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군약신강 (문단 편집) == 개요 ==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한 소치라고 한다. 돌아가서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라. >---- >[[강희제]] [[君]][[弱]][[臣]][[强]] 말 자체는 군주의 권한이 약하고 신하의 권한이 강하다는 말이다. 사실 정치체제가 대개 그러하듯 어떤 제도든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라, 서로 상호보완하는게 좋지 어느 쪽이든 한 주체가 너무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닥 좋진 않다.[* [[신권]]이 너무 강하면 [[권신]]의 [[전횡]]이 있을 수 있고, [[왕권]]이 너무 강하면 [[주지육림]]과 애꿎은 피바람이 몰아칠 수 있다.] 유래는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경신대기근]]이 일어난 [[조선]]을 보고는 [[현종(조선)|현종]](생몰년: 1641년 ~ 1674년, 34년, 재위기간: 1659년 ~ 1674년)에게 건넨 말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은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강한 탓에 즉 왕이 신하들을 제대로 컨트롤 못하니 정책은 표류하고 백성은 굶어죽는 것 아니냐?'는 표현을 이렇게 말한 것. 그런데 사실 후술되어있지만 이무렵 조선은 왕권, 신권을 따지기 전에 [[경신대기근]]이란 자연 대재앙을 당한 상태긴 했다.[* 오히려 대기근 전까지만 해도 제법 호황이었던 정황도 있다.] 어쨌든 이런 [[강희제]]의 말에 [[조선]]은 안그래도 [[청나라]]를 [[오랑캐]]국이라며 싫어했는데[* 특히 서인, 그 중에서도 노론은 알레르기급으로 이 발언을 싫어했는지 현종 사후 숙종이 즉위했을 때 청나라에서 조문을 하러 온 사신이 두 번이나 치제를 하자 숙종이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사신에게 물어보게끔 했는데 당시 사신들을 접대하던 오시수가 생전에 왕이 '''강신들에게 고생한 것''' 안타까워서 그랬다고 말했는데 노론 쪽에서는 오시수가 송시열을 찝어 얘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6년 뒤 [[경신환국]]때 그 당시의 역관들로부터 젊은 나이에 요절해 안타까워서 그랬다는 자백을 받아내고 오시수를 죽여버린다. 하지만 당시에도 말도 안된다고 여겼는지 소론도 오시수 처리에 대해서 제 발 저린 격 아니냐는 식으로 반응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청나라 전성기를 연 이른바 천고일제로 평가받는 강희제니까 제후국 임금한테 저런 말 해볼 수도 있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시기를 감안'''하자. 이 시기의 강희제는 막 [[구왈기야 오보이|오보이]]를 숙청하고 친정을 시작하자마자, 곧 [[삼번의 난]]이 터지면서 이를 수습하고 있던 신생 황제에 불과했다. 당시 강희제의 나이는 고작 16세였다.] 이후 굉장히 분노하여 대기근으로 사정이 극도로 나쁜 와중에도 청에 도움 요청을 하지 않았고, 대기근 동안 더 굶었다.(...) 강희제의 의도가 조롱인지 조언인지는 불명이지만[* 실록을 보면 말이 오가는 분위기는 험악하지 않았고, 나중에 조선에서 을병대기근이 발생하자 조선에 구휼미 5만 석을 제공하고, 이를 기념하는 '해운진제조선기(海運賑濟朝鮮記)'를 직접 지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지원도 해줬던걸 생각해보면 악감정을 가지고 말했을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애초에 [[강희제]] 항목에도 나오듯 이 기록 뒤의 일화를 보면 조선은 군약신강이 아니라고 강희제에게 반박한 --패기--조선 사신에게 청의 관리가 황제께서 조선을 좋게 봐서 이런 말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확실한 건 경신대기근 시기는 [[소빙하기]]로 '''중국도 포함한''' 지구상 대부분의 국가가 대기근을 겪었다.[* 당장 일본만 해도 엔포 대기근(延宝の飢饉, 1674-75)이 일어났고, 유럽에서는 포도 수확일이 늦어졌고 평균 기온이 떨어졌으며, 알프스 산맥의 빙하가 확산되고 강과 운하가 자주 얼었다. 중국에서는 추위로 인해 강남 감귤 농장들이 전멸했으며 천진 운하의 결빙 기간이 늘어났다. 자세한 사항은 [[경신대기근]] 참조.] 이후 세월이 흘러 숙종 시기 [[을병대기근]]이 일어나 도움 요청이 들어오자 이때까지도 살아있던(...) 강희제가 조선으로 쌀 5만석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조선에선 오히려 이 쌀을 치욕스럽게 여겨 도움을 요청한 신하들을 탄핵했으며 대기근의 원인이 청나라 쌀이라는 소문까지도 돌았다.[* [[http://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3220808]]] 이후로도 조선은 더더욱 청나라를 싫어하게 되었으며[* 특히 청나라는 호란에서 조선을 유린하고 [[삼전도의 치욕]]이라는 굴욕까지 주었기에 조선은 청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다.] 고려[* 당시 중국,일본에서는 조선을 부를 때 [[삼한]], [[고려]], [[조선]]이 모두 통용되었다.]황제라는 별명이 붙었던 [[만력제]][* 고려황제는 좋은 의미가 아니라 암군이라고 까는 별명이다. "니 어느 나라 황제니?'라는 식으로 다만 명나라에서는 왜란 이후 이 재조지은을 빌미로 조선에게 엄청난 양의 은을 요구했는데 이는 만력제의 잘못으로 명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만력제는 자신의 국고를 여는 대신 광세라고하여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국의 은을 긁어모았으며 불똥이 조선으로도 튀어 조선에 엄청난 양의 은을 요구한 것이다.'''즉 만력제는 중국인들에게 고려 황제라는 비아냥을 들었지만 정작 조선 입장에서도 마냥 고마운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출처:[[https://www.google.com/amp/s/mnews.joins.com/amparticle/24096357]]]를 모신 [[만동묘]]의 제사를 지냈다.[* 물론 이와는 별개로 조선인들도 만력제가 나라를 망친 암군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그 점에 대해서는 만력제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기록이 있다. "사리에 어두운 임금은 원망하지 않는 법이니, 천계(天啓)황제는 원망할 수 없는 임금에 해당되지만, 만력(萬曆)황제는 초년에 영매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으로 사십 년 동안이나 왕위에 있었으나 신료들을 인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경계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다만 강희제 항목에도 있듯 을병대기근 시기쯤 되면 당대 조선에도 이미 강희제를 고평가하는 사람들은 있긴 했다. 즉, 오랑캐 출신 황제긴 하나 영걸한 위인이라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