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공내전 (문단 편집) === 북한군 참전 논란 === 근래에 당시 [[북한군]]이 국공내전에 대거 참전하였다는 주장을 불확실한 근거들을 들어 강변하다가 전공자에게 반박된 일이 있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연구자들마저 현혹시키는 감이 있는데 북한 전문가인 이종석이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반박한 바 있다. 관련 블로거가 강변한 이유는 [[이종석(정치인)|이종석]]을 좌파라고 몰아붙이면서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이종석은 국내에서는 최초로 북한을 진지하게 연구한 학자이며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역임했다. 특히, 논쟁 중에 이종석의 의견을 들고 온 유저들에 대해서 인신공격을 좀 심하게 했다. 비슷한 사례로 이런 것도 존재한다. [[http://panzerbear.blogspot.kr/2010/11/blog-post_21.html?m=1]] * [[북한군]] 병력이 만주에 대거 파견되었다고 하는 1946 ~ 1947년은 [[소군정]]기였는데, 당시 소련은 [[중국공산당]] 지원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 대규모의 병력 지원이 있었다고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 문제를 놓고 국민당 / 미국과 북한 / 소련 간의 갈등 양상이 빚어졌을 텐데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국공내전에 관한 중국 내의 어떠한 저작물이나 증언에도 북한군의 대거 참전을 암시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 북한 측에서도 공식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 바 없다. (이종석, 《북한-중국 관계 : 1945년 ~ 2000년》(중심, 2000년), 69쪽 ~ 74쪽.)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는데 그토록 흔적이 남지 않는다거나 북한이나 중국 측에서 꼭꼭 숨겨야 할 이유가 없으니, 그저 이러한 설은 떡밥 정도로 생각하고 넘기는 것이 현명하다. 북한측이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을 지원한 것으로 밝혀진 것은 병력 제공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간부의 가족들을 피난 시켜준 것과 만주 지역에서 [[국민혁명군]]에 쫓기던 [[중국 인민해방군|인민해방군]]이 북한 지역을 통과하여 안전히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국공내전의 전세 역전이 만주 전역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중국공산당 측으로서는 북한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런 고마움은 후에 [[6.25 전쟁]]에 개입한 것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http://v.media.daum.net/v/20140414205008908|#]] [[http://v.media.daum.net/v/20140714201008023|#]] [[http://v.media.daum.net/v/20140721195008139|#]] [[http://v.media.daum.net/v/20140728194007137|#]] [[http://v.media.daum.net/v/20140804195009886|#]] 물론 [[브루스 커밍스]] 교수에 의하면 실제로 [[8.15 광복]] 직후 북한에 들어오려던 [[팔로군]] 소속 [[조선의용군]][* 원래는 수백명 단위였으나, [[만주]]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가담하여 수가 사단급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중일전쟁]]이 한참 진행될 때 [[일본군]]으로 강제징병되었다가 [[학병]]들 중에서도 이 [[팔로군]]에 가담한 이들이 꽤 되었다. 대표적인 이가 [[신상초]].]이 소련군에 의해 설득되어 국공내전에 참전한 사례는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이 시점에서는 절대 조선 인민군이 아니었으며 당시의 남한 지역에서는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나온 것과 같이 마치 중국계 군사력을 소련계가 막은 공산당의 주도권 다툼으로 선전되었으나 실제로는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측이 이들을 설득시켜 참전하도록 한 것이다. 이들은 인민해방군 내에서도 정예 부대였으며 어려운 임무에 우선적으로 투입되었다. [[http://v.media.daum.net/v/20140901195005146|#]] 그리고 국공내전이 끝나자 1949년 말에서 1950년 한국전쟁 직전까지 조선인들로 구성돼서 국공내전에서 싸웠던 인민해방군 사단들이 조선인민군에 편입된다. 당시 소속 부대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상부에서 부대가 이동한다고 해서 기차에 탔는데, 내려보니 북한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리자마자 바로 조선인민군 군복으로 갈아입으라는 명령을 들었다. 6.25 전쟁에서 남침의 선봉이었던 조선인민군 4사단과 6사단이 바로 그런 식으로 전환된 사단이다. 그 외의 사단에도 일정수의 전직 인민해방군이 있었다. 이들은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6.25 전쟁]] 초기에 맹활약을 했다. 대전에서 미군 24사단을 패퇴시키고 딘 소장을 포로로 잡은 부대가 바로 이들 부대였다. 제4사단장 [[리권무]]와 제6사단장 [[방호산]]은 모두 인민해방군 출신이다. 간단히 말하면 인민해방군 → 조선인민군 테크를 탄 것이지, 조선인민군 → 인민해방군 테크가 아니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위의 모 블로거가 한 주장은 앞뒤를 착각한 주장이라고 보면 된다. 참고로, 코민테른의 1국 1당 원칙, 즉 "한 나라에는 국적과 민족 불문하고 1개의 공산당만을 인정한다"라는 원칙에 따라 1930년대 중국에서 활동하던 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중국공산당]]에 입당해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그 이전에는 조선공산당 만주위원회가 존재했으나, 1930년대에 코민테른이 1국 1당 원칙에 따라서 "중국에서 활동하는 모든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라"는 결정을 내린다.] 비록, 소속은 중국공산당이었지만 항일[[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들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활약한 이후, 중국과 북한 수뇌부의 합의에 따라 1945년 [[8.15 해방]] 이후 순차적으로 북한으로 귀국해서 [[조선인민군]]의 주축이 된다. 그리고, 2군단장 [[김무정]]을 위시한 이들 [[인민해방군]] 출신들은 풍부한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6.25 전쟁]]에서 맹활약한다. 그러나, 전후 김무정을 위시한 리권무, 방호산 등의 인민해방군 출신 장교들은 [[8월 종파사건|김일성에 의해 대부분 숙청당하고,]] 주소 대사를 지내던 [[리상조]]는 소련으로, [[리필규]], [[서휘]], [[윤공흠]], 김강 등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홍순관 등이 추가로 망명하여 총 11명이 중국으로 넘어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