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군약신강 (문단 편집) ==== 기존방법 봉인 ==== 이런 점 때문에 조선은 아예 위의 세 가지를 전부 봉인해버렸다. 이는 또 왕권견제도 있겠지만 앞서 말한 단점이 너무나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당장에 전대인 고려왕조만 해도 왕조 초기에는 왕해먹겠다고 나대는 왕족들이 많았고 헌종, 인종때는 외척이 설치기도 했고 의종때는 환관이 설치기도 했다. 멀리 중국사 볼것도 없이 당장에 한국사에서도 이런 폐단이 있었으니 손을 안댈 수가 없던 것. 왕실 인사 기용은 초반에는 딱히 큰 제약이 없었다. 건국 후 중앙집권화와 권력 다툼 과정에서 태종의 권력 장악과 사병 혁파를 거치면서 왕실 일가가 가진 권력이 왕에게 귀속되면서 전주 이씨가 중책을 맡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나라가 안정되고 세종이 대군들에게 일을 맡기고 세조가 공신 견제 목적으로 신 공신과 함께 왕족인 구성군을 영의정 삼아서 파격적으로 기용했지만 사후에 남이의 옥사로 죄다 날려버리면서 구성군은 정치적으로 거세해버린다. 이후 성종 때 법으로 가까운 전주 이씨 왕족은 아예 과거 자체를 금지하면서 왕족이 아니게 된 경우만 관료로 임용되게 했다.[* 조선의 경우 왕족들에게 왕족 전용 품계와 타이틀이 있었는데 이것은 대가 지날수록(정확히 말하자면 재위중인 왕과 촌수가 멀어질수록) 점점 낮아지다가 결국 없어진다. 즉 좁은 의미의 왕족이 아니게 된다. 다만 그렇기는 해도 여전히 왕과 같은 전주 이씨이기에 넓은 의미에서는 왕족이다.] 단 명예직에는 제수해서 흥선대원군은 도총관을 지내기도 했다. 어쨌든 정치권력은 주지 않았다. 물론 이는 흥선대원군 집권기에는 좀 달라서 종친들을 여기저기 앉혀주긴 했다. 외척의 경우는 태종은 손수 처가에 사돈까지 박살을 내었고 이후에도 딱히 외척이 힘을 쓰는 경우는 없었다. 외척을 중요하기에는 왕권이 강했고 외척이 나설 상황이 되려면 왕의 어머니가 중전이어야지 후실인 비빈의 경우에는 법적 어머니인 중전이 멀쩡하게 있을 경우 행동이 제약되었다. 특히나 수렴청정 같은 상황이면 더더욱 그랬다. 그래도 중반기 들어서면서 윤임, 윤원형 같은 외척이 나타났지만 명종이 직접 숙청했고 이후로도 외척은 영조가 붕당에 질려서 척신 정치를 하면서 권력을 집중해주기 전까지는 대세가 되지 못했으며, 어디까지나 외척이라는 위치 자체에서 나오는 개인적인 권세 정도에 그쳤다. 환관은 아예 초기에는 없애려고 했었고 이후에도 왕실 사무만 처리하는 조직으로 한계를 그었다. 경종이 환관의 도움으로 소론과 소통해서 정국 뒤집기가 있었기도 했지만, 동창 같은 관료 사찰 능력은 없었다. 당연히 군대 사무나 지휘도 불가능했고 왕의 시중만 드는 노예라는 위치를 고정시켰다. 더해서 가족도 가질 수 있게 해주고 양자도 들이게 해서 가족을 돌보게 해서 권력에서 눈을 돌리게 하고 어느 정도 재물도 축적해서 욕구도 달래고 유사시 가족을 인질로 삼게 했다. 물론 왕실의 재산인 내탕금을 관리하는 내수사 소속이거나 왕명을 출납하는 내시와 같은 고위직들은 위세를 부릴 수도 있었지만 이 역시 현실 정치와는 거리가 멀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수준이었으며 기존 관료들의 벽을 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