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품관인법 (문단 편집) === 양무제의 제도 개혁 === [[남제]] 24년, 특히 명제 이후의 후반기 역사는 유난히 암울했다. 족손의 지위를 빼앗아 제위에 오른 명제는 이전 천자의 근친을 도살했으며, 명제의 아들 동혼후는 즉위하자 혁명 공포증에 걸려 대신을 자주 살해하였다. 형을 살해당한 소연은 반기를 들어 도읍을 함락시키고 동혼후의 동생 화제를 옹립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화제에게서 양위를 받아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이가 양나라 무제이다. 그런데 무제를 관제 면에서 보면 그가 단행한 개혁은 송․제시대의 혼란을 이어받아 정리․재편한 것이기 때문에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송․제의 관제는 위․진 이래의 9품관제가 문란해 지면서 새로운 계제(階制)가 출현했다. 그렇지만 임시적인 선례를 쌓아 갔을 뿐 그 사이에 일정한 방침을 갖지는 못했다. 계급적으로는 문지2품과 한사․한인 사이에 계급의 분리가 더욱 심각해졌고, 귀족제도 귀족적 관료제도 모두 실제 사회로부터 유리되어 가고 있었다. 지방의 도독부, 그 참군과 중앙 정부 및 그 관료와의 상호 관계는 불명확한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들 문제는 조만간에 근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바로 그때 양나라 무제가 그러한 임무를 다했던 것이다. 그는 즉위 초년에 관제 개혁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양나라 무제가 정한 최초의 관제는 급작스럽게 이루어져서 종래의 품과 계 사이의 현저한 불균형을 시정한 것에 그쳤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문란해진 관제는 좀 더 발본적(拔本的)인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요구에 부응해서 나타난 것이 다음 천감 7년의 새로운 제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