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호기사단 (문단 편집) ==== 몰타 기사단 ==== [include(틀:몰타의 역사)] [include(틀:식민제국)] 이후 방랑 생활을 하던 기사단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의 배려로 1530년 [[몰타]]섬을 할양받아 이곳을 거점으로 또다시 오스만 제국과 전쟁에 들어갔다. 카를 5세는 기사단에 형식적인 [[조공]]으로 1년에 한 번씩 몰타산 [[매(조류)|매]] '''1마리'''를 바치라고 요구했다.[* 사실 그냥 공짜로 준거나 다름 없는 1달러 계약이었지만, 기사단은 매년마다 엄선하여 훈련 시킨 매를 마드리드의 왕궁으로 보냈다. 이 조공은 섬에 들어 온 1530년부터 프랑스군에게 쫒겨난 1798년까지 약 200년 넘는 세월동안 이 조공을 단 한번도 빼먹지 않고 지켜졌다. [[대실 해밋]]의 추리소설 [[몰타의 매]]에 나오는 매 조각상은 이 이야기를 모티브를 얻었다.] 원래 기사단은 당시 그리스도교도의 영역이었던 [[북아프리카]]의 [[트리폴리]]를 요구하였으나 신성 로마 제국에서 번번이 거부하였는데, 기사단이 생각했던 최적의 활동지 트리폴리는 1551년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했다. 기사단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일부러 트리폴리에 안 들어갔다는 견해도 있다. 기사단은 당시 유럽 귀족의 자제만 입단을 허용하는 까다로운 규칙 때문에 전투원이 아무리 많아도 1천 명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인원이 모자랐다. 이런 상황에서는 육상전에 강한 튀르크군이 공격하면 순식간에 밀려버렸을 것이다.] 몰타는 이전 거점인 로도스에 비해서 여러모로 열악했다. 거점의 크기를 보면 로도스는 약 1400 km^^2^^으로 제주도의 3/4쯤 되고, 몰타는 약 300 km^^2^^으로 서울의 절반쯤 된다. 대부분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서 토양 또한 척박하여 [[자급자족]]이 힘들었다. 다만 바위가 많은 환경은 수비 면에선 엄청 긍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주변에 보급 기지가 될 만한 섬 하나 없고, 절벽으로 둘러싸여 상륙 지점도 마땅치 않은 데다, 땅이 워낙 좁아서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공격자가 숫적 우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몰타는 로도스와 맞먹을 정도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오스만의 세력이 [[바르바리 해적]]들 덕분에 서지중해까지 넓어지긴 했지만, 이곳은 유럽 국가들의 앞마당이기도 했기 때문에 동지중해 같은 우위를 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스만 측 배들은 최대한 안전하게 가려면 몰타와 튀니지 사이의 해협을 지나가야 했는데,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 중간에 자리잡은 몰타섬은 해협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좋은 위치였던 것이다. 따라서 기사단은 다시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오스만을 상대로 엄청난 해적질을 하며 어그로를 왕창 끌었다. 이때 기사단의 해적질이 오스만을 비롯한 이슬람 세력들의 큰 골칫거리였는지, 몰타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뱀 소굴'이라는 말이 오스만 제국에서 나돌았다고 한다. 동으로는 [[바그다드]], 북으로는 [[베오그라드]], 남으로는 [[아덴]]까지 점령한 정복왕 쉴레이만 1세는 로도스 때와는 달리 본토와 거리가 너무 멀고 치세 말기였던지라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1564년 오스만 황실 선박이 구호기사단에 나포되어 기사단 항구에 전시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술탄은 이를 치욕으로 여겼다. 한편 [[레콩키스타]]에서 승리한 스페인이 눈길을 북아프리카로 돌리자, 스페인과 오스만의 대결은 불가피해졌고, 스페인이 북아프리카에서 이슬람 해적을 몰아내고 거점을 마련하면, 해적들이 오스만에 지원을 요청하여 탈환하는 양상이 펼쳐졌다. 이 과정에서 [[하이르 앗 딘]], 투르굿, [[울루츠 알리 레이스]]와 같은 해적들이 권력을 얻고 부상하였으며, 결국 1560년 [[제르바섬]] 해전에서 이들이 그리스도교 연합군을 [[개발살]]내고 제해권을 확보하자, 여세를 몰아 1565년 3월 몰타섬을 공략하기 위해 각지에서 끌어모은 4만의 대군을 파병했다. 기사단 역시 외부에 나가 있던 기사들을 소집하고 무기와 식량을 비축하며 9천가량의 병력으로 다가올 전쟁을 준비했다. 이는 기사단장이었던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의 공이 컸는데, 그는 젊은 시절 저 위의 로도스 공방전에도 참전하였고 결사 항전을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그때의 치욕을 다시는 겪지 않으려는 듯 요새를 여럿 세우고 전력을 확보하는 것에 광적으로 집착했다. 정보 수집에도 심혈을 기울여서 '''[[코스탄티니예]]의 황궁'''에도 그의 [[첩자]]들이 있을 정도였다. 수천 km 떨어진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원정군이 출범하자마자 기사단이 바로 준비 태세를 갖출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첩보 덕분이었다. 몰타 원정군 총사령관 랄라 무스타파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원정군은 5월에 몰타에 상륙하였다. 랄라 무스타파 파샤는 로도스 때처럼 명예로운 항복을 제시하였지만 초강경파 발레트는 이 섬이 예니체리들의 시체로 가득차게 되면 주겠다며 대놓고 어그로를 끌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무스타파는 기사단을 전부 죽여버리고 발레트는 산 채로 코스탄티니예로 끌고 가겠다며 노발대발했다.[* 이런 오스만에 대한 관점은 [[레판토 해전]] 때도 그대로였다. 심지어는 그리스도교 연합군 총사령관의 지시를 항복으로 잘못 판단하여 명령에 불복종하는 경우도 있었고 싸우다가 승산이 없다 싶으면 그냥 오스만군과 같이 자폭하기도 했다.] 기사단은 결사 항전의 의지로 맞섰기 때문에 오스만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특히 몰타섬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바르바리 해적들에게 시달려 왔던 터라 이슬람에 대한 증오가 하늘을 찔러서 기사단에 자발적으로 협조했고 기사단 군대의 중추를 담당했다. 게다가 전투에서 전사하는 기독교도에게는 [[대사(종교)|전대사]]를 수여하겠다는 교황청의 교서가 내려오자 더 적극적으로 싸웠다. 기사단의 방어에는 약점이 있었는데, 몰타섬의 지형이 험준하다 보니, 기사단은 큰 요새를 건설하지 못해 군대를 작은 요새들에 분산 수용해야 했다는 점이다. 몰타섬의 주요한 거점은 다음과 같았다. 섬 남동쪽에는 폭풍을 피하기 좋은 만이 조성되어 있었고, 이 만 안쪽에는 손가락 모양의 작은 반도들이 튀어나와 천혜의 항구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중 빌구 반도에는 기사단의 항구와 기사단 본부 생 안젤로 요새가 있었고, 이에 인접한 생 리아 반도에는 민간 항구와 생 미카엘 요새, 그리고 만 전체의 입구를 감제하는 스케베라스 산 끄트머리에는 생 엘모 요새가 위치했다. 이와는 멀리 떨어진 섬 중심부에는 주민들의 중심지이기도 한 므디나가 성벽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발레트는 빌구와 생 리아, 그리고 생 엘모에 주요 부대들을 배치했고, 므디나는 소수의 기병대와 민병대에게 방어를 위임해야 했다. 하지만 오스만군 역시 걱정거리가 있었으니, 몰타섬이 당시 스페인 영토였던 시칠리아섬과 가까워서 스페인군이 해상 봉쇄를 뚫고 구원병을 보내면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오스만 본토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물자를 아프리카에서 수송해와야 했으며, 이는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따라서 동원된 함대는 스페인 해군의 움직임 감시, 수송 지원 등으로 바빠 육군의 작전을 제대로 지원해주기 힘들었고, 이 과정에서 해군이 제대로 된 지원을 안 해준다고 생각하는 육군과 압도적인 전력으로도 제대로 된 항구 하나 확보를 못 한다고 생각하는 해군 사이에 심각한 분열이 발생했다. 어쨌든 오스만군은 우선 항구가 필요했고, 따라서 만을 통제하에 두기 위해 생 엘모 요새를 공략했다. 산자락 끝의 작은 요새에 불과했던 생 엘모 요새는 순식간에 요새 외각을 빼앗기고 사실상 시한부 상태에 빠졌다. 이에 절망에 빠진 요새의 수비병들이 항명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나, 오스만군이 해안 봉쇄를 게을리하는 바람에 기사단 본부에서는 자원병을 선발한 후, 야간에 해상을 통해 요새에 증원했고, 요새 내부에 술집과 도박장을 차려 사기를 증진시켰다. 결국 오스만군이 점령에는 성공했으나 한 달에 걸쳐 싸우며 사상자 6천여 명을 내었다. 무스타파 파샤는 "[[알라]]여, 이렇게 작은 요새에 이런 큰 희생을 치렀는데, 더 큰 요새에는 앞으로 얼마나 더 큰 희생을 치러야 합니까?"라며 절망하기도 했다. 물론 기사단 역시 피해가 만만치 않아 천여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으며, 오스만 육군들은 기사단의 항복을 받아주지 않고 포로를 학살했기 때문에 생 엘모 요새에서 살아남은 병력은 운 좋게 오스만 해군에 항복하거나 바닷가 동굴에 숨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격전 끝에 만을 확보한 오스만군은 이제 빌구를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공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한 달여간 대규모의 포격 및 총격을 퍼부었고, 성벽 밑에 갱도를 파내려가 이를 폭파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기사단은 이러한 시도를 막아냈지만, 병력의 손실과 피로, 그리고 성벽 손상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사기가 떨어진 기사단 측 병력 중 오스만에 투항한 병사로부터 방어선의 정보를 습득한 오스만군은 8월 초에 총 공격을 가해 성벽의 일부를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때, 므디나에 주둔했던 기사단 소속 기병대가 오스만 후방에 위치한 본진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불을 지르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 연기를 스페인의 증원군이 도착한 것으로 오인한 오스만군이 병력을 퇴각시키면서, 기사단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이후, 실상을 알게 된 오스만은 므디나를 공격하려 했으나, 므디나 주민들이 민간인과 여자, 심지어 아이까지 병사로 위장시켜 성벽에 세워놓은 것에 속아 공격을 포기하고 병력을 철수시키면서 므디나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시간이 흘러 가을로 접어들자 오스만군은 겨울에 대비해야 했고 본토의 쉴레이만도 증원을 명령했다. 오스만군은 애초에 공성 기간을 길어봤자 4주 정도로 여겼는데, 막상 섬에 와보니 공성은 길어지고 먹을 것은 없었다. 교두보 격인 튀니지는 이들을 지원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오스만 해군은 스페인의 증원군을 막기 위해 넓은 바다를 감시해야 하는 등, 보급에만 몰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이르러선 보급 부족으로 사기가 바닥을 쳤다. 기사단은 포위 직전 가축들을 성 안으로 들이거나 아예 다 죽여버렸고, 곡식도 수확할 수 있는 건 죄다 거둬가고 나머진 모조리 태워버렸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풍족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여 [[성 요한]]의 축일에 대놓고 즐겁게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며 심리전을 펼치기도 했다. 오스만군 역시 자신들의 병력 일부를 야간에 몰래 배로 실어보낸 후, 아침에 다시 입항시키고는 "증원군이 왔다"라며 거창하게 환영식을 벌이는 등 나름대로 속임수를 펼쳤다. 결과적으로 8월 말에서 9월 초가 될 무렵에는, 양 측 모두 기진맥진하였으나, 원군이 오지 않는 한 빌구 함락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사실 기사단은 저번과 같이 서유럽 기독교 국가들에게 원군을 요청했었다. 이번엔 지리적으로 상당히 가까운 거리였으나, 제르바 해전의 상처가 덜 아문 터라 이번에도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 요청을 무시했다. 하지만 공성이 꽤 길어지면서 기사단의 앞마당이던 스페인 왕 펠리페의 신하이자 [[시칠리아 왕국|시칠리아]]의 부왕 가르시아가 8천 병력을 보내왔다. 사실 가르시아는 공방전 직전 반드시 구원을 오겠다는 증표로 자신의 아들을 몰타에 남겨두었고, 실제로 구원군을 보내기 위해 애썼지만, 제르바에서 함대를 잃은 펠리페가 더 이상 배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에 수송선단을 동원하지 못해 지연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구원군을 보내었을 때에는 이미 몰타에 남긴 아들이 전사한 후였다. 어쨌든 9월 6일 증원군이 함대를 타고 시칠리아를 출발했고, 오스만군은 이미 사흘 전에 이 함대를 발견하고 철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오스만군이, 나포되어 치욕의 상징이 된 오스만 황실 선박을 침몰시키려 집중 포격을 가하고, 기사단이 이를 어떻게든 수리해서 띄워놓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마침내 9월 7일 증원군이 몰타섬에 도착했고, 오스만군이 섬을 포기하고 후퇴하려 배에 올라탈 찰나에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증원군 중 [[레콩키스타]] 시절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당한 병사 하나가 오스만 막사로 탈영해서는 '증원군은 기강도 보급도 형편없어 병사들의 사기도 바닥을 친다'라는 사실을 오스만 지휘부에 알린 것이다. 이대로 돌아가 쉴레이만의 분노를 받아낼 자신이 없었던 오스만 지휘부는 도박을 걸어보기로 하고, 배에 올라탔던 병력들을 다시 하선시켜 증원군과 결전을 시도했다. 그러나 탈영병의 정보는 일부만 사실이었다. 증원군은 몰타섬에 도착한 후, 현지에서 소들을 징발해 잡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즉 이제 막 섬에 도착해서 거하게 식사를 한 증원군은 석 달 넘게 고생한 오스만군보다 체력도 사기도 높았다. 증원군의 기강이 형편없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지만, 대열을 형성하고 대기하라는 지휘관의 명령 따윈 거부하고 돌격해버린 증원군을 오스만군이 버텨내지 못하면서 이는 오히려 오스만군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결국 오스만군은 3만 5천이 전사하는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고 해안까지 도망가서 배에 올랐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3개월, 3주, 그리고 3일'''에 걸친 공방전은 기사단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쉴레이만 대제는 패전 사실을 듣고 처음에는 노발대발했으나 어느 정도 정상 참작을 해주었고, '''"내년에는 내가 직접 가겠다"'''라며 이 바위섬에 강하게 집착했다. 하지만 이듬해, [[헝가리]] 전역에서 무리한 출병과 합병증이 겹쳐 결국 사망하였고 몰타섬 정복은 오스만에 영원한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오스만의 악명 높은 해적 제독 드라구트도 몰타에서 전사했다. 섬이 초토화되고 병력의 절반을 잃을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오스만의 포위를 물리친 기사단과 단장 장 드 라 발레트는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들에서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한편 이 공방전에서 라 발레트는 분산된 소규모 요새에서 방어하면 위험할 수 있음을 절감하고는 오스만에게 점령당했던 생 엘모 요새가 위치한 스케베라스산을 통째로 요새화하기로 했다. 그는 이 시공식 때 첫 돌을 스스로 들어 옮기기도 했다. 시공식 3년 뒤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는데, 사후 완성된 이 새로운 중심지는 그를 기리는 의미로 '''[[발레타]]'''로 명명되었고, 오늘날 몰타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후 1571년 [[레판토 해전]]을 계기로 오스만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구호 기사단의 해적 행위도 더욱 극성을 부렸고, 몰타섬은 그리스도교도 노예를 해방하고, 반대로 아랍과 아프리카 노예를 유럽에 공급하는 시장으로서 번성하였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베니스와 나폴리 등 같은 가톨릭 국가 선박들한테까지 해적질을 하면서 사실상 해적국가로 변질되었고 그리스도교 국가들에게도 몰타 해적단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면서 고립되었다.[* 당시 바르바리 해적에는 [[이슬람교]]로 개종한 백인들도 많았기 때문에 멀쩡한 그리스도교 국가 상선들을 나포해서 노예로 팔아먹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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