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군사영어학교 (문단 편집) == 역사 == 미군정 초대 국방사령관이었던 [[미 육군]][[중장]] L.E. 쉬크 [[장군]]의 지시로 통역관 및 군간부요원 확보를 위해 1945년 12월 5일에 개교하였다. 먼저 '경찰예비대'를 창설 준비를 영어에 능통한 만주군 출신 [[원용덕]]에게 요청했다. 그는 이응준 등 사설 군사단체의 간부들을 모와 1945년 11월 20일에 미군정청에서 회의를 열었다. 회의결과 좌익계는 제안에 거부한다며 장내를 빠져나갔고, 자신들만이 국군이 될것이라고 생각한 광복군계도 거부하였다. 결국 만주군관학교 대선배 원용덕과 일본육사 대선배인 이응준 둘이서 면접을 보아 [[군사영어학교]] 학생을 뽑아 '경찰예비대' 창설을 준비하였고 이는 국군 창설로 이어졌다. 초창기에는 [[감리교신학대학교]]([[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냉천동) 건물을 활용했다.[* [[감신대]]는 1944년 [[일본 제국|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된 상태였기 때문에 잠시 건물을 활용한 것이다.] 1946년 2월 27일엔 태릉으로 옮겼다. 태릉의 舊 [[일본 육군]] 지원병훈련소 부지에는 1946년 1월 15일에 창설된 [[국방경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초대 교장은 그린 육군 [[중령]]이었는데 개교 후 5개월 사이에 4번이나 교장이 바뀌었다. 그 바람에 실질적인 학교 운영자는 법무장교인 리스 소령과 부교장(겸 생도) 원용덕이었다. 경비대가 창설되는 동안 군사영어학교로는 당장 필요한 장교 수요를 충족할 수 없다고 판단, 1946년 4월 30일 군사영어학교를 폐교하고, 폐교 다음날인 1946년 5월 1일 정규의 간부양성기관인 남조선 국방경비사관학교(南朝鮮 國防警備士官學校)를 설치하여 간부 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이는 오늘날의 [[육군사관학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