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국부천대 (문단 편집) == 기타 == [[국공내전]] 당시 [[장제스]]의 [[중국국민당]]이 대만으로 패주하면서 [[베이징]]의 [[자금성]] 고궁박물관에 있던 유물 중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유물 29만 점을 위시로 전국 각지의 유물 60만 8,000점[[http://www.npm.gov.tw/ko/Article.aspx?sNo=03001513|(출처)]]을 선발해서 가져갔다. 이 유물들이 대륙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문화대혁명]]으로 박살났을 위험이 크니 대만으로 옮겨둬서 [[결과는 좋았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3년 11월 3일 방송분에서 이 일화가 소개되었다. 비슷하게 자금성에 있었던 [[사고전서]] 문연각(文淵閣)본도 이때 이송해서 [[국립고궁박물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현대 중화인민공화국 입장에서는 통탄할 일이라 국공내전 이후부터 공식적인 입장으로는 "절도한(도둑질한) 유물들 내놔라"고 하는데 [[범람연맹]] 쪽에서는 빨갱이 공산당 불법 정권의 억지 따위 알 바 아니라는 입장이고 [[범록연맹]] 쪽에서는 "늬들 문화재 문혁의 풍파에서 보호해준 것부터 감사해라"라는 입장이다. 사실 그대로 있었으면 [[홍위병]] 손에 박살났을 운명이라는 것은 중국인들도 인정하는 팩트다. 이외에도 유물은 아니지만 중국 역대 왕조가 대대로 우대한 [[공자]]의 직계 적손(嫡孫)으로 제32대 [[연성공]](衍聖公)이자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이었던[*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간단하게 말해 세습 '귀족 작위'가 세습 '[[유교]] 제사부 장관' 정도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 역할은 동일하다.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귀족 작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곤란하기 때문에 형식상 공직으로 바꾼 것.] [[쿵더청]]도 장제스가 대만 섬으로 데리고 건너갔다. [[북송]]이 [[금나라]]에 밀려 회수 이남으로 내려갈 때 [[송고종]]이 중화로서의 정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제3대 연성공 공단우를 함께 데리고 간 것에 비견할 만한 일로, 신해혁명 이래 연성공 작위를 이을 사람이 쿵더청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에 현재는 타이완에서 공자 가문의 종가(宗家)가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대륙에는 북종계의 직계 남성 후손은 없으며 남종 가문[* 위에 언급한 공단우의 동생으로부터 이어진다. 당시 금나라에서도 곡부에 남아 있던 공단우의 동생 공단조를 연성공으로 내세워서 공자 가문이 송나라의 남종과 금나라의 북종으로 나뉘었다. 원나라 때 공자 가문의 정통성을 남종이 북종에게 양보하였기 때문에 공자 가문의 직계 정통성은 북종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혈통상의 정통성은 이들도 갖췄으므로 절강성의 남종 역시 공자에 대한 제사를 허락받고 문중의 대사에서 북종과 상호 협력해 왔다.]과 쿵더청의 누나 쿵더마오(孔德懋)의 후손만 남아 있다.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은 [[중화민국]] 정부의 유일한 세습 공직으로 지위는 특임관(장관급)에 준한다. 쿵더청은 국부천대 이후 고시원 원장, 총통부자정 등의 고위직을 역임했고 쿵더청 사후 제2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을 세습한 장손[* 쿵더청의 장남 쿵웨이이가 일찍 죽어서 한 대 건너서 세습했다.] [[쿵추이창]]도 총통국책고문을 맡고 있다. 중화민국이 들어서면서 유교의 성현인 맹자, 안회, 증자, 자사의 제사를 받들던 직계 후손에게 세습되었던 한림원 오경박사 직위를 각각 아성봉사관, 복성봉사관, 종성봉사관, 술성봉사관으로 개칭해 그 지위를 간임관(차관급)에 준하도록 했는데 국부천대 때 대성지성선사봉사관 공덕성만이 아니라 2대 아성봉사관 맹번기(孟繁驥)와 2대 종성봉사관 증헌의(曾憲禕)도 함께 대만 섬으로 건너가 지성, 아성, 종성 세 봉사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반면 2대 복성봉사관 안세용(顔世鏞)은 대륙에 남았고 술성봉사관은 공덕성의 차남 공유녕(孔維寧)이 맡았다가 2010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복성, 술성 두 봉사관은 폐지되었다. 운남성에서 패배한 국민당군[* 국부천대 이후에도 서창(西昌)에 남아 저항을 이어가던 대본영(국부군 총사령부) 휘하 부대였으며 버마나 태국 등지로 퇴각할 당시 운남 출신이 대다수였다.] 잔당은 [[https://en.wikipedia.org/wiki/Li_Mi_(Republic_of_China_general)|리미 장군]]의 지휘 하에 사단급 병력으로 재편하여 [[동남아시아]]의 [[미얀마]]나 [[태국]]으로 퇴각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통칭 운남 반공구국군) 이들은 CIA의 지원에 따라 반공구국군으로서 운남과 중화민국 수복을 부르짖으며 운남-버마 및 태국 국경지대에 여러 번 혼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주권 침해에 버마가 당연히 유엔에 문제를 제기하여 중화민국 정부에 압력이 가해지고 결국 [[상명하복|장제스가 철수 명령을 내려 리미가 복종함에 따라]][* 대륙에서 막 퇴각해 온 이들이고 엄연히 명령에 따라 반공 전쟁을 지속하는, 즉 이들은 엄연히 중화민국 국군이었고 국군이면 총통으로 복귀한 장제스의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장제스의 명령은 대만으로 퇴각하라는 것이었다.] 대다수 병력은 철수하여 대만으로 이주하였다.[* 첫 철수 명령을 내렸을 때는 미국의 비호와 장제스의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대응 하에 절대다수는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압력이 더더욱 가해지자 결국 최종적으로 철수, 운남 방면군은 이 날을 기해 본토에 공격을 가할 마지막 여력마저 완벽히 상실했다.] 철수 명령을 거부한 이들은 태국과도 충돌을 일으킨 끝에 서로 싸우지만은 않게 되었고 잔당들은 [[아편]]을 재배하여 수입원으로 삼았는데 이는 [[골든 트라이앵글(마약)|골든 트라이앵글]]의 성립에 큰 영향을 주어 [[쿤사]] 같은 마약왕들이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https://joonho1202.blog.me/221437058356|관련 블로그 글]],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170225/83056131/1|기사]],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24928|프레시안 칼럼]] 최후의 잔당들은 [[인도차이나 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혼란기 속에 태국 정부의 지원 하에 적극적으로 반공 항쟁을 했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결국 태국에 귀화하여 태국 국적도 얻었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 들어 대만이 인구감소를 겪어 [[징병제]] 유지가 어렵자 이들의 후손들을 우대해 대만 귀화를 유도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