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국민혁명군 (문단 편집) == 역사 == 1924년 6월 16일에 소련의 원조를 수용한 혁명군의 창설에 [[쑨원]]이 동의하며 창설되었다. 이후 [[장제스의 북벌]] 이후 통일 중화민국의 정규 무력으로 등극한다. 설립 당시 [[육군]]과 [[해군]]으로 구성돼 있었으나 1946년 [[공군]]이 육해군처럼 총사령부를 구축하였다. [[청나라]] 시절에 꽤 장대했던 [[북양해군]]은 [[청일전쟁]]의 여파로 주력함들이 대부분 소멸되었으며, [[광서제|광서]], [[선통제|선통]] 연간에 최후의 군비 확충 시도가 있었으나 [[신해혁명]] 이후로는 증강이 중단된 상태로 군벌 혼전에 휘말려 소모되거나 [[만주사변]] 이후 아예 일본에 투항하는 등 의미 없는 수준으로 쪼그라들었고 국민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군비 배분에서 최후순위로 밀려 [[경순양함]] 2척을 진수하는게 고작이었다. 이렇게 영세했던 국민혁명군 해군은 중일전쟁 직후에 [[장인 해전]]에서 그나마 남은 주력함들도 모조리 소멸하면서 종전시까지 [[일본 해군]]에 의해 씨가 말라서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공군 역시 해군보단 규모가 컸지만 [[일본 육군|일본 육]][[일본 해군|해군]]의 [[육군 항공대|항공]][[해군 항공대|대]]에 크게 밀렸다. [* [[제로기]]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소련이 제공한 항공기와 일본이 중일전쟁에서 사용한 항공기의 성능은 대동소이했기에 소련제 폭격기가 [[일본령 대만]]의 쑹산 비행장까지 날아가서 40여기의 항공기를 파괴하거나 중국 상공에서 벌어진 교전에서 일본군에 적잖은 피해를 입히는 등의 전공은 있었다. ] 2차 국공내전 중인 1947년 1월 1일에 "[[중화민국 국군]]"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중국 국민당의 당군이 아닌 중화민국의 [[정규군]]이 되었다. 중일전쟁과 2차 세계대전 당시 [[정보기관]]으로는 [[남의사]], [[CC단]]이 있었다. [[한국광복군]]을 비롯한 중국군 출신의 [[독립운동가]]들 다수가 국민혁명군 출신이다. [[장준하]]도 [[일본 육군]]에서 [[탈영]]한 뒤에 국민혁명군 [[준위]]로 일했다. 그리고 광복군으로 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및 해방 후 [[대한민국 국군]]에서 모두 장성으로 활약했던 [[김홍일(군인)|김홍일]] [[최용덕]]도 국민혁명군 출신이다. 국부군에서 복무한 조선인들은 해방후 [[한국]]에서 [[군인]]으로도 많이 복무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uhan_german_divs.jpg|width=100%]] 국부군의 장비 중 중앙군 87사단과 88사단을 비롯한 정예교도사단의 장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이 사용하던 장비와 비슷했는데, 국부군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독일군사고문단을 초빙하고 [[텅스텐]]을 비롯한 [[광물]]과 독일제 군품을 거래하면서 대대적으로 독일제 군수품을 수입했기 때문이다. [* 독일을 경계한 [[대영제국]]이 텅스텐과 안티몬의 수출을 제약하자 히틀러 정권은 당시 세계 텅스텐과 안티몬,희토류 생산의 2/3을 차지하던 중국과 우호관계를 구축하려고 했다. ] 북벌 완료와 독일 재무장 선언 이후부터 1938년 중독관계 악화로 인한 독일의 금수 조치 때까지 수입한 독일제 무기는 전쟁 이전에 20개 사단을 무장시키기 충분했고 전쟁 이후에는 10개 사단을 추가로 독일제 무기로 무장시킬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중일전쟁]] 초기 [[장제스]]의 직속 부대는 [[슈탈헬름]]과 [[게베어 1898|Gew98]]의 라이센스 버전인 24식 보총, [[게베어 1888]]의 라이센스 버전인 한양 88식 보총 같은 독일제 장비 및 화기로 무장하였다. 완제품 수입 뿐만 아니라 [[Kar98k]] 소총과 [[MG08]] 기관총 같은 화기는 중국 내에서 독일제 설비를 수입해 자체생산해 신해혁명 이후 지리멸렬하던 보급체계 일원화도 시도했다. [* 독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스토크블랑식 81mm 박격포를 수입해 국산화하고,심지어 잠재 적국이었던 일본의 75mm [[41식 산포]]도 수입하긴 했다. ] 전차와 같은 기갑장비도 [[경정찰장갑차]]와 1호 전차 등, 독일제를 사용한 바가 있다. 독일제 무기로 무장하고 독일 군사고문단이 재훈련시킨 30개의 중앙군 사단은 200만 중국군에서 유일하게 일본 육군의 전투력에 대항할만한 전력이었다. 이들의 전투력은 청나라군이나 북양정부군의 형편없는 전과에 익숙해져 있던 일본군에 적잖은 충격을 줄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 초기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국부군의 주력인 중앙군 대다수가 소모되어 버린 탓에 무기 표준화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퇴색된다. 설상가상으로 독일도 1938년부터 군수품 판매를 중단하고 일본과 방공조약을 체결하면서 국민혁명군은 항일전쟁 중단 위기에 몰리게 된다. 대신 소련이 중소불가침조약과 [[국공합작]]을 대가로 572기의 전투기,폭격기 322대를 포함한 985대의 항공기,소총 5만정,포병장비 1,317문, 전차 82대,차량 1,550대,탄약 1억 6450만발, 포탄 190만발, 대전차포 50문,항공유를 2억 5천만 달러 상당의 차관까지 함께 쥐어주면서 숨을 돌린다.[* 소련이 1941년 4월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하면서 이때부터는 군사원조가 감소했다.] 중일전쟁 중 중소의 밀월관계는 [[독소전쟁]] 발발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스탈린 정권이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고문단을 철수시키며 중단된다. 소련의 원조가 지속되는 동안 소련제 무기와 군사원조는 중국의 항일전쟁 노력을 지탱했다.[* T-26 경전차, BT-5 등의 기갑차량과 항공기 및 20개 사단이 무장할 장비를 공여. 소련 공군 파일럿들 역시 의용군 신분으로 참전했다. [[바실리 추이코프]] 등의 후대에 명성을 날린 소련군 장교들도 이때 고문단 신분으로 중국에서 복무했다.] 국민혁명군에 대한 소련의 원조 재개는 독일이 무기 수출을 중단한 이후부터 독소전쟁 발발 이전 사이의 기간 동안 사실상 유일한 무기 출처가 되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국민혁명군은 소련의 원조로 상하이와 난징에서 입은 막대한 피해에서 빠르게 회복하고 전쟁을 지속했을 뿐만 아니라 대반격 시도까지 벌일 수 있었다. 우한까지 함락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1939년 동계공세작전]] 등의 반격은 이러한 소련과의 관계 개선 없이는 불가능했다.[[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atena02&logNo=222069369729&referrerCode=0&searchKeyword=%EC%A4%91%EC%86%8C%ED%95%A9%EC%9E%91|#]] 중일전쟁 후반에 가면 남아있던 독일제 장비, [[국공합작]] 대가로 독소전 직전까지 계속 공급된 소련제 장비들과 공여받은 [[리-엔필드]] 나 브로디 헬멧 같은 영국제 장비[* 북벌 이후부터 수십만개를 수입해 지방군의 철모로 보급했던 전적이 있다.] , [[스프링필드 M1903]], [[M1 카빈]], [[톰슨 기관단총]] 등의 미국제 장비, 노획한 일본군 장비가 짬뽕되어 있었으며, 이 지리멸렬한 [[장비]]들에 부실한 [[보급]]체계, 전혀 개선되지 않은 [[지휘관]]들의 [[무능]], 부패와 그에 말미암은 사기 저하까지 더해져서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의 [[인민해방군]]에게 대패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사실 항전 초기에는 독일제 무기와 장비,항전 중반부터 독소전쟁 발발 때까지는 소련제 무기와 장비,독소전쟁 이후에는 미영이 원조해준 장비로 나름대로 일원화를 시도했지만 무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탓에 일괄적으로 도태시키지 못하고 혼재되어 쓰인 면도 있다. 육군과 공군의 [[군복]]으로 [[중산복]] 형태의 [[옷]]을 사용하였다. 일본의 [[국민복]]과 비슷하게 윗주머니 2개, 아랫 주머니 2개, 단추 5개에 옷깃이 세워져 있는게 특징이다. 전간기 [[소련군]]을 모방한 탓에 북양정부군 시절과는 다르게 견장이 없고 카라장으로 계급을 구분한다. 색상으로 소속을 대강 알 수 있었는데, 장제스 위원장이 직접 거느린 중앙군은 [[카키색]], 국민당군에 편입된 [[팔로군]] 등 군벌들이 거느린 지방군은 [[하늘색]]에 가까운 [[회색]]이었고 중앙군은 [[슈탈헬름]]을 사용하였고 지방군은 브로디 헬멧을 사용하였다. 청회색 군복에 [[오스트리아식 야전모]]와 비슷한 군모를 쓰니 이쪽에 대해서도 아는 밀덕들은 1차대전기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상당히 비슷하게보인다. 군의 [[편제]]와 무장을 모두 통일하는 사업은 [[편견회의]] 이래로 계속 시도된 일이었지만 각 지방의 군벌들의 반란으로 계속 이뤄지지 못하다가 3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겨우 시작되었지만 30개 [[사단]]을 정비하는 데에 그치고 [[중일전쟁]]으로 중단되어 전국의 군대를 통일적으로 정비하는 일을 끝내 이뤄지지 못하여 각 지방마다 군복과 무장이 중구난방이었다. 가령 군복 색깔의 경우 중일전쟁 시기 장제스 휘하 중앙군 중 독일식 사단은 갈색 계통인 반면, 나머지 중앙군은 그냥 [[장제스의 북벌|북벌]] 시절의 군복을 받아 썼다. 그나마 슈탈헬름이나 군장, 탄입대 같은 독일식 보병장비는 통일을 해 줬으나 '''중앙군보다 넘사벽으로 규모가 큰''' --그리고 언제 배반할 지도 모를-- [[군벌]] 지방군은 그런 것도 없어서 그냥 군복[* [[루거우차오 사건]]의 [[쑹저위안]](서북군벌 출신) 휘하의 29군은 남색 군복의 [[장교]]와 하늘색이 섞여 있고, 리쭝런의 제5전구(第五战区)는 청회색인 등 당장 아무리 군벌이라지만 엄연히 중화민국 국민정부 소속인 이들도 군복 색이 통일조차 제대로 안 되었는데 [[http://wanhuajing.com/d44988|팔로군 군복]]은 어땠을 지는 뭐 안 봐도 비디오다.]만 받고 나머지는 군벌들이 각자 알아서 구해다 써야 했기에 탄입대는 커녕 천으로 된 주머니를 줄줄이 이은 것을 탄입대랍시고 썼고 철모는 1차 대전 시절 영국 Mk.2 브로디 [[철모]]를 썼다.[* Mk.2 브로디 철모는 중앙군 일부 병력도 사용하긴 했다. ] 가령 29군이 사용한 것과 중앙군이 사용한 것은 국민당의 심볼을 어디에 붙였느냐도 달랐고 색깔도 차이가 났다.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이 2015년 9월 3일[* 1945년 지나주둔군이 항복한 날짜. 중화민국은 1946년부터 [[휴일]]로 삼았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은 2015년이 돼서야 휴일로 지정했다.] 인민해방군의 대규모 군사퍼레이드를 계획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명목은 중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이라고 하지만, 최근 [[일본]]과의 갈등에 따른 무력시위 성격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화민국에서는 [[예비역]]과 국민당 [[원로]] 출신들을 중심으로 중화민국도 군사퍼레이드를 통해 중일전쟁 승리에 관한 중화민국 정부의 역사상 [[정통성]]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만 국방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http://www.chinawatch.co.kr/chinawatch.php3?_Number=58866|발표했다.]] [[파일:external/stream.org/AP_Taiwan_military-parade__1436013257_70.119.142.63.jpg|width=100%]] [[파일:external/img1.cna.com.tw/201507040019t0001.jpg]] 그 대신 중화민국 정부는 7월 4일 [[신주]](新竹) 근교의 [[연병장]]에서 2차대전 승리 70주년 행사를 거행하고, [[국부군]] 출신 참전용사들을 초청, 국민혁명군 육군 지방군 군복을 지급해 행렬에 포함시켰다. 한국으로 치자면 [[국군의 날]] 행사를 [[서울]] 중심지에서의 시가행진이 아닌, [[계룡대]]에서 거행한 것과 비슷하다. 중일전쟁에서 일본과 맞서 싸운 중화민국의 주력이 양적, 질적으로 모두 국민혁명군었음을 생각할 때, 중화민국 정부에게는 정말 씁쓸한 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