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품관인법 (문단 편집) == 고대 중국의 인사제도 == [[춘추전국시대]]에는 대개 부모의 관직과 작위를 자식이 세습하거나, 군주와 개인적으로 알게 되어 특별히 등용되는 형식으로 관리를 채용했다. 춘추전국시대의 많은 인재들의 전기를 보면 연줄을 타고 군주와 대화를 나누고 언변을 드러내 임용되는 일화를 흔히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인재 충원은 비교적 소수에 불과해 정말 실력이 뛰어나고 명망이 높은 소수의 인재들에 한정된 예외적인 사례였다. 선진시대는 대부분의 관직과 작위가 세습되었기에 사회 전반적으로 귀족적이었다. [[한나라]] 시절에는 초창기에는 위와 같은 방법을 따라 관리의 채용 방법은 세습 임용이나 특별 등용 정도였다. 서한 초기에는 임자제(任子制)였다. 이 제도는 관록 2천 석 이상의 관리가 3년간 근무하면 자신의 형제나 아들을 1명 추천하여 낭관으로 올릴 수 있는 제도였다. 그러다 [[한문제]] 시기부터 각 지방에 인재를 '추천'해서 올리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비상설적인 '천거'가 시작된다. 천거령은 여러 차례 반복되다 아예 상설화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향거리선제]]다. [[유교]] 사상에 따라 지방관과 지역사회 내에서의 여론과 인품에 따른 채용을 하는 향거리선제는 기본적으로 군국제로 시작했기에 지방 통제력이 약했던 한나라가 종법적 가족질서와 유교정치를 바탕으로 지방세력을 중앙정부로 끌어들이는 연결고리로 작용했다. 지방 호족의 자제가 천거되어 중앙관료가 되면서 호족들이 중앙정계에서 떨어져나갈 동인을 상실하고, 이것을 유교적 시스템으로 포장하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는 한나라 시대에 일반적인 관리 임용 방법이 되었다. 특히 애초에 지방 호족들의 지원을 받고 시작해서 지방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광무제]]가 [[전한|한나라]]를 [[복벽]]한 [[후한|뒤]]에는 향거리선제가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시기의 향론은 후한의 발달한 경제와 태학으로 대표되는 교육기관을 통한 민간 인재 육성 때문에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한말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안정적으로 작동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지방 유력자들의 여론을 고려해 천거한다는 구조였으니 지방 유력자 자제들만이 천거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고, 선발 기준이라는 것이 유교적 도덕률이 기반이라 검증할 방법이 마땅히 없었다. 그래서 후대로 가면 무능하고 딱히 도덕적이지도 못 한 인물들이 천거된 반면, 유능한 인물이라 해도 악평이 돌면 천거되지 못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이런 점 때문에 조조는 유재시거를 선포하며 '불인불효'도 상관 없다 해서 당대에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호족들이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는 시스템인 향거리선제에도 불구하고 실제 후한의 시스템은 전혀 다른 형태를 보여주었는데, 그 이유는 지방과는 상관 없이 존재했던 중앙권력의 존재, 환관과 외척 때문이었다. 중앙의 황제는 지방에서 올라온 관료들에 대항해 자신의 세력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지방에 권력의 근거를 두지 않는 환관을 중용하고 일부 세력을 외척으로 삼아 자신의 측근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환관과 외척을 측근세력으로 둔 황제권과 지방 호족들이 기반이 된 중앙관료들이 세력 균형을 이룬 것이 후한 초중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일정 시기가 지나자 중앙관료들은 지방 호족으로서의 모습보다는 관료로서의 정체성이 강화되어 중앙귀족의 모습이 더욱 강해지면서 이런 대립구조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권력이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시스템으로 이행되어가던 찰나에 하필이면 황제들이 잇달아 요절하면서 중앙권력을 둔 대립이 벌어졌다. 중앙귀족의 수장의 위치가 된 외척과 환관이 그 예이다. 이 과정에서 강해지던 황제권은 역으로 추락했고, 외척과 환관의 권력다툼에 지방에서 올라온 호족들이 엮이면서 향거리선제도 무너졌다. 특히 [[영제#s-2]] 시기, 부패가 극심해지면서 [[매관매직]]마저 성행하니 사실상 향거리선제는 그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수재로 천거된 이가 글을 모르고, 효렴으로 천거된 이가 부모와 별거하고 욕심이 많으며, 용감한 장수라고 천거된 사람은 닭처럼 겁이 많다"는 [[포박자]]의 글은 천거제를 기반으로 한 향거리선제의 근본적 한계가 이 시기에는 완전히 걷잡을 수 없어졌음을 보여준다.[* 훗날 조선에서 현량과 실시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을때 반대파의 주장이 "한나라도 그거 했다가 거하게 말아먹은거 아닙니까?" 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