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대회 (문단 편집) === [[국부천대]] 이후 === 그러나 [[중국공산당]]에 밀려 점점 대륙에서 세를 잃어가는 [[중국국민당]]은 '공비의 반란을 토벌한다'는 목적으로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제정해 헌정을 사실상 중단했고, 국민당 정부는 [[국부천대|대만으로 피난했다.]] 공산당은 대만 침공을 벼르고 있었고, [[중국인]]들은 물론 [[미국]] 등의 외국에서도 국민당은 완전히 끝났다는 의견이 대세였기 때문에 수많은 국민대회 대표들이 공산당에 투항하거나 협력했다. 따라서 국민대회 대표의 절반 정도만이 국민당을 따라 대만으로 갔다. [[1947년]] 선출된 국민대회 대표 2963명 가운데 [[국부천대]] 때 국민당 정부를 따라와서 1954년 총통선거에 참여한 국민대회대표는 1573명이었다. 1948년에 선출된 국민대회 대표의 임기가 만료되는 1954년이 다가오자 [[사법원]][* 헌법재판소+등기소+법원행정처 직무를 동시에 다루는 종심법원. 대만(중화민국)의 대법원은 [[대만 최고법원|최고법원]]이라고 하여 사법원의 하위 기관이다.]에서 헌법 28조 2항을[* 매 국민대회대표의 임기는 차기 국민대회개회일에 만료된다.] 근거로 "다음 선거를 할 수 없는 상태에선 현임 국민대회 대표의 임기가 계속된다."고 해석하여 아예 임기를 무기한 연장했다. 이미 1948년 선거로 국민대회 대표들을 장제스 지지자로 채워놨으니, 국민대회는 [[장제스]]가 살아있는 한 그를 총통으로 뽑아 그의 독재를 뒷받침하는 데 악용되었다. 1대 총통 선거에서는 3당에서 모두 후보를 냈고, 2대 선거에서는 [[중국국민당]]과 민주사회당만 후보를 낸 가운데 두 선거 모두 장제스가 90%와 96%로 당선되었다. 국민대회에서 총통을 선출하던 초창기 규정은 1차 투표에서 전체 의석의 과반 득표자가 나오면 결선 투표 없이 당선이었는데, 2대 선거에 참여한 국민대회 의원은 1,573명으로 전체 의석 수 3,045명의 절반을 살짝 넘겨서 1차 투표에서 장제스가 압도적인 득표율을 얻었으나 2차 투표까지 가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자 형식적으로 선거처럼 보이던 총통선거도 1960년부터 1990년 총통 선거까지는 국민당 후보만 단독 출마한 가운데 국민대회를 통해 간선제로 치러졌다. 시간이 갈수록 대표들이 하나씩 둘씩 세상을 떠나 1960년 총통 선거엔 1576명, 1966년엔 1488명이 참여하는등 계속 줄어들다가 1969년부터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했지만, 이마저도 1기 국민대회 대표의 보궐선거 및 증원선거였을 뿐 국민대회를 전면적으로 새로 구성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타이완성]]과 [[푸젠성(대만)|푸젠성]] 일부, 해외 선거구에서만 선거를 하다보니 1948년 최초로 구성할 당시의 3045명을 다시 채울 수는 없었고 선거가 불가능한 지역의 대표가 여전히 살아있는 한 임기를 유지하다가 그들이 세상을 떠나면 그 지역의 대표가 공석이 되면서 인원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1972년 총통 선거엔 1374명, 1978년 선거엔 1248명, 1984년엔 1064명, 임기 종료 직전의 1990년 마지막 총통 선거 당시에는 752명만이 남게 된다. 또한 당시 대만은 신규 정당의 설립을 막아서 여당인 [[중국국민당]]과 중국 청년당, 중국 민주사회당 등 관제야당을 제외한 나머지 후보는 모두 무소속이었다. [[1986년]]의 보궐-증원선거 이후에야 정당 설립이 가능해져 이 때 무소속으로 당선된 의원 일부가 [[민주진보당]]을 창당했고 1989년의 마지막 보궐-증원선거에는 이들이 참여하여 관제야당을 제치고 2당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