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한문혼용체 (문단 편집) == 역사 == [[http://contents.history.go.kr/data/img/km/km_037/km_037_342_02.jpg|국한문혼용체가 사용된 선조(宣祖) 언간 (1604년)]] 조선 초기에는 《훈민정음 언해》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자]]와 [[한글]]을 섞어 쓰더라도 한자 옆에 음을 달거나 아예 음 옆에 한자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현대에도 혼용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 괄호를 사용하는 대신 이 방법을 쓰기도 한다. 과거 한국에서 한글은 주로 한문과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문]]과 한글을 모두 아는 선비가 다른 선비에게 글을 보낼 때는 둘 다 한문을 알고 있으니 당연히 한문 문장으로 글을 쓸 것이고, 한문을 모르지만 한글은 아는 아내나 어린이, 아랫사람에게 글을 쓸 때는 상대방이 글을 못 알아먹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한글로 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조선 시대의 왕실에서는 궁이 넓어 아침 문안을 제하면 왕이나 왕족들끼리 전할 것이 있다면 글로 적어 보냈다. 조선 시대에는 공주라고 해도 여자에게 한문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받는 사람이나 쓰는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여성이면 한글을 썼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 양반들이 시조와 가사를 쓰며 한문에 한글을 섞어 쓰는 서체가 많이 퍼지기는 하였다. 1580년에 쓰여진 [[관동별곡#s-2|관동별곡]] 또한 국한문혼용체이다. 1610년의 [[무예제보번역속집]] 또한 국한문혼용체를 볼 수 있다. 참고로 [[한글]] 창제 이전에 공문서에서 쓰이던 [[이두]]문은 그 자체가 한자어를 그대로 두고 문법적 표현으로 이두를 사용하는 혼용문이었으나[* 표기상으로는 다 [[한자]]라서 이두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보면 어디가 이두 부분인지 한눈에 알아보기는 어렵다. 20세기에 개정 출판된 [[대명률]]직해와 같은 곳에서는 이두 표현에 대해서는 윗줄을 그어서 표시해두기도 한다.] 물론 한글이 아니라 이두이기 때문에 이것을 국"한"문혼용체라 할 수는 없다. 근대에는 1895년에 나온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이 국한문혼용체로 적혔다. [[유길준]] 자신은 최대한 국문(한글)을 살려 쓰려 했다고 밝혔는데, 당시 그가 지은 책을 본 사람들은 언문을 섞어 쓴 것은 문장이 아니라며 비웃었다고 한다. 제대로 된 한문이야말로 '''격조 높은 문장'''으로 여겼던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후 [[신문]]이나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에도 간간이 나오고, [[갑오개혁]]으로 국한문혼용체를 쓰기로 규정하면서 사용 빈도가 더더욱 늘어났다. 이 시기를 즈음으로 해서 외세의 침탈에 대한 반작용이나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고유의 글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순한글로 된 신문이나 인쇄물은 물론이고 한문과 한글전용 사이의 일종의 과도기 형태로 국한문혼용체로 된 신문이나 인쇄물들이 등장했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한 신문이나 잡지에서 국한문혼용체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지속적으로 국한문혼용체가 쓰였고 해방 후에도 한자를 많이 아는 것이 지식의 척도였던 것은 매한가지인지라 그대로 이어졌다. 국한문혼용체는 비교적 최근까지 쓰였다.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대학생]] 이상의 식자층은 일상생활에서도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하고 이해했으며, 고졸 이하 학력의 일반인이라도 일상생활에 쓰일 한자로 쓰여진 국한문혼용체는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많았다. 일례로 [[서강대학교]]에서는 1990년대까지 읽기/쓰기 교양 수업에서 독후감을 국한문혼용체로 쓰지 않으면 페널티를 매겼다. 대부분 국내 주요 [[신문]]들은 세로쓰기, 국한문혼용으로 발행되었다. 신문이 가로쓰기, [[한글전용]]으로 바뀐 것은 [[한겨레]]신문을 제외하면 1990년대 중반 들어서다. 이때가 [[민주화]]와 시기를 같이 하지만 사실 정책적으로 한글전용을 실시한 주체는 박정희 정부였다. [[박정희]]는 한글전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대학생들과 얘기를 나눈 뒤 한글전용에 대해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그는 대학생들이 가져온 한글전용 계획을 살핀 뒤 [[1968년]] [[5월]] 내각에 1973년을 목표로 한 "한글전용 5개년 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자신도 문서 작성과 명패 등을 모두 한글로 바꾸었다. [[10월]]에는 목표 연도를 [[1970년]]으로 3년 앞당기게 하는 등, 7개항의 강력한 한글전용 지시를 다시 내렸다. 거기에 [[한자]] 교육을 일시적으로 폐지하기까지 했다. 물론 [[경로의존성|엄청난 반발]]이 일어나 중·고등학교에서 한자 교육을 재개했지만, 한자 교육 자체가 이미 크게 축소된 뒤였다. 그때 교육을 받은 세대들이 사회의 중역이 되기까지 대략 25년 정도 걸렸는데 그게 1990년대이다. 동시에 사회 전반에 걸쳐 [[컴퓨터]]가 보급되고, 전산화, 정보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국한문혼용체 사용은 더욱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그 흔적으로 1990년대까지 신문 기사에서 사실상 한글전용 수준으로 한글이 보급되었지만 기사 하단에 명기되는 기자 이름은 여전히 한자로 표기된 경우도 많았었고(2000년대부터 기자이름도 한글로 표기된다[* 다만 몇몇 보수 성향 월간지 같은 데에서는 2010년대 넘어서까지도 드물게 기자 이름이 한자로 표기되는 경우가 소수 잔존해 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학 교재나 주간지에서 국한문혼용을 드물게나마 일상에서 접할 수 있었고, 눈으로나마 [[한자]]를 독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나, 이마저도 2010년대, 2020년대부터 격감했다. 다만 여전히 대기업, 대학 논문 학술 등에서는 자주 사용한다. [[고려대학교]] 등에서도 졸업을 위한 한자시험 인증은 여전히 50% 이상 존재한다. [[북한]]에서는 해방 후 [[1946년]] 사이에 간행된 [[로동신문]]이 [[세로쓰기]]에 국한문혼용체이므로,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국한문혼용체를 일반적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북한에서 전면적으로 한글 전용을 시행한 때는 로동신문이 가로쓰기로 발행되기 시작한 [[1948년]]인 것 같다. 남한 역시 동년 [[한글날]]에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한글 전용을 법제화한 바 있다. 남한에서 한글 전용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고, 지금도 국한문혼용을 주장하는 이들이 나오는 것에 비해 북한에서는 한글 전용이 별다른 논란이나 마찰 없이 비교적 빠르게 보급되었다. 물론 이는 당의 방침에 대한 저항이나 이의가 원천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북한 체제의 성격이 한몫한다. 몇 달 속성 교육으로 한글을 뗀 사람들이 국한문혼용체로 된 글을 제대로 읽을 리 없으니 추가적으로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에 편의성을 우선시한 것이다. 한편 [[연변]]에서는 북한의 영향으로 국한문혼용체는 잘 쓰이지 않고 [[한자 병기]]를 하는 편이다. 그래도 남북한과는 다르게 한자를 쓰는 비중이 높다. 연변 자치주의 공용어가 조선어(한국어)라지만 엄연히 [[중국]]에 속하고 중국에서 전국적으로 쓰이는 [[공용어]]가 [[표준중국어]]라 연변 주민들은 한자를 기본적으로 배우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 본토는 [[간체자]]를 쓰는 나라이므로 이들은 한국/[[대만]]의 정체(번체)자와 달리 간체자를 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