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군복/한국군 (문단 편집) ==== [[독립군(한국)|독립군]] ==== [[파일:대한독립군 장교.jpg]] 독립군 결사대 장교 군복[* 사진상의 군복은 천안 독립기념관 제 5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군복이다. 출처는 독립기념관 블로그.] [[파일:대한독립군 사병.jpg]] 독립군 결사대 사병 군복 [[파일:독립군 사병 견장.png]] 독립군 결사대 사병 견장 [[파일:대한독립군 완장.png]] 독립군 결사대 완장. 보통의 완장과는 달리 팔에 끼우는 방식이 아니라 박음질 해서 붙이는 방식이다. 의병의 정신을 계승한 독립군 부대들은 만주지역에 분포하였는데, [[경술국치]]로 인하여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잃음으로써 정부 차원의 지원이 있는 정상적인 생산라인이나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로 인해 기존 의병을 비롯한 독립군 부대들의 무기나 복장은 각양각색이었지만, 군복이 갖는 위엄과 소속감, 나아가 충정과 결의를 다지기 위한 도구로써 군복을 제작하고 착용하였다. 독립군의 군복은 완벽히 보존된 것은 현재로써는 없다. [[독립기념관]] 5관에 전시된 독립군 군복, 그러니까 바로 위의 사진으로 기재된 군복은 실물이 아니라 고등경찰기록 제 34101호의 글과 35383호의 글, 삽화를 기반으로 제작한 것이다.[* 글과 대략적인 삽화를 통하여 재현된 복각품이다 보니 견장의 크기가 실제 부착되었던 견장의 크기보다 훨씬 더 크게 묘사되었다. 실제 견장의 크기는 아래의 사진 참조.] 1920년대 초반까지 잔존했던 독립군은 조선식 옷을 개조하거나, 중국[* 이당시 중국은 중화민국이었고, 중국 각지에서 각종 군벌들이 활개치던 상황이었다.]군경, 군벌의 군복을 모방하거나, 소련군 군복을 착용했다는 기록[* 홍범도 장군이 부대원들과 찍은 사진 중, 적백내전기 붉은군대의 튜닉을 입고, 부됸노프카를 쓴 부대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br][[파일:홍범도 장군과 부대원들.jpg]]]이 있고, 일본군 군복 역시 상당수 모방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군벌 군복과 소련군의 군복을 착용한 이유는 만주지방에서 구하기 쉬운 군복이었고, 일본군복을 착용한 이유는 '''피아식별을 어렵게 해서 교란한 뒤 섬멸하기 위해서''' 착용하였다. 본래 독립군의 전투교리는 열세한 전력차이로 인하여 전면전을 되도록 피하는 대신 지형지물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을 적극 활용하였는데, 이러한 전투교리와 더불어 적군과 비슷한 군복을 입고 피아식별이 어렵게 한 후 교란 및 섬멸하기 위해 일본군복과 비슷하게 만들어 졌다.[* 실제로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전투]]에서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군과 교전한 적들이 피해를 입은 이유가 교란으로 인한 일본군 부대끼리의 오인사격이라는 점에 있어서, 효과는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사진 상의 독립군 군복은 일본군 군복의 형식이라기 보다는, '일본군 군복을 모방한 중국 군벌의 군복'[* 특히 카라장의 형태가 중화민국 북양정부 군벌의 군복 카라장과 동일함.]에 더 가까운 형상이다.[* 군복의 세로형 견장과 카라장의 모습을 보고 일본군을 연상할 수 있으나, 이러한 형식은 당시 군벌 대다수가 일본군의 군복 양식을 모방해서 사용하고 있었고, 사진상의 카라장은 일본군의 오목한 오각형이 아닌, 중국 군벌의 튀어나온 오각형 카라장과 동일하다. 당시의 기록들에도 중국에서 군복을 구입해 착용하였다는 기록이 많아 이쪽으로 생각하는 편이 타당하다. 이 문장에서 "'일본군 군복'이 아닌, '일본 군복을 모방한 중국 군복'"부분을 보고 '그게 그거지 않느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카라장의 형상이 다르다는 점이 '일본 군복을 바로 모방한 것'이 아니고, '일본 군복을 모방한 중국 군벌 군복을 보급 및 2차적으로 복제생산한 것'이란 사실을 더욱 명확히 한다.] 위 사진의 군복을 착용한 독립군이 활동하던 시기는 1920년대이고, 동시대 일본의 군복인 45식 군복[* 메이지 45년인 1912년에 제작되어 2차대전기까지 사용된 일본군복이다. 영화 [[암살(2015)|암살]] 이나, [[덕혜옹주(영화)|덕혜옹주]]에 나오는 그 군복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보면 된다. [[https://www.google.co.kr/search?q=45%E5%BC%8F&tbm=isch&tbo=u&source=univ&sa=X&ved=0ahUKEwj5stbrmfDWAhWJv7wKHTilCZUQ7AkIMg&biw=783&bih=594#imgrc=mAwIFCmacdTJVM:&spf=1507987140410|45식 군복의 모습들.]]]과 매우 흡사한데, 이는 당시 중국 군벌들 상당수가 45식의 형태를 모방해 사용하였고, 이가 독립군 세력에도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쑥색(또는 짙은 초록) 바탕의 군복, 어깨에(긴 쪽이 어깨 앞뒤로 가도록) 부착하는 붉은색 견장,[* 다만 특이하게 일본군식의 탈착형이 아니라 박음질 해서 고정시킨 것으로 보이는 견장이다. 견장의 외양에서도 차이점이 있는데, 일본군이나 중국 군벌의 견장과는 달리 독립군 장교 견장의 경우 견장 가운데에 태극문양과 같은 독립군 고유의 특징이 들어가 있는 등 차별화가 된 점을 알 수 있다.] 스탠딩 카라 형식의 옷깃, 카라 가운데 부분의 붉은 카라장[* 아마 일본군의 보병 병과인 붉은색을 따와 카피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군은 사실상 거의 대부분이 보병이었으니... 다만, 앞서 서술하였듯이 일본군의 경우는 카라장이 안쪽으로 패인 5각형 형식으로 되어있지만, 독립군의 카라장은 볼록한 5각형인데, 이것은 당시 중국 군벌들이 사용한 형식과 동일한 모양이다.] 이 있는 등, 45식 군복과 매우 유사하게 생긴 것이 특징이다. 다만, 왼쪽 팔 부분에는 [[대한제국]]의 국화인 [[오얏]]꽃(李花)과 별이 그려진 5각형 형태의 표식을 완장 형태로 부착하였다. [[파일:청산리 전투 독립군.jpg]] 국사 교과서에서 봤을 법한, '[[청산리 전투]] 직후 촬영된 독립군'으로 알려진 사진. 맨 앞에 앉아있는 인물은 [[김좌진]]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맨 앞에 앉아있는 인물은 김좌진 장군의 모습이 아닌 [[최운산]] 장군의 모습이라는 [[https://youtu.be/2nSVHEk3Vz8?si=N-79hVuhspQRFeb-|주장이 있다.]]] 맨 앞 김좌진 장군 군복의 카라장과 견장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데, 사진이 희미한 흑백이어서 견장의 도안은 알기 힘들고 부착된 모습만 대강 파악할 수 있지만, 김좌진 장군 뒤에 정렬한 군인들 중 앞줄 오른쪽 두번째와 세번째 군인이 입고 있는 군복에서 스탠드 카라 형식의 목깃은 명확하게 확인된다. [[파일:북로군정서군.png]] [[우용곡]] 작가가 그린 북로군정서군의 군복 모습.[* [[https://blog.naver.com/dndudwp99/221354672638|이미지 출처]]] [[파일:종진.jpg]] 북로군정서의 흰색 군복을 착용한 김종진(金宗鎭) 위 자료의 특징들로 미루어 보아, 이 당시 독립군들은 일본군의 45식 군복을 모방한 중국 군벌의 군복을 들여오거나 복제 생산 하고, 독립군 고유의 표식과 계급체계를 적용하여 착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모의 형태로는 인민모 또는 [[뉴스보이 캡]]의 형태 내지는 크라운형 정모 종류의 모자를 썼고[* 원래 크라운 형식의 정모이지만, 형태가 바로 잡아지지 않는 후줄근한 모습이어서 '사실상' 뉴스보이 캡 또는 인민모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가운데에 초록색 바탕의 저시인성 태극기를 부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에는 독립군 부대들이 산발적으로 활동을 하였으므로 앞서 말한 이유를 제외하면 딱히 독립군 나름대로의 군복을 확립할 이유가 없었고, 독립군의 규모는 일본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규모인데다가, 주 활동 무대도 국내가 아닌 만주지방이었기 때문에 산업적 인프라가 높지 않아 대부분 적은 수의 미싱기와 포목을 이용하여 가내생산식으로 제작 및 보관[* 주로 민가나 동굴에 보관하였음.]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의 군복은 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군의 존재가 사실상 미미해질 때 까지 유지되어 소규모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김좌진.jpg]] 참고로,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의 꿈속에 회상되는 [[김좌진(야인시대)|김좌진]] 장군이 이 옷을 입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