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황수위권 (문단 편집) ==== 정경과 부활절 날짜의 확정 ==== 신약성경의 책들을 수집하는 것이 전승의 업적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학자들은 2세기 말경 사도성과 가톨릭성의 기준을 따르는 가운데 로마에서 신약정경이 확정되었음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준이란 로마 교회가 지닌 고유한 가치와 권위의 힘을 바탕으로 다른 교회들을 통해 지속되어 왔던 기준을 말한다. 다시 말해 사도전승, 더 구체적으로 말해 성경의 정경을 확립하기 위한 기준을 제시하는 로마 교회의 전승이 있었다. [[부활절]] 날짜의 확정에 관해서는 성 [[빅토르 1세]] 교황의 역할이 중요했다. 빅토르 1세는 여기서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발휘했다. 그는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에게 로마가 견지해온 부활절 날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 파문해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교회가 동서로 분열되려는 듯한 사태의 심각성을 본 리옹의 주교 이레네오는 교황으로 하여금 좀 더 온화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했다. 이는 권위있는 행동일 뿐 아니라 분열된 교회들이 로마 교회의 규율에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아시아 교회들은 각 지역의 전통을 이어가고 싶었기 때문에 반기를 들었다. 특히 에페소 대주교 폴리크라테스[* 참고로 가톨릭과 정교회의 성인이다.]는 교황에게 편지를 써서 거부의사를 나타냈는데, 이에 빅토르 1세는 빡쳐서 정말 폴리크라테스를 보편교회의 친교에서 추방을 선언한다. 그러나 빅토르 1세의 행위에 대부분 주교들이 질겁을 했고, 심지어 리옹의 주교였던 이레네오조차 우리끼리 싸우지 말자고 뜯어말려서 유야무야된다.[* 이 당시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절이다.] >성찬 공동체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친교{{{-2communio}}}는 부정적 대립 개념인 파문으로 대응되었다. 친교 서한을 교부할 권리를 지닌 주교는 공동체와의 관계를 거부할 수도 파기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조치는 무분별하게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친교 관계가 깨지면 사람들은 그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계속 따르기를 거부했으며, 그는 스스로 교회에서 떨어져 나갔다. 2세기 중엽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가 아니케투스와 부활절 날짜를 협상하기 위하여 로마로 갔을 때, 두 사람은 의견의 일치를 이룰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레네우스는 그들이 이룬 교회의 일치를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들은 공동으로 성찬례를 집전했습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5,24,17 참조). 로마의 주교는 소아시아 주교에게 성찬례를 주관하게 했으며, 두 사람은 평화롭게 헤어졌다. 후대에 로마의 주교 빅토르는, 소아시아인들이 부활절 날짜에 관한 그의 이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그들을 파문하려 하면서 더 완고하게 대응했다. 소아시아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은 여행 중에 로마에서 더 이상 손님으로 환대받지 못했고, 미사에 참석하지도 못했으며 서신을 주고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여러 교회회의에서 빅토르의 월권에 대한 저항이 매우 격렬하여 그는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340쪽 참조). 빅토르의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이는 로마가 다른 공동체에 명령할 수 있는 우위에 있다는 로마의 권리를 드러낸다. 이론적으로 모든 주교가 동등하기에, 그들은 신앙에 대해 믿을 만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전권과 다른 주교가 이단에 빠졌음을 단언할 수 있는 전권을 지녔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각 주교좌가 특히 신앙에 관한 문제에서 두드러진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방치할 수 없았다. 제국의 수도인 로마가 오랫동안 교회의 주임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특별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당연했다. >---- >-에른스트 다스만, '''교회사 I''', 하성수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7), 276-277쪽 >---- >부활절의 날짜 결정에 관해서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에 많은 저술가가 관여하고, 교회회의가 열렸으며, 빅토르 주교(188~189)가 주도하는 로마 교회와 소아시아 교회가 거의 분열되는 수준에 이르렀다(277쪽 참조). 소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절을 유대인의 파스카 축제를 본받아 니산 달 14일, 곧 춘분 다음 만월이 되는 날에, 그 밖의 교회는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거행했다. 그러나 '14일파'와 '주님의 날파' 사이의 논쟁은 단지 사소한 날짜 차이라는 문제만 아니라 축제 내용의 이해에 관한 강조점을 드러낸다. 사르데스의 주교 멜리톤의 『파스카 설교』(107쪽 참조)가 분명히 밝히듯이, '14일파' 제식은 참된 어린양인 그리스도로 구약성경의 파스카 축제를 회상했다. 이와 달리 '주님의 날파'는 무엇보다도 주간 첫날에 예수의 부활을 회상했다. 이 두 파는 자신들의 부활절 날짜를 지키면서도 상대방의 날짜를 인정했다. >당시 대부분의 교회가 로마의 주교 빅토르의 견해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아시아 교회와의 분열은 피할 수 있었다. >---- >-같은 책, 340쪽 결국 부활절이 통일된건 훗날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황제가 부활절을 통일하는 측의 의견에 힘을 실어준 이후다. 현재 가톨릭과 정교회의 부활절 날짜가 때때로 다른 이유는 가톨릭은 그레고리력을 쓰고 정교회는 율리우스력으로 계산을 하기 때문이다. 이 때 동서분열이 일어날 뻔했다고 주장하나, 동방 교회들도 의견이 통일된게 아니였고, 당시 교회는 당시 영지주의자들, 즉 '''이단'''과 싸우는 것에 주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