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호기사단 (문단 편집) ==== 로도스 기사단 ====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예루살렘 왕국]]이 성지의 영토를 모두 상실하고 [[키프로스]]로 밀려났으며, 이때 구호 기사단도 성지의 거점을 모두 상실하자 당시까지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로도스]]섬을 침공해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근처 몇몇 섬 및 [[소아시아]] 본토의 일부 거점을 확보하고 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계속했다. [[십자군 전쟁]]이 종료된 후 [[교황청]] 및 [[프랑스 왕국|프랑스]] 왕의 손에 의해 철저하게 해체당한 성전 기사단과 달리 구호 기사단은 최전선에서 [[이슬람]]에 맞서는 성채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던 탓에, 성전 기사단의 재산 상당량이 구호 기사단에 흡수되어 [[유럽]] 각지에 지부를 두고 그 세력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다만 티무르가 바예지트 1세를 털 때 마찬가지로 거점 요새인 스미르나를 털린다. 그러다 15세기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세력을 떨치자 이에 반발하여 1세기가량 오스만 제국 선박에 대한 무차별 해적질을 벌였다. 당시에는 '[[이교도]]에게 가한 죄악은 죄가 아니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기사단이 해적질을 해도 통념상 문제가 없었다.[* 이는 [[이슬람]] 쪽도 마찬가지여서 무분별한 약탈이 자행되기도 했다.] 주로 무슬림들을 납치해 [[서유럽]]에 노예로 팔아먹는 [[인신매매]]를 했는데, 한번은 [[투르크족]] 귀족 소녀 2명이 이들한테 납치되어 프랑스로 팔려가 그곳에서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하고 [[프랑스인]] 귀족들과 억지로 결혼을 하는 일도 있었다. 그 밖에도 오스만 [[술탄]] 공주의 유모가 이들한테 납치당해 분노한 공주가 아버지인 술탄에게 구호기사단을 응징해달라고 애걸하여 로도스섬 공방전이 벌어졌다는 소문도 있었다.[* 출처: 바다의 제국들] 이 무렵 기사단의 [[해군]] 전력은 단 7척이었지만, 로도스섬 자체가 [[에게해]]와 [[지중해]] 중간에 걸쳐 있어 시리아나 [[이집트]] 해안 지대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 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요충지였던지라 오스만으로서는 기사단의 해적질이 적잖은 골칫거리였다. 한편 [[콘스탄티노플 함락]] 때 3중 성벽이 신무기 [[대포]]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봤으므로, 대대적 개수 및 중축을 거듭하여 대포 공격도 버틸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어놨다. 그래서 [[메흐메트 2세]] 치세 말기인 1480년에 한 번 시도한 공략은 실패했다. 이때 오스만 군대는 전장에서 바로 길이 5.5미터에 60~75cm 구경을 지닌 거대한 [[사석포]] 16문을 제조할 만큼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었으나, 끝내 구호기사단의 단단한 방어를 뚫지 못하고 패배하였다. 강력한 오스만 군대에 맞서 싸워 요새를 지켜내 승리한 기사단의 명성은 유럽 전체에 알려졌고, 오스만 군대에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절망에 빠져 있던 유럽인들은 로도스 기사단의 승리를 열광적으로 축하했다. 그래서 기사단장도 로마 [[교황]]에게 [[추기경]] 작위까지 받을 만큼, 크나큰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1522년,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술탄 [[쉴레이만 1세]]가 직접 2차 공략을 시도했다.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한 메흐메트도 못했던 로도스 원정에 쉴레이만은 간단한 해법을 내놓았는데 바로 '''[[인해전술]].''' 이때 오스만 제국은 병력 10만, 함선 300여 척을 동원하였는데, 당시 기사단 측 기록에 따르면 온 로도스의 땅이 오스만의 붉은 깃발로 뒤덮였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반면 수비하던 기사단 병력은 기사단원 7백 명에 로도스 주민 7천여 명이었다. 기사단은 [[신성 로마 제국]], [[에스파냐 제국|에스파냐]], [[영국]], 프랑스 등 기독교 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이들은 끝끝내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제국|포르투갈]]은 [[대서양]] 항로 개척에 바빴고, 영국과 프랑스는 왕권 강화에 몰두하던 중이었으며, 그나마 희망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는 오스만과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로 휴전하던 중이었던 터라 도와주질 않았다. 결국 기사단 측은 1년치 식량과 무기 등을 비축한 요새에서 6개월에 걸친 기나긴 [[수성전]]을 벌였다. 이 당시 로도스 기사단은 상당히 뛰어난 기사들이었다. 거의 일당백 수준의 실력자들이었고, 각종 무기에 능했다. 심지어 총도 상당히 잘 다뤘다. 오스만군의 사상자는 무려 1.5만~4.5만 명이 되었지만, 쉴레이만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계속 밀어붙였다. 만약 이때 오스만 군대의 총사령관이 술탄 쉴레이만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오스만 군대가 철수해야 했을 만큼 오스만 군대의 피해가 굉장히 컸다. 그러나 술탄 쉴레이만의 로도스섬을 함락시키겠다는 의지가 워낙 확고해서 추운 날씨와 [[전염병]]의 창궐에 막대한 사상자 속출에도 불구하고 계속 밀어붙였다. 외성이 무너져 내성으로 후퇴해 버티던 기사들에게 쉴레이만은 '''모든 무기와 군기를 가진 채로 섬을 나가게 해주겠으며 섬에 남게 될 주민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보장한다'''는, 점령자치고는 아주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였다. 사실 이때 쉴레이만도 더 격렬하게 싸우기는 힘들었으리라는 게 정설이다. 이 전투에서 [[예니체리]]를 상당히 많이 잃었기 때문이다. 예니체리를 더 잃으면 정치적으로 힘들 수도 있는 탓에, 쉴레이만 역시도 적당한 선에서 협상해서 보내는 게 나은 선택이었다. 섬이 삶의 터전인 주민들은 죽을 각오로 싸울 이유가 없었으므로 항복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격한 찬반 논쟁을 벌였다. 소수 기사들이 결사 항전을 주장하였지만, 결국 주민들의 압박에 밀려 기사단장 [[필리프 빌리에 드 릴라당|릴라당]]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며 성문을 열었다. 1523년 1월 1일, 살아남은 기사단원과 민간인 수천 명은 마지막 행진을 벌이며 쉴레이만이 제공한 배 50척을 타고 명예롭게 베네치아령 [[크레타]]섬으로 떠났다.[* 세계사에서 이런 후퇴는 그리 드물지 않다. 이런 게 가능했던 이유는 협상을 제안한 군주(혹은 사령관)가 자신의 명예를 지킨다는 명분도 있지만,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 다른 적들이 어차피 항복해 봤자 죽을 것이라 생각해 점령군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물자를 정리해 버리고 결사 항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대개 전쟁의 목적은 무력을 통한 요구 사항 관철이지, 적군과 거주민의 목을 싹 다 베는 게 아니니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