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품관인법 (문단 편집) == 시초 == 이미 멈춰버린 향거리선제가 재기 가능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파탄을 맞은 것은 후한 말의 대전란이었다. 향거리선제는 향론(鄕論)을 바탕으로 인재를 채용하는 제도인데, 엄청난 수의 [[민간인]]이 [[서주대학살]] 등의 살육을 당하고, 전란을 피해 다른 지방으로 집단으로 이주하거나, 권력자의 정책에 따라서 '강제 이주'를 여러 차례 당하면서 기존의 향촌 사회는 아예 붕괴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원상#s-1]]을 따라 오환족의 땅으로 이주했다는 인구가 약 10여만 호 이상, 조조와 손권이 [[유수구]]에서 전투 벌일 무렵에는 조조가 강제 이주 명령을 내리자 여강, 구강, 기춘, 광릉의 백성 10만 호가 강동으로 도망쳤다. 이렇게 엄청난 수의 인구가 우르르 이동하니 향촌사회가 기존의 권력구조와 사회질서를 유지하지 못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이러니 향거리선제를 부활시켜 인물을 천거하는 기존 방법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이 와중에 잠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명사들의 인물평이다. [[당고의 금]] 이후에 청담에 포함된 인물들이 자신들의 인맥이나 경험을 통해 지역 인물들을 평가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향거리선이라는 공식적인 루트를 대체한 것이다. 이때의 인물평으로 유명한 것이 '월단평'으로 유명한 [[허정(삼국지)|허정]]과 [[허소#s-1]]이고, 형주의 수경선생 [[사마휘]]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렇게 인물평을 들어 유명해진 인물들이 명사이고, 이런 명사들이 다시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삼국지의 초기 인물 형성 구조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조조]]'''다. 조조는 인물평을 받기 위해 허소를 찾아갔고 갖은 노력 끝에 '치세능신 난세효웅'(〈삼국지 위지 무제기〉 기준), 혹은 '청평간적 난세영웅'(《후한서》 기준)이라는 평을 듣고 기뻐한 것도 이를 통해 탁류에 속해 있던 자신이 청류의 세계에서 명사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태위를 지낸 명사인 [[교현]]이 조조를 높이 평가한 것은 조조가 명성을 얻는 데 아주 크게 작용했다. 겨우 한마디에 뛸 듯이 기뻐한 것은, 명사의 평가를 얻어내지 못하면 몸으로 때우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손견]]은 명사인 [[원술]]의 밑에서 새빠지게 굴러가면서 명성을 얻었고, [[유비]]는 [[공융]]을 도우러 가면서 당대의 명사인 공융이 자기 이름 한 마디 언급해준다고 감격한다. 심지어 [[유요]]는 [[허소]]가 [[태사자]]에게 좋은 평을 내리지 않았다 하여 그를 중용하기를 망설일 정도였다. 조조는 자신이 세력을 세운 뒤로는 일단 여론보다 다소 낮은 관품을 내려 '''즉시채용'''한 다음, 실력을 보고 나서 그에 준하는 관품을 내리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요컨대 일단은 평론을 반영하여 채용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평론만 좋고 실력은 없는 사람일 수 있으니 평론보다는 다소 낮은 자리르 준 뒤 실력을 드러내면 승진시킨 것이다.] 예를 들어 [[순욱#s-1]]과 [[순유]]의 추천으로 [[정욱#s-1]]을 등용하고, 정욱의 추천으로 [[곽가]]를 등용하고, 곽가의 추천으로 [[유엽]]을 등용하고, 유엽의 추천으로 [[만총]]과 [[여건#s-1]]을 등용하고, 만총과 여건의 추천으로 [[모개]]를 등용하는 피라미드 상법 같은 인재 등용이다.[* 다만 이것은 삼국지연의에 있는 내용이고 실제로 이들이 등용된 경위나 시점은 제각기 다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방법은 긴박한 상황에서 인재를 모집할 때는 도움이 되었으나 안정된 사회에서 많은 인재를 끌어모을 때는 그리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한데, 군주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단 한 사람이 전체 영토의 인재를 찾아내고 등용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결국 등용한 신하의 추천으로 또다른 신하를 등용하는 꼴이 되므로 중앙정부와 연줄이 없는 사람은 등용되기가 매우 힘들다. 천거도 알아야 할 수 있는만큼 결국 이 방식은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중앙정부에서 아예 모르는 사람은 등용될 수가 없다는 말이고, 그래서 조조는 반복적으로 구현령을 내렸다. 이 구현령에서 내건 것이 '불인불효 유재시거'인데, 한 마디로 요약해 만일 능력있는 사람이 있어 스스로를 추천해온다면 그 사람에 대한 향론이나 인간적 평판은 무시하고 오로지 능력을 바탕으로 평가해 심지어 '''[[진평|뇌물을 받거나 형수를 범한 자라도]]''' 발탁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교적 틀을 벗어났다는 것만 강조하지만, 간단히 말해 춘추전국시대로의 회귀다. [[모수자천]]을 통해 [[오기(전국시대)|오기]]와 같이 인격적으로 논란이 있는 인물이나 서한 초기의 명신 진평 같이 인물에 대한 악평이 존재하는 인물도 뽑아 쓰겠다는 것은, 군주인 자신이 직접 그 인물을 판단하여 선발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먼 훗날에 황제가 보는 앞에서 사람들이 모여 시험을 보는 "전시"에 조금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러나 구현령은 기본적으로 군주의 인물 보는 눈에 지나치게 좌우되며, 극도로 많은 자천자가 등장할 때에는 군주가 그들을 모두 만나볼 수 없다는 근본적 문제가 있다.[* 즉 다른 말로 하면 공평하고 보편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결국 조조의 구현령은 인재 선발에서 유교적 가치관이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공식 선언 정도로 끝나게 된다. 이조차도 극한 난세였던 후한 말 삼국시대, 그것도 조조가 살아 있을 시절에나 적용되었으며, 위문제 조비 때만 되어도 강하게 뿌리박혀 있던 유교적 정서 때문에 공식적 제도로는 발전할 수가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