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가안전기획부 (문단 편집) === [[문민정부]] === 1993년 2월 [[문민정부]] 출범 후 안기부의 민주화를 위해 정치권도, 군인도 아닌 [[김덕]] 외대 교수를 부장에 임명하고 도청팀을 해체하는 한편, 석관동 청사 사진을 공개했다. 1994년에 안기부법을 개정하여 불고지죄와 찬양고무죄 수사 조항을 삭제하고 정치관여죄 조항을 신설하는 등 정치공작에서 손을 뗀다고 했다. 그러나 각 정당이나 언론사 등에 대한 일반 정보의 수집은 여전히 가능할 뿐 아니라 야당이 주장해 온 각 부처에 대한 보안감사제도와 수사권 폐지, 국가안보자문회의로의 정보기획 조정업무 양여 등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국가안전기획부의 과거 수사 관행에 대한 언급조차 없었다. 그런 연유로 1993년 9월 남매간첩단 조작 사건, 1995년 박창희 교수 간첩조작 사건 등의 공안조작 사건이 터졌고, 1995년 <미디어오늘> 창간호에 의하면 국가안전기획부 측이 언론팀을 아직도 존치해 언론 통제를 했다고도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0179|주장했다.]] 위에서 보듯이 초기 개혁조치는 실제로는 2년도 안 되는 폼이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안기부 불법도청 전담팀, 일명 '미림팀[* 이 미림팀이 만든 것이 훗날 MBC [[이상호(기자)|이상호]] 기자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그리고 [[노회찬]] 의원이 폭로한 [[삼성 X파일 사건|삼성 X파일]]이다.]'의 재건 사건이 해체한 지 1년 만인 1994년에 터졌다. 이에 대해서는 안기부장도 몰랐다는 핫바지설과 알고 있었고 적어도 방조했다는 설이 존재했다. 사건 당시에는 김덕 안기부장은 몰랐다는 핫바지설이 유력했지만, 2005년 재조사가 있으면서 김덕 안기부장과 [[황창평]] 차장도 개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해서는 문민정부 초기에는 정권 핵심부가 진짜 국가안전기획부 민주화의 의지가 있었는데, 막상 각종 사건사고와 부정부패 스캔들로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지자 다급해서 안기부 쪽에 "정치공작이던, 뭐던 좋다. 지지율을 끌어올릴 방법을 만들어봐라."라면서 손을 벌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 정치공작 전문가들이 한직으로 밀려났다가 정권 2년차부터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증언들이 있다. 미림팀이 해체된 것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다음부터다.] 반면 김덕은 1994년 12월 23일 개각 후 통일부총리로 임명되었으나, 1995년에 예정되어 있었던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연기하려는 공작을 국가안전기획부 차원에서 벌이던 것이 발각되면서 통일부총리직에서도 쫓겨났다.[* 각 지부별로 '지방선거는 국력 낭비이므로 연기해야 된다'는 여론을 조성하라는 지시 문건을 야당에서 폭로했다. 이에 대해 국가안전기획부는 지방선거 관련한 여론조사를 해보라는 지시였다고 해명하였으나,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민간인 출신인 김덕 안기부장을 불편해한 군과 정보기관 출신들이 일부러 문건을 야당에 흘린 것이란 음모론도 존재한다.] 김덕의 통일부총리 임명으로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장관 시절 [[하나회]] 숙청을 주도하여 김영삼의 최측근이 된 [[권영해]]가 나머지 3년 2개월을 재임했다. 권영해 부장이 취임한 이후 1995년 예산 정치자금 전용과 1996년 안기부법 개정안[* 불고지죄와 찬양고무죄 수사조항 부활. 참고로 같은 날에 노동법 개정안 역시 덤으로 날치기 통과되었다.] 날치기 통과, 그리고 1997년에 [[총풍 사건]] 등 각종 정치공작을 주도하게 되면서 5공 때의 안기부로 리셋되었다(...). 특히 이러한 국내외 정치공작에 권영해 부장과 [[박일용]] 1차장[* 경찰 출신으로서 부산지방경찰청장, 해양경찰청장, 서울지방경찰청장을 거쳐 경찰청장을 역임하였고 경찰청장 퇴임 이후에 안기부로 콜업되어 안기부 1차장으로 영전되었다.[* 당시 안기부장은 부총리급, 차장은 장관급이었다. 참고로 1차장은 국내 파트, 2차장이 해외 파트를 담당했다.] 김영삼의 경남고, 서울대 후배였고 김영삼의 고향 후배이던 [[김기춘]]과도 엮어 있어 6공 때부터 각종 정치공작에 관여한 인물이다. 참고로 부산지방경찰청장 재임 시에 초원복집 사건이 터졌는데 그 자리에 합석했던 인물 중 한 사람이다.]이 개입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논란을 빚었다. 1995년 10월 남산과 이문동 청사를 통합해서 서울 내곡동으로 이사갔다. 당시 내곡동 분지에 자리잡은 까닭은 서울 내에서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곳’으로 이만큼 넒은 땅을 확보하기가 힘들었기 때문[* 이 일로 인해 [[단국대학교]]가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당시 재학 중이던 90년대 초반 학번들 중 소수만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학교는... 자세한 것은 [[단국대학교]] 문서 참조.]이었다. 1996년에 미국 해군정보국(ONI) 군무원 로버트 김이 군사기밀 유출 혐의로 FBI에 체포되자 안기부 측은 미국인 무기 중개상 도널드 래클리프를 1997년 군 기밀유출 혐의로 체포했다. 그 뒤 안기부가 비공식 외교채널을 통해 미국 측에 "로버트 김에게 감형 조치를 내리면 래클리프를 풀어줄 수 있다"고 요청했으나 주한 미국대사 리처드 크리스텐슨은 "그 사람은 간첩 아니니 풀어달라"고 요청하자 법원은 래클리프에게 징역 2년 및 집행유예 4년을 내리고 체포 3개월 만에 미국으로 출국했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1722373#home|#]]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