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군약신강 (문단 편집) == 부정하는 입장 ==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세계사급으로 범위를 넓히면 상당히 복잡해진다. 서양의 경우 [[공화주의]]에 입각한 혼합정체 전통 때문에, 고대 로마 공화국이나 중세 이탈리아의 도시 공화국들처럼 이 사례에 반대하는 경우도 나오기 때문. 사실 동아시아사에 한정하더라도, 명말 청초의 [[황종희]]가 명나라 쇠퇴의 원인을 '지나치게 강력한 전제 권력'으로 꼽는 등 '왕권 강화 = 좋은 것'이라고 단편적으로 말하긴 어렵다. 다만 교과서적인 설명에 한정한다면,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대체로 왕권 강화가 좋은 것으로 통하기는 한다.][* 특히 명나라의 경우는 권력이 황제 한 사람에게만 지나치게 집중된 체제가 안 좋은 방향으로 나타나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데, 바로 만력제가 그 사례다. 모든 권력이 황제인 만력제에게 집중되어있는데, 그 황제가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맨날 술 마시고 놀고 앉아있는데다가, 세자의 권위를 뒤흔드는 등 연신 트롤링만 하고 있으니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다. 그 후 명나라는 숭정제 때 망하긴 했지만, 후에 중원대륙을 차지한 청나라조차도 '명의 멸망은 숭정제가 아니라 만력제가 제일 잘못이 크다.' 라고 했다.] 거의 모든 나라들이 막장 테크를 탈 때 신하의 힘이 강력해 졌다는 것을 봤을 때 조선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당장 중국사에서 [[십상시]]의 예가 있다. 게다가 [[청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황제]]의 실제 권한이 [[명나라]]와 비교해봐도 유달리 강한 편이었다. 어디까지나 왕조 국가인 만큼 기본적으로 왕에게 주어진 권한은 매우 강력하고 왕통의 불안 요소만 없다면 조선의 왕권도 대단히 강력해진다. [[조선]]의 경우, 왕통이 불안하게 승계되다보니 왕권이 약화되는 면이 있었다. 반정이나 방계로 교체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고 그때마다 왕권이 약해지고 신권이 강해지는 일이 벌어졌다. 저 말이 나왔던 [[현종(조선)|현종]] 시대는 [[소현세자]] 문제 때문에 [[효종(조선)|효종]], 현종의 왕권이 어느 정도 제약 받을 수밖에 없었던 문제가 있었다.[* 그나마 현종은 효종보다는 나았다. 효종은 구도자의 삶을 살다시피 해야했지만 현종은 그보다는 나아서 경연도 게을리하고 후원에서 노닌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였다.] 이론상으로 조선의 왕은 마음 먹으면 어떤 신하를 불문하고 죽이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고, 모든 재판을 주관하여 그 어떤 죄라도 사면해 줄 수 있었으며 왕이 내린 명령은 곧 법률이었다. 조선의 왕은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을 한 몸에 가졌다. 또한 왕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내수사]]의 [[내탕금]]은 조선 시대 내내 고갈된 적이 없었으며, 왕실은 조선 내에서는 누구와도 비교할 상대가 없는 탄탄한 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실제로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조선)|숙종]]에게는 별다른 불안 요소가 없었기 때문에 무서울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 즉, 이론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조선은 '''한국사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두를 수 있는''' 국가였다. 다만 불안 요소 없이 멀쩡하게 왕권을 누린 왕이 [[태종(조선)|아버지가 불안 요소를 다 쳐내 준]] [[세종(조선)|세종]], 스스로 사화를 일으켜 다 쳐내버린 [[연산군]], 왕의 적장자로서 원자부터 세자까지 정석 테크 트리를 탄 숙종 정도밖에 없다. 숙종의 장남 [[경종(조선)|경종]]은 폐서인 된 [[장희빈]]의 아들인 데다가 아버지인 숙종의 눈밖에 난 천덕꾸러기 신세라 불안 요소가 다분히 많았지만, 일단 왕위에 오른 뒤에는 자신의 정파를 바로 세우고 동생 [[영조|연잉군]]의 세제 자리를 지켜줄 정도의 권위는 확보할 수 있었다. 이를 볼 때 조선에서는 왕의 역량에 따라서 군약신강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심지어 경종은 [[신임사화]]로 자기한테 딴죽걸던 노론 4대신을 저세상으로 보내버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왕의 권력 = [[국력]](國力)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한민족이 세운 국가, 그 중 특히 조선은 [[전제군주제]] 국가 치고는 군주의 패악질이 다른 주변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인데, 여기에는 신권이 끊임없이 왕을 견제한 점이 매우 크게 작용한다. 왕권과 신권이 균형을 이루어야 나라가 잘 굴러가는 법이다.[* 왕권이 너무 강하면 [[폭군]]의 등장을 막기 어렵고 신권이 너무 강하면 역성혁명의 가능성이 커진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신하들끼리 패싸움을 벌이거나 왕이 정치를 제대로 못하거나 안 하게 만들어서 혼란을 초래하기 쉽다.] 단지 조선 후기에 들어서 신권이 너무 강해진 게 문제일 뿐. 다만 조선 후기에 신권이 너무 강해진 이유도 [[정조(조선)|정조]] 사후 왕위에 오른 [[순조]]가 정치에 지나치게 무관심했고, 뒤를 이어 즉위한 [[헌종(조선)|헌종]]이 지나치게 일찍 세상을 떠나고, 중앙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철종(조선)|철종]]이[* 중앙 권력에서 소외되는 걸 넘어서 이복형 [[회평군]]이 역모에 추대되어 사사당하는 바람에, 철종 본인도 연좌제로 휘말려 다른 이복형 [[영평군(1828)|영평군]]과 함께 유배까지 떠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헌종이 승하하면서 왕실의 적통 후계자가 전멸하자 몇 안남은 왕족으로서 왕위에 오른 것.] 왕위에 올라 마찬가지로 정치에 무기력했기 때문이다. 즉, 결코 왕의 권한이 약했기 때문에 신권이 강해진 게 아니라는 거다. 실제로 조선 시대를 통틀어 ([[세도정치]]도 일종의 신하의 권력이라 봐야한다면) 신권이 왕권을 완전히 압도했다고 볼 수 있는 시기는 순조 - 헌종 - 철종에 이르는 3대 뿐이다.[* 헌종도 일찍 죽어서 그렇지 죽기 직전까지 왕의 권위를 이용해 안동 김씨를 극딜하고 있었고 안동 김씨 세력은 제대로 된 반발조차 못 하는 상황이었다. 헌종이 몇년만 더 살았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 이마저도 곧 강한 권력 의지를 가진 [[흥선대원군]]이 아들 [[고종(대한제국)|고종]]을 왕위에 올리며 집권하자 바로 뒤집어진다. 그나마 심환지 어찰[* 그런데 심환지 어찰도 문제인 것이, 이런 어찰은 원래 받으면 보고 불살라야 한다. 이걸 가지고 있다가 현대까지 남아서 발견되면 안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심환지 어찰이 어떻게 남아있을 수 있었는지를 고려하면 결론이 좀 달라지게 된다.]에서 확인되듯이, 그 신권의 견제조차도 왕이 마음만 먹으면 이면에서 정치적으로 조율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다. 왕 빼고 다 가졌던 노론과 안동 김씨는 경종과 고종을 낀 흥선 대원군이 자기들에게 반대하자 권력에서 밀려났다.[* 다만 대원군 집권 시기에도 대원군 자체의 권력 기반이 약한 것도 있고 세도 정치동안 안동 김씨의 세력이 여기저기 뿌리를 내렸었기 때문에 쇠퇴할지언정 위세는 남아있었다.] 조선이 타국과 다른건 왕과 신하들의 세세한 대화 기록이 사초로 남아있다는 점인데 그것들에서 오해가 생기는 부분이 많은거 같다. 유교 질서에 따라 의례적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간언하는 이야기들이 희화돼서 군약신강의 소재로 쓰이기도 한다. '전하, 경연에 힘쓰소서' '전하, 마음을 다잡으소서' 이런 간언들은 경전에 나오는 의례적인 이야기로 별의미가 없다. 경연이 왕을 압박하고 견제하는 도구라고도 하는데 그 경연을 활성화시키고 후대 왕들을 괴롭힌 장본인은 다름 아닌 세종대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경연 담당 관리들에게는 세종대왕과의 경연은 안좋은 시간이었는데 세종대왕이 너무 먼치킨이다보니 담당관리들도 왕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 열심히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이외에 태종, 영조, 정조 등 학식이 높은 왕의 경우 경연관들이 상대하기 어려워했다고 한다.(영조는 초기에는 별로 학식이 대단하진 않았지만 갈수록 학식이 쌓여간다.) 정조는 아예 신하들 학식이 떨어져 경연 못해먹겠다며 아예 '''자기가 신하들을 가르쳐 인재를 발굴했다(...)''' 그런데도 신하들은 아무도 뭐라 못했는데 '''신하들이 감히 반박을 못할 정도로 정조가 너무 먼치킨이었다(...)''' 아이러니하지만 경연 대상자가 학식이 높으면 외려 경연으로 왕을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 고생했다(...)] 그리고 모든 왕들이 세자들 제왕 교육에 열혈이라서 어떻게든 나라에서 제일가는 학자들을 선별해서 공부시키려고 난리였다고 한다. 오히려 그만큼 조선에서 제왕의 역할과 영향력이 컸다는 반증이 경연제라고 볼수 있다. 실제 조선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지방관 - 중앙 조정 - 왕의 결재까지 철저한 유례없는 중앙 집권 시스템이 자리 잡았다. 당연히 그 시스템에서 힘의 균형은 최종 결재자인 왕이 우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임란 이후 이러한 정치 체제가 마비되고 인조 반정을 거치면서 정통성에 하자가 있는 군주(인조, 효종) 라인이 펼쳐지면서 예송논쟁과 같은 군신간의 대결이 펼쳐졌다. 하지만 이것도 내막을 보면 혈통과 원칙을 우선하는 유교적 원리와 그래도 왕실인데 그쯤은 넘어갈 수 있다는 현실 논리와의 싸움이기에 양측 모두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 결국은 원리주의자 대표인 송시열을 숙종이 처단하면서 이 기나긴 싸움은 왕실의 승리로 끝이났고 숙종은 당대의 전제 군주로서의 위상을 제대로 누리다 떠났다. 택군을 받았다고 일부 창작물에서 왜곡되는 영조는 즉위 이전부터 왕의 아들이 아닌 왕의 동생이라는 불안한 위치를 극복하고자 자발적으로 정치 세력을 구축하면서 왕세제로서 왕위 계승권을 단단히 했는데 그 정치 세력이 바로 노론이었다. 즉 노론은 영조가 왕위를 위해 키운 친위대였지 공신 세력이 아니었다. 영조는 이 친위 세력을 쥐락펴락했고 확실한 왕권을 확립하면서 50년 넘게 왕노릇 잘했다. 그리고 사도 세자 이야기만 해도 실제로는 미래 권력에 대한 눈치를 본다고 신하들이 영조에게 사도 세자의 비행에 대해 제대로 보고하지 않아 영조가 진노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인데 노론에 대항하다가 희생되었다는 스토리는 애초에 이치에 맞지 않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순수 혈통의 외동이라 왕 자리는 그냥 이어받는 세자가 굳이 아버지 심기 불편하게 반노론이니 친소론이니 정치셈법하며 투쟁할 이유는 제로에 가깝다.[* 사도세자가 죽을 때 당시 영조 나이가 60대였다. 그 당시로 비춰보면 당장 내일 급사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으니 사도세자는 오늘은 세자이나 내일은 왕이 될 수 있는 몸으로 모함이고 나발이고 할 수 없다. 죽기 싫으면 말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조선시대에 이덕일이 주장하는 "거대 신권에 도전하는 왕의 투쟁" 같은 스토리는 아예 없었다. 대표적인 군약신강 시대인 고려는 무신들의 간섭을 받은 왕들은 집권 무신 세력이 교체될 때마다 왕위 교체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고 특히 [[희종(고려)|희종]]은 서슬퍼런 세습 독재자 [[최충헌]]을 제거하고 왕권을 되찾고자 하다가 실패해서 비참하게 폐위당하고 유뱃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이덕일식 군약신강 투쟁 스토리가 나오지 [[조선시대]]에는 저렇게 서슬프런 권신도 없었고 저렇게 무기력한 군주들도 별로 없었다. 더군다나 그 고려도 [[문벌귀족]]들과 [[무신정변]] 이후의 무신들 등등의 강력한 집권층 탓에 왕권이 유명무실한 신세였을지언정 최소한 16대인 [[예종(고려)|예종]] 시기까지만 했어도 왕권이 전혀 허약하지 않았고 제 역할을 했었다.[* 15대인 [[숙종(고려)|숙종]]과 16대인 예종의 왕권은 유명무실 수준이 아니라 진짜 제대로 된 전제적 왕권이었다. 신하들이 함부로 나서기가 버겨웠을 지경.] [[고려시대]]에서는 지나친 신분제 고착화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었을지언정 초중기까지는 왕의 권한이 신권에 압도되는 것은 아니었고 그때까지만큼은 제대로 된 왕조 국가의 왕권으로 남아있었다. 조선 왕들은 그냥 대체로 제 밥값은 다했다. 그 존재감 없는 예종이나 인종도 짧은 시간 동안 제 할일을 했고 예송논쟁 시대에 왕 노릇 했던 현종도 군사, 외교, 경제 분야에서 분명한 업적을 이루었을 정도다. 세도 정치 때 군주들 같은 경우 순조는 편전보다 병상이 더 친숙한 역대급 약골 군주였기에 정상적인 통치력을 발휘하기 힘든 군주였고 이후 헌종 같은 경우도 소년 시절에 왕위에 올라서 수렴청정 받다가 성인되고 친정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승하하면서 평가의 여지가 없다.[* 그 헌종조차도 친위세력 하나 없이도 왕권 회복에 나서자 그 튼튼해보였던 안동 김씨의 세도가 흔들렸다. 더 할 말이 필요한지?] 정리해서 보면 실제적으로 진짜 군약신강에 휩쓸린 허수아비 군주는 철종 정도밖에 없다고 보면된다. 당대 나름 권신들이라 불리던 조광조, 윤원형, 김자점, 송시열, 홍국영까지 공통점은 왕의 신망을 잃자 모든 것이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신하들이 아무리 설쳐도 그 배후에는 왕이 있었고 그들의 생사 여탈권은 왕이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악랄하다고 욕먹는 유교 탈레반 송시열은 왕과 대립하는 흑막의 마왕이 아니라 효종의 제왕 교육을 담당한 스승이었고 효종이 즉위한 이후부터 현종 대에 이르기까지 왕들이 어떻게든 옆에 두고 써먹으려 안달했던 양반이었다. 왕은 치세를 위해 어떻게든 유능한 신하를 곁에 두려했고 그 신하들은 왕의 신임을 통해 권력과 부를 얻을 수 있었다. 조선은 군약신강의 나라가 아니라 아주 원초적인 왕조 국가의 특성을 보여준 나라였다. 특히 영조 치세 이후 새로운 정치 체제인 특정 정파나 특정 가문과 왕실의 밀월 체제는 훗날 세도 정치라는 결과물로 이어졌고 이는 구한 말까지 이어져 나라를 망조로 이끈다. 그리고 수렴청정 경우도 왕실에서 행해지는 만큼 최고 권력자가 왕실 사람이라면 그 실권자의 권력이 곧 왕의 권력을 대변한다. 명종 대의 문정왕후와 헌종 대의 조 대비가 권력을 제대로 행사했다면 그것은 왕권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 봐야한다. 그런 면에서 조선은 시스템적으로 국왕 중심의 국가 체제가 정상적으로 돌아갔다고 보면된다. 고려시대에 왕을 자택에 감금했던 [[이자겸]]이나 자신의 정치셈법에 따라 마구잡이로 왕을 갈아치우던 [[최충헌]] 같은 괴물같은 신하는 조선에 없었다. 중국과도 비교할 거리가 없는 게 중국은 대체로 왕조가 300년 넘긴 적이 거의 없고[* [[시황제]]의 통일 이후 단일왕조가 온전히 300년을 간 사례가 없다. [[한나라]]는 [[전한]]과 [[후한]]으로 분리되어 사실상 별개의 국가로 봐도 될정도로 성격이 다르고 청은 296년, 당은 289년으로 300년은 못 채웠으며 송은 남쪽으로 쫓겨난 적이 있어서 논외이다.] 조선은 명나라가 망하고도 200년 이상을 더 존속했는데 이 긴 시간 동안 왕권의 사이클이 이어지는 게 더 어렵다. 왕권이 길수록 권력의 사이클은 있기 마련이고 그 왕권을 제대로 누리는 건 국왕 개인의 능력이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강화시킨 연산군은 그 권력을 본인 쾌락에 활용하다 자멸했고 광해군은 측근 관리 실패로 아마추어들의 어설픈 정변에 훅갔다. 이런 실제적인 국왕의 역량은 배제하고 실록의 1차원적인 몇몇 사례로 군약신강의 논리를 정설화하는 것만큼 넌센스는 없다. 확실한 건 조선에서 왕권과 신권은 상호 보완의 협력 관계였지 대립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왕이 바뀔 때마다 권력 지형이 바뀌았고 국왕 외에는 세습적인 권력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안동 김씨가 그나마 예외 사항에 가깝긴 한데 이 쪽은 권력을 어느 정도 세습받다시피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신정권 시절의 최씨 가문처럼 왕을 쫓아내고 즉위하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는데 일례로 헌종의 경우 아예 재위 말엽에는 대놓고 안동 김씨와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이 때에 일어난 일은 고작해야 헌종이 총애하는 조병현 다구리 치기, 안동 김씨 옹호하는 상소 쓰기 정도뿐이었는데 전자는 어느 정도 받아들여져 조병현은 위리안치까지 되었지만 헌종은 끝내 국문하라는 주장은 씹었고 그나마도 1년 정도 만에 유배까지 풀어주었으며 후자는 헌종이 아얘 상소 올린 이는(유배) 물론 옹호하는 정원용까지 같이 처벌(파직)했다. 최씨 정권같으면 간단하게 왕을 쫓아내고 말면 될 일이었지만 안동 김씨는 그 방법을 쓰지 않았다. 헌종이 죽고서야 철종을 즉위시켜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철종도 사면 문제에서는 제 목소리를 제법 냈다.] 조선에서 왕이라는 존재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 외에도 조선사 500년에서 일어난 역모사건도 보면 [[태종(조선)|성공]] [[세조(조선)|사례]][[중종(조선)|를]] [[인조|빼면]] '대게 XX대군/XX군을 옹립하여 했다.', '[[사육신|상왕을 옹립하려 했다.]]', '[[광해군|폐주를 복위/상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등이고 그나마 [[삼수의 옥|왕족과 연관이 없어보이는 일도]] [[이이명|뿌리를 파헤쳐 보니]] [[세종(조선)|왕족인 경우고]][* 이이명은 세종대왕의 서자인 [[밀성군]]의 8대손이었다. 족보상으로는 세종대왕 후손인 셈이다.] 진짜배기 역성혁명은 드물었다. 고작해봐야 '이홍윤의 옥사'때 이홍윤이 직접 왕이 되려고 했다는 것이니 '김자점의 옥사'에서 김식을 추대하자는 의견이 나왔다든가 하는 정도, 즉 역모를 일으키는 쪽에서도 '전주 이씨가 왕이 되는 건 당연하지' 라고 생각했고 단지 그 안에서 골랐을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