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교황수위권 (문단 편집) ==== [[레오 1세(교황)|레오 1세]] 교황 ==== >베드로는 사도의 품위뿐만 아니라 주교의 품위도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끊임없이 그분의 자리에 현존해 있습니다. ... 그가 그리스도로부터 반석이라고 받은 견고함은 그의 후계자에게 계승되었는데, 그 자신이 반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단호한 결단력이 드러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목자의 강함이 나타납니다.[* 레오 1세 강론집 5,4: PL 54, 155.] >주교들은 많고, 목자들도 많지만 이들은 모두 본래 베드로를 통해서 다스려집니다. 그들이 동시에 우선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스려지듯이 말입니다.[* 레오 1세 강론집 4,2] 레오 교황은 로마의 주교가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이유로 보편적인 수위권을 지닌다는 개념을 분명히 드러냈다. 로마 주교는 베드로의 후계자이기에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에 대해 지녔던 유비적인 권위를 다른 주교들에게 요구할 수 있다. 레오 교황에게 지극히 복되신 사도 성 [[베드로]]는 당신의 성좌에서 주재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레오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믿음의 견고함은 영원하다. 그리스도는 이 믿음 때문에 사도들 가운데 첫째 가는 이를 칭찬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믿었던 것은 언제나 존속한다. 같은 식으로 베드로의 인격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임명하신 것은 언제나 존속한다. >(중략) >성 베드로는 자신에게 부여된 반석의 견고함을 언제나 보존하면서 교회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키를 놓지 않았다. >(중략) >그래서 우리가 선한 행위를 하고 올바르게 결정하며 일상의 청원 기도들과 더불어 하느님의 자비에 감동한다면, 이 모든 것은 아직 자신의 성좌에서 권능을 갖고 살아있으며 권위 또한 계속 돋보이는 이가 하는 일과 공로 덕분이다. >(중략) >베드로는 모든 교회에 매일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 이렇게 고백하는 모든 언어는 이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생기를 얻는다. 로마좌의 이러한 권리 요청은 칼체돈 공의회(451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실상 보편적인 의식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칼케돈 공의회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수도원장인 에우티케스는 레오 교황에게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를 네스토리우스파 이단으로 고소했다. 그러나 이는 에우티케스 자신이 총대주교인 플라비아누스 앞에서 이단으로 고소 당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무슨 상황이지?-- 그래서 이 둘은 레오 교황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이에 교황은 449년 6월 14일에 플라비아누스에게 그 유명한 서간 「플라비아누스에게 보내는 교의 교서(Tomus ad Flavianum)」를 쓰게 되는데, 여기서 교황은 그리스도론적인 신앙에 관한 용어들을 명백히 표현하고 있다. 당시 교황은 칼체돈 공의회에 자신의 사절들을 파견했는데, 그들은 630명의 주교들 앞에서 이 공의회를 주재했다. 이 사절 가운데 첫번째 인물은 파스카리누스 주교로서, 그는 '''"모든 교회의 머리"'''인 로마 주교의 훈령에 따라 디오스코로스가 공의회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2번째 회기에서 플라비아누스에 대한 레오 교황의 서간이 낭독되었으며, 이에 대해 주교들은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이것이 교부들의 신앙이며 이것이 사도들의 신앙이다. 베드로가 레오의 입을 통해서 말했다. 교황에 대한 이러한 승인은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이 레오 교황에게 보낸 서간에서 추인되었으며 그들은 여기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당신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당신은 모든 이를 위한 베드로의 목소리의 해설자셨습니다. (중략) 당신은 대리자들을 통해서 모든 교부들의 회중을 이끌고 명하셨으며 당신 지체들의 머리로서 교의에 참된 의미를 가르치고 명하셨습니다. 이를 보고 루트비히(L. Ludwig)는 이렇게 말하였다. >교황권은 1870년이 아니라 이미 450년에 그 정점에 이르렀다. 개신교, 정교회 옥시덴탈리스트 입장에서는 싸움 당사자인 콘스탄티노플과 안티오키아 외에, 알렉산드리아는 가루가 되게 까인 복합단성론으로 나가리 상태였고 이후 [[오리엔트 정교회]]의 기원이 될 상황이었다. >공의회는 그리스도론 교의결정 외에 28개 조항의 교회법 규정(카논)들도 공포했다. 그 대부분은 성직자들 그리고 또한 (이것은 새로운 일이었거니와) 수도자들의 주교와의 결속을 다루고 있다. 사실 당시 규율 없고 마음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교회정치적으로 행동하며 술책을 쓰는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그리스도론 논쟁을 비롯한 많은 싸움에서 특수한 문제거리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공의회는 떠돌이 성직자들을 규제하는 규정들을 공포하여 그들을 주교 감독 아래 두었고, 또 일정한 교회와 결속되어 있지 않은 사람의 서품을 금지했다. 여기서 새로운 점은, 그때까지 교회법적 지위 없는 일종의 "카리스마적" 운동이었던 수도생활이 이제 교회 안에서 제도상의 지위를 보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도자들은 한편 주교들에게 종속되었고 다른 한편 교회적 신분이 되었는바, 이 신분을 멋대로 버리는 것은 파문을 초래했다. 하지만 이런 규정들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특히 서방에서 그랬는데, 거기서는 교황들의 주도 아래 칼케돈 공의회 이래 동방에서 개최되는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들 가운데 그저 신앙과 관련된 것들만 받아들였고 법률적 규정들은 거의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논 28조가 심각한 충돌을 야기했다. > >칼케돈 공의회는 훗날의 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680-81)와 유사하게, 옛 공의회들이 로마의 교도권을 인정한 사실의 한 정점{{{-2 頂點}}}을 이룬다. 물론 여기서 "베드로가 레오를 통해 말씀하셨다" 같은 환호를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된다. 이 공의회가 「레오의 교리서간」을 크게 존중한 것이 교황의 "형식적"(정식) 교도권에 대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단지) 사도들의 신앙과 그 서간의 "질료적"(내용적) 일치에 대한 것이었는가라는 논란 많은 문제에 관해서는, 그런 우악스런 양자택일은 적저하지 않다고 말해야 하겠다. 레오의 서간이 내용에 대한 토론 없이 받아들여졌던 것은 결코 아니었고, 레오 자신도 그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의회가 마르키아누스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아무튼 사람들은 레오에게서 언제나 베드로좌의 보유자를 보았고, 그의 교리서간은 베드로좌의 선포(케리그마)라고 여겼다.[* (책 속 주석)E. Schawartz 등 편 ''Acta Conciliorum Oecumenicorum'' (1914~) II 2 III(20)113,31-8] 로마 교회는 그 안에 사도 베드로의 카리스마가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 교회, 자신이 위탁받은 사명을 레오의 서간을 통해 다시 한번 전범적으로 확증한 교회로 여겨졌다. 그것은, 물론 그때그때 진실됨이 입증되어야 할 것이되, 하나의 좌와 결부된 일종의 카리스마였다.[* (책 속 주석) 참조: St.O. Horn, ''Petrou Cathedra. Der Bischof von Rom und die Synoden von Ephesus(449) und Chalcedon'' (Paderborn 1982); K. Schatz, ''Der päpstliche Primat. Seine Geschichte von den Ursprüngen bis zur Gegenwart(Würzburg 1990) 62-3.] 그리고 로마 사절들이 주장한 견해, 즉 디오스코루스 등의 불법성은 그 핵심이 로마를 거슬러 공의회를 개최했다는 데 있다는 견해 역시 공의회 교부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책 속 주석)E. Schawartz 등 편 ''Acta Conciliorum Oecumenicorum'' (1914~) II 3 I 40; II 3 II (98) 83-4] >---- >Klaus Schatz, 《보편공의회사》, 분도출판사 2005, 80-81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