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본찬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참가했는데 당초 한국 남자 양궁의 개인전 우승은 쉽지 않아 보였다. 32강에서 대표팀의 에이스인 김우진이 충격적인 광탈을 한 데 이어 [[이승윤(양궁)|이승윤]]은 8강전에서 무너졌다. 홀로 남은 구본찬의 8강전과 4강전은 슛오프[* 단 한 발만의 화살을 쏴 과녁 정중앙에서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쏜 선수가 승리한다. [[2012 런던 올림픽]] 여자 개인전 결승에서 [[기보배]]가 8점을 쏴 위기에 몰렸으나 뒤이어 쏜 멕시코 선수의 화살이 더 바깥쪽으로 빠지는 바람에 기보배가 금메달을 가져갔다. 축구로 비유하자면 [[승부차기]]를 팀당 단 한 번씩만 찬다고 생각하면 된다.]까지 가는 말 그대로 대접전이었다. 올림픽 전까지 구본찬의 슛오프 승률은 17%에 불과했으나, 올림픽에선 두번의 슛오프에서 모두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다! 특히 4강전에서 구본찬이 물리친 상대가 국제대회에서 여러 차례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아온 미국의 브래드 엘리슨이었기에 더욱 짜릿했다. 본인도 대표 선수 3명 중에서 자신이 슛오프에서 가장 약하다고 언급했다. 결국 결승에서 프랑스의 장 샤를 발라동을 7-3으로 꺾고 [[https://youtu.be/rzj4FFi7wt8|우승했다.]] 지방 [[국립대학]] 출신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이 때 박채순 감독이 구본찬을 격려하면서 한 말이 그 유명한 [[http://hankookilbo.com/v/b40802e1cb3f447685a16140be8535c3|'너 전국체전 때 금메달 딸 수 있어? 올림픽이 전국체전보다 더 편해.']]였다. 이후 그 해 2016년 [[전국체육대회]]에서 그는 90m 기록경기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개인전과 단체전에서는 떨어졌다. 그동안 [[대한민국]] 양궁은 주로 여자부의 선전에 주로 의존했고 남자부는 미국이 개인전 금메달을 오랫동안 독식하다시피하면서 상대적으로 성적이 좋지 않았었다. 1988년 박성수와 1992년 정재헌의 은메달, 1996년 오교문의 동메달 하나가 최고 기록에 [[콩라인|머물렀었으나]], 이후 2008년 올림픽에서 [[박경모]]가 후배들이 다 탈락한 와중에도 고군분투를 하면서 은메달을 획득한 것을 시작으로 2012년에 오진혁이 개인전에서 처음으로 금메달을 따내면서[* 정작 김법민, 임동현과 팀을 이뤄 출전한 단체전에서는 준결승에서 브래드 엘리슨이 건재한 가운데, 미국에 패배해며 동메달을 받았다. 이 때 중계 마이크를 잡았던 KBS 조건진 캐스터는 "동메달도 한 번 따 봐야 합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좋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실제로 2020년 현재에도 여자 양궁과는 달리 남자 양궁은 그 당시에도 국가 간의 실력 차이가 크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서 남자 양궁은 개인전에서는 상대적으로 메달을 따기가 힘든 구조였던 탓에 [[2000 시드니 올림픽]]과 [[2004 아테네 올림픽]]과 [[2020 도쿄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양궁 대표팀은 남자 개인전에서 단 하나의 메달도 따내지 못했다.] 그리고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구본찬이 화룡점정을 찍으면서 [[대한민국]]이 남녀 통틀어 양궁 단체전, 개인전 금메달 싹쓸이라는 금자탑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여담으로 이 경기 결승전에서 모두 10점을 맞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