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밥 (문단 편집) == 역사 == 국밥을 국에 밥을 말아 먹는 모든 행위로 간주하여 범위를 넓게 보면, 그 역사는 한국의 식문화의 시작과 그 맥을 같이할 것이다. 그러나 행위가 아닌 하나의 요리의 범위에서 살펴보면 생각보다 오래되지는 않았다. 조선 초기 문신이었던 유순(1441~1517)이 지은 오언고시인 십삼산도중(十三山途中)에 국밥, 즉 탕반(湯飯)이 언급 되는게 최초이다. 그리고 사극에서 묘사된 [[주막]]에서 국밥을 파는 장면은 빨라도 조선시대 중기부터이다. 조선 중기 문신인 윤국형(1543-1611)이 지은 문소만록(聞韶漫錄)[* 일종의 수필집]을 보면 전국을 유랑하며 본 견문중 주막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영호남에 주막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오로지 술과 잠자리를 제공할 뿐, 나머지는 제공되지 않는다고 나온다. 그리하여 많은 여행자들이 개인의 짐을 비롯한 먹거리까지 가지고 다닌다고 나온다. 물론 [[임진왜란]] 시기라 물자가 부족했던 시기였다는 사정이 다소 있기는 하나 실제 다른 문헌들을 찾아보더라도 여행자들은 [[쌀]]이나 [[보리]], [[조(식물)|조]], [[수수]]와 같은 곡식과 [[미역]], [[북어]] 등의 건조식량, 장이나 [[소금]] 따위의 부식을 들고 다니면서 스스로 해결하거나, 민가에 여분의 대가를 치르고 음식을 부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실제로 주모가 음식을 만드는 게 아니라 여행자가 음식 재료를 대고 요리를 해주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가 되어서도 [[한양]]을 비롯한 주요 대도시를 제외한 지방은 화폐를 쓰는 일이 거의 전무했다.[* 옛 전설이나 장례풍습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전통 장례문화에서 저승 가는 삼도천을 건네주는 뱃사공은 쌀이나 떡을 받기 때문에 시신의 입에 쌀을 채워주는 문화가 있었지만, 중국이나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잣돈 하라고 돈을 시신에 함께 묻었다.] 지방에서 돈의 역할을 하던 것은 쌀과 무명이었고, 돈을 내고 밥을 사먹는 행위가 성립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밥을 해먹으려면 최소한 쌀 같은 곡식은 스스로 준비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공업이 그나마 발달하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화폐]]가 향촌 사회에도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서 마을 사이마다 주막이 생기고, 이에 따라 주막이 발전하면서 음식을 제공하는 것 또한 가능해졌다. 조선시기까지는 이런 식으로 사회가 굴러갔다. 우선 어느 보부상이 지방의 특산물을 구매한 뒤 이것을 도성에 팔려고 한다. 이에 보부상이 가다가 밤이 깊어지면 보부상은 인근 마을로 가서 형편이 괜찮아 보이는 집의 대문을 두들겨서 숙식을 요청하고[* 사실은 아무리 행상이라도 낯선 마을을 둘러보고 이 집이 형편이 괜찮아 보이겠다 싶은 집을 찾아 문을 두드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보부상]]과 같은 행상인들은 대부분 자신이 주로 돌아다니는 활동범위가 따로 있었고, 다니다 보면 자기 범위 내에 있는 마을들의 사정은 어느 정도 알게 되고 아는 이도 생기기 마련이었다. 즉 자신이 주로 다니는 경로상에 있는 마을이라면 어렵잖게 신세질 수 있는 집, 그 마을에서 하룻밤 머무르게 될 때 자주 신세지는 집이 있기 마련이었다. (물론 한 집에서 계속 신세지기 미안하고 부담스럽다면 몇 집에서 번갈아 신세질 수도 있었을 터이다.) 그 대신 상인 역시 후술된 것처럼 여러 소식을 전해주면서 특히 그 집안에 요긴한 소식이 없는지 귀기울여둔다거나, 그 집안에 필요할 법한 물건이 있으면 구해두었다가 좋은 값으로 넘겨주는 등 적당히 보답하였다. 물론 모르는 길로 갈 때는 이런 인맥의 힘을 빌릴 수 없지만, 원래 행상이란 주로 자신의 구역 안에서 주로 다니던 경로를 돌아다니니, 모르는 곳을 그냥 떠돌아다니기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특별한 거부 사유가 없다면 집주인은 보부상을 받아들인다. 이후 집주인은 보부상에게 저녁 식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화장실과 잠자리를 내어준다. 애초에 그 집에는 모든 가족 구성원들의 저녁 식사를 위해 음식을 넉넉히 준비해두었었고, 손님 맞이용 방도 미리 마련해두었으니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그리고 집주인은 손님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면서 보부상으로부터 지방에서는 뭐가 제철이고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성에서는 언제쯤 과거시험이 열릴 예정이고 임금님의 평판은 어떤지 등 이런저런 유용한 다른 지방 소식들을 전해 듣는다. 다음날 보부상은 집주인의 호의에 감사를 표하며 다시 길을 떠나고, 집주인은 보부상에게 전달받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자기 집 아들내미를 언제쯤 도성으로 보내서 과거시험을 보게 할지, 만약 아들이 과거에 합격해서 관리가 된 후 지방 감독관으로 파견된다고 하면 어떤 지역이 좋다고 권유할 수 있는지 등을 헤아린다. 훗날 그 집 아들내미가 정보를 바탕으로 과거를 보러 가면 가다가 밤이 깊어졌을 때 인근 마을로 가서 형편이 괜찮아 보이는 집의 대문을 두들겨서 숙식을 요청하고, 특별한 거부 사유가 없다면 집주인은 이 젊은 선비를 받아들여 저녁 식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화장실과 잠자리를 내어준다. 집주인은 젊은 선비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면서 선비로부터 그의 고향과 관련된 이야기나 그의 목적지와 여행 목적(과거 시험)등 유용한 소식들을 전해 듣는다. 다음 날 선비는 집주인의 호의에 감사를 표하며 다시 길을 떠나고, 집주인은 선비에게 전달받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자기 집 딸내미를 어느 집으로 시집을 보낼지, 손주를 언제쯤 과거 시험을 보게 할지 등을 분석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전통에 대해서는 [[접대의 관습]] 문서를 참고해도 좋다. 즉 이런 식으로 여행객들은 가까운 유력자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댓가로 귀중한 정보들을 제공하는 식으로 사회구조가 유지되었고, 그러니 '음식을 돈받고 판매하는' 행위가 존재하기가 어려웠다. 당연하게도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한다면 한상 제대로 차려서 대접하지, 없어 보이는 국밥 한 그릇 따위를 내줄 일은 더더욱 없으니 국밥류가 발달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당대 최고의 해장국으로 명망이 높았던 [[효종갱]]같이 돈 받고 파는 국밥 음식도 있긴 했으나, 화폐가 활발하게 유통되었던 수도권에서나 가능하였지 지방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국밥집의 개념으로 돌아오면 이렇게 조선 후기부터는 [[외식]]이라는 문화가 상공업에 발맞춰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한양에는 수많은 장국밥집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 장국밥집들 중에서 매우 유명했던 곳으로는 19세기에 조선 [[헌종(조선)|헌종]]조차 변복하고 자주 드나들었다는 설이 있는 무교탕반이라는 곳이 있다. 신분의 고하에 관계없이 인기가 좋았던 곳으로 장국밥을 주로 팔았다. 지금이야 국밥이 다양하고, 이 시대의 장국밥은 현대인에겐 맛이 없어 먹지도 않겠지만, 그 당시에는 인기가 매우 좋았다. [[간장]] 또는 [[된장]]을 사용하여 국물의 간을 맞춰 이름이 장국밥인데, 흔히 유행했던 다른 지방의 국밥들이 시래기 등을 가지고 끓인 채소국밥인 반면 이 국밥은 고기를 듬뿍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대로 지속되었는지 아니면 후대인들이 개량을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월탄 [[박종화]] 선생의 표현에 의하면 이 집은 "양지머리만 가지고 국밥을 만들어도 충분한데 젖통 부위 고기를 넣고 또한 갖가지 고명으로 양념한 산적까지 넣어주니 고기와 산적이 어우러져 천하진미가 따로 없다." 하였다. 하지만 이후에 신분이 낮은 사람이나 먹는 음식으로 간주되었던 설렁탕이 특유의 냄새와 푸짐함, 고소함 등을 무기로 [[일제강점기]] 내내 득세하면서 장국밥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해방 이후 물자가 풍족해지면서 [[경상도]]에서 유명했던 [[돼지국밥]]이나 [[전주시|전주]]에서 유명했던 [[콩나물국밥]] 등도 많이 인기를 끌면서 그 외 여러가지 다양한 국밥들이 다양한 변모를 걸쳐 현재까지 이른다. 참고로 [[설렁탕]]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설렁탕은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현재의 [[짜장면]]과 같거나 혹은 못한 수준의 음식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수준이란 음식의 인기가 아니라 그 시대에 이 음식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말한다. 값싸게 먹을 수 있는 [[외식]] 메뉴 중 제일 저렴하지만 누구도 고급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요리였다. 펄펄 끓는 가마솥에 뽀얀 국물을 당시 사람들은 저급하가도 느꼈는지, 식당에 가서 먹기보다는 [[배달]]이 흥하였다. 일례로 [[1929년]]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월간지의 1929년 12월 호에는 설렁탕을 절절히 묘사했다. 짧게 요약하면 '설렁탕집의 주인은 [[백정]]이고 그릇은 [[옹기]] 그릇이라 장국밥에 비해 점잖치 못한 차림새' 때문에 드러내놓고 설렁탕을 한 그릇 먹는 게 점잖은 사람들, 특히 조선이 망하기 전 [[양반]] 노릇하던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또한 [[1930년대]] 당시 [[조선총독부]]의 고시가격에 따르면 [[비빔밥]] 1그릇이 15전인데 비해 설렁탕은 1그릇에 5전이었다. 즉 남는 뼈나 고기 따위를 끓여서 양을 불려먹는 일종의 싸구려 음식이었던 것. 이런 설렁탕의 배달 문화에 대해서는 당대의 사회상을 다룬 [[염상섭]]의 [[삼대]]에서도 몹시 생동감 넘치게 묘사되어 있다.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병화도 종종 사먹을 수 있는 비교적 값 싼 음식이면서, 막 보급되기 시작한 [[전화]]를 통한 주문도 가능했다. 하지만 부잣집 도련님인 덕기가 설렁탕을 먹은 것을 본 지인이 '저런! 설렁탕을 어떻게 자셨소?' 라고 놀라서 한마디 할 정도로 싸구려 음식 취급을 받았던 것. 또한, 해당 작품을 보면 설렁탕을 주문하면 큰 투가리[* [[뚝배기]] 등 [[옹기]] 그릇을 가리키는 [[강원도]]나 남도 쪽 방언.]에 담아서 배달해 주고, 먹는 사람들은 집에 있는 그릇에 나눠 부어 먹고, 식은 설렁탕을 다시 데워 먹기 위해 투가리를 난로에 올려놓는 등 취식 행태도 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배달업을 발달시켜 틈새 시장을 파고든 탓에, [[설렁탕]]은 최초의 [[패스트푸드]]이자 [[짜장면]] 같은 [[배달 음식]]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현재의 설렁탕이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뜨끈하게 한 그릇 먹는 나름 점잖은 식사라고 인식되는 것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다만 그것도 조금 더 이후 세대 생각이고, 60년대생 이전 어른들은 점잖은 음식이란 생각 안 하는 편이다. 그 땐 일단 값이 쌌고, 짜장면보다 훨씬 덜 대중적이었다. 밥과 국을 한 그릇 담아 말아서 내오는 음식이 격식을 갖춘 식사일 리는 만무하고, 장터나 장돌뱅이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 많은 국밥에는 시래기, 우거지, 콩나물 등의 채소, 다양한 종류 및 형태의 고기, 두부, 선지 등이 재료로 들어간다. 이러한 국밥의 재료를 생각해보면, 영양소 측면에서는 생각 외로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등 3대 영양소와 각종 무기질이 제법 균형있게 들어간 괜찮은 음식이다. 국밥의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지방이 포함된 고기가 제법 들어있고, 국물에 밥을 말아먹으니 탄수화물 또한 당연하다. [[국밥충|"OO 먹을 돈이면 차라리 뜨끈한 국밥 든든하게 먹고 말지"]]라는 인터넷 밈이 마냥 농담만은 아닌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