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품관인법 (문단 편집) === 진대의 임자제 === 양나라의 장군 [[후경]]이 양나라 무제를 굶겨 죽이고, 이어 즉위한 [[간문제(양)|간문제]]를 죽이는 포학을 일삼는 일이 벌어졌으며, 이후 [[왕승변]]이 양나라 군대의 장수로서 후경을 무너뜨리고 수도인 건강을 회복했다. 왕승변은 [[진패선]]과 패권을 다투어 패배하고, 진패선의 진 왕조가 성립했다. 후경의 난에 의해 강남은 와해되고 각지에 호족의 독립 정권이 할거했는데, 이들을 회유하거나 토벌하여 어떻든 일단 질서를 회복한 것은 진 왕조의 공적이었다. 이 전란 사이에 필연적으로 군벌 세력이 신장되었기 때문에 진 왕조는 귀족제도를 단념하고 군벌적 관료 국가를 형성했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여전히 양나라의 후계자로서 귀족제도를 온존시키고 왕실 스스로도 귀족화하는 경향을 밟아 갔다. 그러나 이 전란 동안에 옛 귀족은 큰 타격을 입었다. 더욱이 조정은 군공을 세운 무장에 대해 관료군 안에 지위를 주어야 하고, 이 일은 필연적으로 귀족제도를 관료제도로 이행시키는 경향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나라 정부에는 후진(侯瑱),후안도(侯安都),장소달(章昭達)․오명철(吳明徹) 등 무장이 교대로 삼공이 되어 내외에 중시되었으므로 그들의 지위를 보증해 주고 환심을 살 필요가 있어서 종전과 같은 귀족제도만으로는 어렵게 되었다. 여기에서 귀족제도와 관료제도의 중간이라 할 만한 임자제도가 법규화되었다. 대개 임자제도는 문지가 낮아서 1대 동안에 고관에 오른 자에 대하여 그 자제에게 관을 주는 제도이기 때문에 관료의 지위를 존중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관료제에 부수된 제도라 할 수 있다. 임자제도를 법제화한 점은 확실히 새로운 경향이다. 왜냐하면 귀족이라는 자는 긴 역사의 퇴적에 의해 생긴 것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비로소 비서랑 기가라고 하는 권리를 획득했기 때문에 한 가문 안에서도 관계유영(官界遊泳) 경쟁에서 패배한 대부분의 집안은 결코 이 은전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풍운을 타고 고관이 된 벼락 출세자도 고위 관리라는 지위에 의해 그 자식을 비서랑으로 기가시킬 수 있는 것이다. 분명이 이것은 귀족주의의 정신과는 서로 용납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국학의 시경제도도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 귀족제도는 아니다. 귀족은 태어나면서 귀족이고, 귀족이기 때문에 그 문지에 맞는 관으로 기가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귀족 문벌의 상하는 정확히 기가관 위에 투영된다. 그 뒤 관위의 승진은 수명이나 운ㆍ불운이나 우연한 사건에 의해 영향을 받으므로 그다지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기가는 선천적인 조건으로 결정되고 영달은 후천적인 조건에 좌우된다고 하는 것이 당시 귀족 사회의 통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귀족 자제도 기가를 위해서 면학에 의해 획득할 수 있는 학업 성적을 시험하는 시경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은 이것 역시 명확하게 귀족주의와는 서로 용납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이다. 남조도 말기가 되면 귀족제도 안에서 새로운 이질물을 창출하게 된 것이다. 이상하게도 북조에서도 그 출발점을 달리 하면서도 수ㆍ당시대에는 이 남조가 걸었던 것과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당대의 선거는 결국 과거와 임자제도의 병용이다. 다만 시대가 바뀌면 같은 임자제도도 그 사회적인 역할을 달리한다. 과거가 관료제도를 대표한다면, 임자는 귀족제도를 대표해서 서로 다투었다. 물론 당나라의 귀족은 남조의 귀족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요컨대 임자제는 보수주의의 대표인 듯한 모습을 드러내였다. 진나라의 치세도 만약 영원히 계속되었다면 이 임자제가 어떤 역할을 했을지 모르지만, 진나라는 얼마 되지 않아 멸망하고 현실의 역사로서 임자제는 오히려 귀족제도 파괴의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도 지장이 없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