여기서 베드로는 온 교회와 관련되는 보편적 임무를 받았다고 해석된다. 애제자는 베드로와 달리 스승을 부인하지 않지만, 무덤에 먼저 도착했으나 베드로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며, 21장에서는 특히 베드로가 지닌 준거적인 기능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증언한다. >요한계 교회들의 역사적 상황을 알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포괄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은 이렇다: 이 교회들은 한 도시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대교회 변두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고유한 전승들을 발전시켜 나갔으나, 대교회 측 공동체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썼다. 이 교회들은 시리아 또는 동부 요르단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 물론 에페소 가설도 많은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다.[* (책 속 주석) 참조: J.L. MARTYN, ''History and Theology of the Beloved Disciple'' (Nashvile{ }^{2}1979); R.E. BROWN, ''The Community of the Beloved Disciple'' (New York 1979); D.M. SMITH jr., Johannine Christianity: Some Reflections on Its Character and Delineation: ''NTS'' 21 (1975) 222-248; K. WENGST, ''Bedrängte Gemeinde und verherrlicher Christus'' (BThST 5) (Göttingen{ }^{2}1983); J. KÜGLER, DAS Johannesevangelium und seine Gemeinde ― kein Thema für Science Fiction: ''Biblische Notizen'' H.23 (1984) 48-62] >(중략) >부활한 예수는 시몬 베드로에게 목자 직무를 넘겨준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21,15), :내 양들을 지켜 돌보아라"(21,16.17)라는 말씀은 양들이 목자 소유임을 강조하는 착한 목자에 관한 비유 말씀(10,11-14)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임무는 온 교회와 관련되는 보편적 임무이다. 양 떼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그 제자에게는 단지 목자로서 보살피는 임무가 부과된다. >(중략) >시몬 베드로가 포괄적 직무를 위임받았지만, 요한계 교회에서는 애제자가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계속 남아(살아) 있을 터였다.(21,22-23). 이 두 제자의 대비 ― 근본적으로 매번 이 둘과 예수의 삼각관계를 내포한다 ― 에서 시몬 베드로가 더 큰 권위를 지닌 자로 나타나지만,[* (책 속 주석) 요한 복음서 1,40-42의 이름 부여와 21,15-19 사이에 모종의 어원적 관련성을 성립시키기는 어렵다. 마태오 복음서 16,18에는, 베드로가 페트라(바위)라는 의미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그런 관련성이 존재한다. 참조: GNILKA, ''Matthäusevangelium (각주 227) 49-50.69.] 애제자와 예수는 더 친밀한 관계다. >(중략) >요한 복음서는 왜 애제자와 시몬 베드로를 그렇게 특유한 방식으로 맞세우는가라는 물음이 남아 있다. 이 두 사람은 그동안 교회에서 권위자들이 되었는데, 애제자는 그의 공동체들의 국지적 영역에서 그러했다. 이 공동체들은 대교회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이 대교회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썼음은 거의 확실한데, 방식은 이랬다: 한편으로는 시몬 베드로가 대표하는 대교회의 권위를 인정해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상응하여 자기네 대표자의 권위 또한 관철시켰다. 그 밖에 이 두 제자에게 모종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 예컨대 베드로는 직무를, 애제자는 카리스마를 대표한다[* (책 속 주석) A. KRAGERUD{{{[}}}''Der Lieblinsjünger im johannesevangelium'' (Oslo 1959){{{]}}}의 해결책이다. 연구자들의 널리 일치된 견해에 따르면, 베드로의 권위를 강조하는 마태오 복음서가 시리아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이 주장은 요한 복음서도 시리아에서 생겨났으리라는 견해의 한 논거가 된다. 이 복음서를 대교회에서 통용시키려는 의도가 애제자를 사도 요한과 동일시하는 데로 귀결되었다고 하겠다.] ― 것은 신빙성이 없다고 하겠다. >----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신약성경신학》, 분도출판사, 2014, 403-411p >가장 놀라운 것은 시몬, 게파, 베드로라고 삼중으로 이름이 소개된 안드레아의 형제에 비교하여 요한 전승은 '사랑받는 제자'라는 익명의 인물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익명의 제자는 신도의 전형이 되어서 베드로를 비롯하여 다른 제자들을 능가한다. 요한 19,35에 의하면 그는 탁월한 의미로 참된 증인이며 신앙의 보증이다. 더욱이 베드로의 이미지는 요한 21,30-31의 결론 구절로 완결되는 요한 1장-20장의 내용와 25절로 끝맺음을 하는 요한 21장의 내용 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21장은 요한의 색채를 가지고 있는 부록이다. 바로 이 점이 요한 공동체의 중심에서 베드로의 이미지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구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해준다. >요한 1장에서 20장까지 베드로는 여러 번 등장하지만 공관복음에 비교하여 대조적인 이미지를 가진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를 처음으로 추종한 인물은 베드로가 아니라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아였다(요한 1,40 이하; 6,8). 따라서 먼저 메시아를 발견한 이는 안드레아이지 나중에 예수와의 첫 만남에서 게파라고 불리운 시몬이 아니다(요한 1,42 비교 마태 16,16-18). 그러나 생명의 빵에 대한 담론이 야기한 어려운 상황에서 제자들이 예수를 떠나간 반면에 베드로는 예수의 지고한 신원을 고백하였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6,69). 이것은 루가 9,20에 의한 필립보의 카이사리아에서의 신앙고백과 유사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 묘하게도 요한 6,69에서 사용된 어휘들은 마르 1,24에서 더러운 영들이 사용한 말들과 같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마르 1,24). 더욱이 베드로는 예수의 신원을 올바르게 고백한 첫 번째 인물이 아니었다. 요한 전승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이 신도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요한 1,34)이라고 고백하였다. 나중에 11,27에서 아마 아이러니의 정점으로 마르타라는 여인이 마태 16,16의 베드로처럼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게다가 요한은 베드로의 몰이해(13,8 이하)와 그가 세 번에 걸쳐 예수를 부인한 사실(13,36 이하; 18,18-27)을 강조하였고 다른 복음서들처럼 그에게 두려움에 대한 변명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사랑받는 제자는 스승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으며 십자가 밑에서 함께 있었다. 그러나 풍미가 넘치는 요한 전승은 이 제자가 무덤에 먼저 도착했으나 베드로에게 자리를 양보하였음을 상기시킨다(20,4 이하). 그리고 복음사가는 요한에 대해서만 "그가 보고 믿었다"(20,4)라고 덧붙였다. 분명히 첫 번째 요한 전승은 베드로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으나 마르코복음의 말미에서 그러했듯이 그를 참된 제자의 전형으로 만들지 않았다. 베드로가 비록 요한 전승의 중심에 자리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준거의 대상으로는 남아 있었다. 요한 전승은 익명으로 침묵 속에 머물러 있는 사랑받는 제자에게 누구보다도 큰 비중을 두었으나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베드로도 함께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한편 베드로를 기준으로 삼는 이 움직임은 부록으로 덧붙여진 21장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번에는 시선이 누구보다도 베드로에게 주어졌다. 이러한 방향 선회는 의심할 여지없이 후대의 일부 요한계 공동체 내부에서 사고의 발전적인 과정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복음서 상호 간의 많은 만남과 관계가 증거하고 있듯이 교회 간의 연대가 더욱 공고해졌기 때문이다. 공관복음 상호 간의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소위 "공관복음 문제"는 교회간의 이러한 연결 고리를 잘 설명해준다. 예컨대 루가는 마르코에 의존하되 자신의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이를 수정하였다. 그리고 수눈사화의 경우 요한 전승과 루가 전승은 부분적으로 내용이 섞여 있다. 적어도 70년대부터 이들 교회는 오늘날의 용어로 교회 일치의 과정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사랑받는 제자가 설립한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처음에는 다른 교회들과 매우 달랐으나 당시에는 이미 사망했던 베드로(요한 21,19)에게 부여된 역할을 인정함으로써 이제 이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게 되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80년대의 유다계 그리스도인 교회들의 확신을 반영하는 마태 16,17-19의 방식으로 요한 21장은 베드로가 지닌 준거적인 기능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 전승에서처럼 바오로에게서도(갈라 1,18) 베드로는 여하튼 받아들여야 할 인물이었던 것이다. >(중략) >베드로는 목초지를 찾아 앞장서서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처럼 양떼를 돌보아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중략) >복음 전승들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과의 관계를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예의 수위권" 내지 "사법권의 수위권"이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 관계의 표현들은 주석학에서 나온 언어도 아니다. 이 관계는 굳이 권력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보다 발전된 의미로 표명되었다. 이 관계는 실존적이고 표상적인 언어로 표현되었고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와 준거의 틀 안에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이 핵심적인 준거는 베드로와 유기적인 관계를 갖지 않고는 참되게 언표될 수 없다. >그러나 가톨릭 신학자는 이 준거적인 관계가 성서 안에서 확정된 과거의 표지만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그것은 베드로의 신앙에 대한 기억이 소멸해 가는 과정에서 베드로의 과거만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관계는 오늘날 교회의 현실 안에서 언표되어야 한다. 가톨릭 주석가는 자신의 전문 분야를 넘어서는 이 주제에 직접 뛰어들지 않는다. 다만 그는 신약성서의 정보들이 공동체적 삶의 중심에서 이들이 갖는 중요성에 따라 말이나 글로 전해진 첫 전승들에 의해 얼마나 점진적으로 선택되고 기억되었는지를 강조한다. 여기에는 신약성서가 베드로에게 부여한 중요성도 포함된다. 베드로에 대한 준거적인 기억이 솟아나는 과거가 이 으뜸가는 인물과 늘 엮어왔던 유기적인 관계의 존속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하느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와의 살아 있는 관계가 베드로에게 부여된 몇 가지 권한보다 훨씬 중요하다. 비록 초대 공동체들이 때로는 베드로가 남긴 흔적을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베드로의 면모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 베드로는 이 지고한 말씀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고 그는 신도들과 주님 간에 엮어진 관계에 늘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실제로 요한은 시몬이 게파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음을 상기시켜주고(요한 1,42) 갈라 2,9의 바오로와 함께 베드로의 이름을 아람어로 전해준 유일한 인물이었다. 한편 게파는 다른 돌들이 덧붙여질 건축물의 첫 번째 돌을 의미하지 않고 바위를 뜻한다. 물론 그는 엄격한 의미로 머릿돌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이다(1고린 10,4; 1베드 2,8). 베드로는 굳건한 바위로서 그것 없이는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마태 7,24 이하) 건축물이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베드로는 결코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 성서의 제한되고 동시에 본질적인 이 영역에서 베드로에 관해 이처럼 주석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후대의 베드로 전승의 가치를 미리부터 판단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마태오 교회 같은 일부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입장을 처음부터 선입견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더욱더 아닌 것이다. >---- >-샤를르 페로, 《예수 이후-초대교회의 직무》, 가톨릭출판사, 2002, 144-149p 이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복음서 이후의 요한계 교회에서 베드로의 사목적 위치를 인정하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나,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자신들의 공동체와 사도계 교회를 별개의 그룹으로 간주하였으며, 복음서 독자의 관점에서는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를 더욱 우월하게 보았다고 간주한다. >우리는 다른 형태의 추종자들과 제자들에 대한 일련의 장면들로부터 요한 공동체가 적어도 두 형태의 그리스도인들, 곧 베드로나 아마도 공관복음서 전승에 비교할 만한 신앙을 가진 소박한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성육신으로서 예수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발전시킨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나는 이 진보된 형태의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바로 성령이 처음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로 그리스도인들을 이끌어 주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는 첫 번째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명백하게 규정된다. 니고데모와의 토론 주제였던 예수에 대한 더 높은 이해는 단지 성령에 의해서만 접근이 가능하다. 요한 해석학의 마지막 단계는 인간이 성령에 의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가정한다. >---- >게르트 타이센, 『복음서의 교회정치학』, 대한기독교서회, 2017, 202p > 또다른 그룹은 열두 제자들로 구성된다(요 6:67), 이 그룹의 대변자는 베드로이다(요 6:68).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기를 거절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베드로와 열두 제자로 상징되는 보다 바람직한 그리스도인들의 목소리를 여기에서 듣고 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 > >베드로와 열두 제자가 요한 공동체와 구별되는 한 그룹의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문맥상 '한 그룹의 그리스도인들로'가 타당한 것으로 보이나 번역서 그대로 인용] (숨은 그리스도인과 부적절한 신앙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을 제외한) 모든 그리스도인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는가? 그 질문의 해답은 베드로와 요한 공동체의 영웅인 사랑받는 제자 사이의 일관성 있는 의도적인 대조이다.[*원주49 요한이 이 영웅을 사도가 아니라 제자로 부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요한에 있어서 제자직은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범주이다. 사도적 사명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가까움이 권위를 보장해 준다.] 그를 언급한 여섯 구절 중에 다섯 구절에는 사랑하는 제자와 베드로가 분명히 대조되어 있다. 요한복음 13:23~26에 의하면 사랑받는 제자는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고 있던 반면 베드로는 그에게 머릿짓을 하며 예수님을 배반할 자가 누구이지 알려 달라고 요청한다. 요한복음 18:15~16에 의하면 사랑받는 제자는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예수님과 동행한 반면 베드로는 그의 도움 없이는 들어갈 수 없었다. 요한복음 20 : 2~10에 의하면 사랑받는 제자는 무덤으로 달려가는 도중 베드로를 앞지른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본 것에 근거해서 믿게 되었다. 요한복음 21 : 7에 의하면 사랑받는 제자는 디베랴 호숫가에 서 계신 예수님을 알아본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그가 누구인지 말한다. 요한복음 21 : 20~23에 의하면 베드로가 사랑하는 제자의 운명에 관해 물을 때,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는 말을 듣는다. 사랑하는 제자가 십자가 아래 있었다는 여섯 번째 구절(요 19:26 - 27)은 그 대조가 암시적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간 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요 16 : 32). 이와 같은 대조는 우연일 수 없다. 특별히 여러 장면에서 요한이 대조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사랑하는 제자를 덧붙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열두 제자들 중에 가장 유명한 제자를 그들의 영웅과 대조함으로써 요한 공동체는 베드로와 열두 제자를 공경하는 교회들, 곧 사도계 교회들과 자신을 상징적으로 대조하고 있다. 사도계 교회들을 다른 학자들이 '공교회'라고 부른다(2세기 교회는 점차적으로 오순절과 장로교가 상호 인정된 공동된 구조를 갖게 됨에 따라 보다 가까워지기 때문에 나는 이 용어를 선호한다). > >사도계 그리스도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요한의 태도는 어떠한가? 그들을 진단하는 장면(요 6 : 60 - 69)은 근본적으로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사도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더 이상 따르지 않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분명히 구분된다. 마지막 만찬 시에 열두 제자가 참석한 것(요 13:6, 14: 5, 8, 22)은 사도계 교회에 예수님이 끝까지 사랑하시는'자기 사람'을 포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요 13:1). 그들의 조상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 중에 있으며(요 17:6), 그들이 세상에 의해 미움을 받기 때문에(요 17:4),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요 17 : 9,20),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요 20 : 19, 24, 21:2). 그들의 가장 유명한 대변자인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요 21:19).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복음서에는 일반적으로 이름이 밝혀진 제자들, 그리고 특별히 시몬 베드로가 사랑받는 제자와 비교될 때 보았던 바와 같이, 이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지각의 온전함을 구현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이 수난당할 때 그를 버리고 흩어졌지만(요 16:32), 사랑받는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아래에 남아 있었다(요 19:26-27).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한다(요 18:17. 25). 이것은 특히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범주인 제자도에 대한 요한의 강조 사항을 수용하기를 강하게 거절한 것과 동일하다. 그는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 예수님에 의해 회복될 필요가 있었다(요 21:15-17). 그와 같은 질문과 회복은 가장 뛰어난 제자인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제자의 경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의 생전(요 13 : 23)에, 그리고 그가 죽임을 당할 때(요 19:26 - 27) 예수님 곁에 가까이 있었던 사랑받는 제자는 베드로가 아직 깨닫지 못할 때 빈 무덤에 남겨진 옷의 의미를 알았다(요 20 : 8-10). 그는 또한 베드로가 알아보지 못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다(요 21:7). 사랑받는 제자에 의해 대표되는 요한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자신들이 사도계 교회들의 그리스도인들보다 지각이 뛰어나며, 예수님과 더 가까이 있는 것으로 인정된다 >---- >레이몬드 E. 브라운, 『요한 교회의 신앙과 역사』, 한국장로교출판사, 2013, 93-96p 아울러 교황수위권의 전제가 되는 [[주교|직분]]과 [[사도전승|교회론]]이 요한 공동체에서 적어도 초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가톨릭-개신교를 막론하고 비평학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다. >1) 베드로는 예수에 의해서 좋은 목자가 된다. 예수는 그에게 세번에 걸쳐 말한다. “내 양을 먹이라.”(21:15-17) 베드로는 특정한 기독교 회중의 모범적인 지도자이다. Tourivetv와 ‘TouvLov' 이라는 단어는 베드로전서와 사도행전에서만 발견되지만, “목자”는 교회 지도자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다.(엡 4:11; lgnatius, Rom, 9:1, Ignatius, Pbld, 2:1, 벧전 5:21, 행 20:281.) 의심할 것 없이 베드로는 한 공동체의 지도자로 임명된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가 그 공동체에서 지도자의 자격으로 그의 “양떼"(21:15.)를 사랑해야 한다는 점과 그 공동체의 연합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21:11), 반드시 순교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21:18f.) > >2) 요한서신에서 우리는 권위를 주장하는 두 인물을 만나게 된다. 요한 2서와 3서의 저자인 장로 요한은 멀리 떨어져 있는 회중에 대해 권위를 주장한다. 그는 추천의 서신(요한 3서)과 교훈의 서신(요한 2서)을 각각 그 회중에게 보낸다. > >3) 이 회중들 가운데서 요한은 디오드레베라고 불리는 반대자의 저항을 경험하게 된다. 그 사람은 “으뜸되기를 좋아하는”사람으로 성격화된다.(요 3:9) “장로”와 그의 적대자인 디오드레베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 >이 점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우리는 권위를 결여하고 있는 구조와 만나게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친구이다. 모든 이들은 직접적으로 예수와 연결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유일한 권위를 가진 단 하나의 인물들을 - 예수 자신이나, 베드로, 혹은 장로나 디오드레베 - 선호하는 경향과 만나게 된다. 요한 공동체는 일종의 '단일 권위적 사회적 환경(monocharismatic milieu) 곧 한 명의 권위적 인물을 요구하는 경향을 띠고 있는 사회적 환경을 갖고 있었다. 이 인물은 공식적인 권력 없이 충성심을 창출할 수 있는 카리스마적 인물임에 틀림없다. 예수의 유일한 권위를 채우기 위해서는 단지 단 한 사람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사회학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권위구조를 거부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단일 권위적인 성향을 발전시키는것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제도화되어 연속성이 있는 권위 구조가 결여되면 카리스마적인 한 인물로 이러한 '부재'를 채워야 하는 필요가 생겨난다. > >우리는 단일 권위적인 권위를 누린 인물 하나를 추가할 수 있는데,그는 바로 안디옥의 감독인 이그나티우스이다. 그는 요한복음서가 처해있는 사회적 환경과 유사한 환경에서 살았다. 우리는 이를 요한복음서6:52 이하에 나오는 성만찬 본문과 이그나티우스가 같은 단어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론할 수 있다. 양자는 모두 “육”과 “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양자는 또한 같은 단일 권위적 성향을 공유한다.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여행하는 도중에 그가 방문한 공동체들이수용할 수 있는 단일 주교권(moepiscopate)을 얻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그나티우스는 이러한 경향을 부제(deacon) 및 성직자(priest)들과 같이 전통적인 권위 체계들과 연결하였다. 결국, 그는 세 권위 체계의 고전적인 모델을 발전시켰다. 위계 질서상 꼭대기에는 한 명의 주교가 있고, 이를 뒤따르는 장로(presbyters)와 부제 그룹이 있다. 예수의 권위 외에는 권위 구조를 거부하는 요한의 단일 권위적 사회적 환경이 단 한사람의 주교권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것은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약 예수가 유일한 권위라면 그는 어떤 권위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거나 아니면 단지 단 한 명의 권위에 의해서 대체된다. > >그러나 요한은 이러한 발전을 거부했을 것이다. 요한복음서 안에서우리는 예수를 잇는 세 명의 계승자를 본다. 그들은 일련의 이야기에서소개된다. 첫 번째는 보혜사( 14:16f.)이고, 다음에는 애제자(19:26f.), 그리고 마지막에는 베드로(21:15ff.)이다. 이 흐름은 위계 질서를 상징화한다. 예수의 진정한 계승자는 보혜사이다. 예수 자신이 첫 번째 보혜사이고, 성령을 “다른 보혜사로서 예고한다.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네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6-17) > >모든 그리스도인은 직접적으로 성령에게 접근한다. 그는 영원히 그들 안에 거주한다. 어떤 주교도, 어떤 위계 질서도 성령을 영원히 줄 수 없다. 두 번째 계승자는 애제자이다. 십자가에서 애제자는 예수가 그의 어머니에게 말한 바에 따라 마리아의 아들로 소개된다. >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19:26f.) > >애제자는 제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십자가 장면에서 등장하는 제자이다. 예수가 예언한 대로 다른 모든 제자들은 “흩어져서 제각기 자기 집으로 갔고, 모두 예수를 혼자 버려 두었다.(16:32) 이 애제자는 요한 복음서의 저자인데, 그는 예수의 중요성에 대해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복음서를 썼다. 애제자는 성령의 다스림에 대한 증인이며, 그 자신은 요한복음서 안에서 영원히 현존한다. 예수의 마지막 계승자로 소개되는 인물은 베드로이다. 그는 예수와 같이 양들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목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애제자에게 종속되어 있다. 예수는 그에게 묻는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리고 이에 베드로는 대답한다. “예, 주님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당신은 아십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질문을 두 번이나 더 반복한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21:15-17) 예수가 세 번에 걸쳐 거듭 묻는다는 사실은 베드로의 세 번에 걸친 부인을 기억나게 한다.(18:17, 25, 27) 다른 모든 제자들은 예수를 떠났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예수를 부인하지는 않았다. 베드로는 예수를 따랐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부인했다. 요한복음서의 독자들에게는 의심할 바 없이 애제자가 더 우월하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를 떠나지도 않았고 그를 부인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 >이 세 계승자에 대한 일련의 소개는 무엇을 의미할까? 나는 복음서 기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곧 예수의 가장 중요한 계승자는 성령이다. 성령은 기독교 회중 가운데 최고의 권위자가 된다. 애제자는 두 번째 권위를 상징한다. 이는 성서이다. 교회 조직(베드로와 같은 목자들)은 세 번째 권위인데, 이는 분명하게 예수와 성령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는 성서에 종속된다. 요한은 성령과 성서로 기독교 회중 가운데 있는 권위자들을 통제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었다. 요한은 성령이나 성서(곧 그의 복음서)가 우월한 규범이며 통제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요한복음서가 교회의 권위자들에 대한 하나의 안내(guide)가 될 것이라 믿었다. 다른 복음서 기자와 같이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교회의 지도자로서, 아마도 어떤 공식적인 직분을 갖지 않은 채로 기록하였던 것 같다. >---- >게르트 타이센, 『복음서의 교회정치학』, 대한기독교서회, 2017, 208-211p >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요한신학은 당시 다른 기독교 공동체들(사도적 근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에서 강조되었던 직분과 제도의 중요성을 상대화시키고 있다. 은사의 다양성을 수용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호소했던 몸과 지체에 관한 바울의 표상과는 다르게, 요한의 포도나무와 가지들의 표상은 단지 하나의 논점을 강조한다 — 포도나무에 붙어 있거나 예수님 안에 거한다(만일 요한이 은사의 다양성에 관심이 있었다면 바울이 상징적으로 발, 손, 귀, 그리고 눈에 대해 썼던 것처럼 그는 가지들, 잔가지, 잎, 열매에 관해 썼을 것이다). 사랑에 근거한 제자도의 범주는 요한 공동체 내의 어떤 다른 구분의 중요. 성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킨다. 그래서 잘 알려진 베드로와 장로의 목자 표상조차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 라는 조건적인 질문 없이 소개되지 않는다. > >신약성서에 이름이 밝혀진 사도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은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예루살렘의 야고보이다. 이들 모두는 60년경에 죽었다. 그 후 교회의 직분들이 사도들을 계승한 것임을 강조함으로 이들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한 가르침의 공백을 해결하기 위해 이들의 이름에 호소한 교회들은 사도들이 가르쳤던 바를 수정 없이 보존하고자 했다(행 20 : 28 - 30, 딛 1:9, 반 후 1 : 12 - 21). 그러나 사랑하는 제자의 죽음의 문제를 알고 있는 제사복음서는 예수님을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요 14:15 -17) 모든 사람들 안에 영원히 계시는 파라클레토스가 선생임을 강조한다. 그는 모두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한다(요 16:13). > >이그나티우스와 요한은 고 기독론과 성만찬의 문제에 있어서는 유사점들이 많지만, 교회론, 특히 교회 구조에 관해서는 각각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요한 공동체는 직분의 권위로 교리를 통제할 수 있는 권위적인 교회 직분들(장로-감독)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점에서 요한의 교회는 누가복음-사도행정, 목회서신, 마태복음에서 증거하는 교회들과는 차이가 있다. (중략) 요한 그리스도인들이 파라클레토스의 특권들을 감독에게 부여하는 그와 같은 교회론을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분명한 것은 이 교회론이 요한의 전승과는 조화를 이룰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점차 파라클레토스-교사에 의존하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을 때, 요한 공동체는 더 큰 선을 위해서 마지못해 이 제도를 묵인했을 것이다. >---- >레이몬드 E. 브라운, 『요한 교회의 신앙과 역사』, 한국장로교출판사, 2013, 99p,182-183p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