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카이 (문단 편집) == 생애 == [[사누키|사누키국]](지금의 [[가가와현]]) 출신으로 일찍이 [[논어]]를 배우고 791년 나가오카쿄의 대학에 입학하여 3교([[불교]], [[도교]], [[유교]])를 두루 배웠다. [[법명]]을 구카이라 한 것은 그 직후의 일이다. 804년 [[사이초]]와 함께 [[견당사]]의 일원으로 [[당나라]]에 가서 유학했다.[* 사이초는 [[국비유학생|국가직속 유학생]] 신분이었지만, 구카이는 사비를 털어 당나라로 갔다.] 구카이는 당나라 청룡사(靑龍寺)에 있던 [[밀교(불교)|밀교]]의 고승 혜과(惠果) 밑에서 밀교를 공부하여 혜과로부터 밀교 승려로서 관정[* 밀교에서 입문자가 밀교수행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입문식이다.]과 변조금강(遍照金剛)이라는 밀호[* 밀교 승려가 스승에게 받는 법호. 속명이나 법명과는 따로 받는 호칭이다.]를 받았다고 한다. 사이초가 805년에 먼저 일본으로 돌아갔고, 구카이는 이듬해(806년) 귀국하였다. 일본으로 돌아간 뒤 구카이는 [[사가 덴노]]의 자문에 응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에서 불교를 배운 구카이와 사이초 두 사람은 처음에는 다소 협력하는 듯 보였으나 끝내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았고[* 평소 구카이의 법을 흠모한 사이초는 그에게서 많은 걸 배우려 했고 제자 한 명이 구카이의 제자로 들어서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러나 밀교 공부를 위해 밀교 서적을 빌려달라고 구카이에게 부탁했지만, 구카이가 "불법을 종이에 담아 배우려는가?" 하며 빌려주지 않자 서운함이 폭발해 결국 교류를 단절했다.], 기어코 사이초는 [[히에이산]]의 [[천태종]], 구카이는 [[고야산]]의 진언종을 개창하여 완전히 각자 따로 길을 갔다. 835년 구카이는 고야산에서 향년 62세로 입적하였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스스로 입적할 날을 미리 예언하고 그날 가부좌를 틀고 손으로 수인을 맺은 자세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942년 [[다이고 덴노]]가 구카이에게 홍법대사(弘法大師)라는 시호를 내렸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홍법대사'의 [[일본어]]식 발음인 고보다이시(こうぼうだいし)로 통할 때가 많다. 일본의 진언종 승려들이나 신자들은 구카이가 입적하지 않고 그저 고야산 오쿠노인(奥之院)에서 선정에 들었을 뿐이라고 믿는다 한다.[* 불교에서는 고도의 명상상태(선정)가 되면 스스로 숨이 끊어지게 하거나 반대로 죽지 않고 계속 살 수도 있다고 여긴다. [[석가모니]]의 직제자 [[마하가섭]] 또한 계족산 밑에서 [[미륵]]이 지상에 나툴 때까지 선정에 들어간 채로 기다린다는 전승이 있다. 그러니까 구카이 또한 이렇게 선정 상태로 죽지 않고 계속 살아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8세기 [[당나라]] 승려 지광(智廣)이 산스크리트어 발음법을 정리하여 실담자기(悉曇字記)란 책을 집필했는데, 구카이가 일본으로 이 책을 가져감으로써 (산스크리트어 발음을 논하는) 실담학(悉曇學)이 성립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https://twitter.com/munjara_03/status/1606968181670969345|한반도계 도래인이라는 설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