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군약신강 (문단 편집) === 결론: 관료집단과의 공존 === 이러니 조선의 왕은 철저하게 사대부로 구성된 관료집단을 거치지 않고서는 권력을 휘두를 수 없었다. 여기다 제도적으로 왕을 견제하는 [[삼사(조선)|삼사]]를 두었다. 거기다 배운 것도 사대부와 왕의 공치를 통한 정치이니 왕들이 사대부와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왕이 정치를 알게 되고 머리도 굵어져서 사대부와 반대되는 일을 하고 싶어도 배운 것도 사대부와 동일하니 한계가 있었고[* 예외가 있는데 [[정조(조선)|정조]]로 문무에 모두 능했고 아예 신하들을 가르쳤다.][* 애초에 성리학 교육을 받지 않은 왕이라고는 태조와 정종뿐이다. 그런데 태조는 정도전 일파와 사실상 한마음 한뜻이었고 정종은 과거급제자 출신인 태종의 허수아비..] 사대부로 이루어진 관료 집단에 둘러쌓여서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도 없었다. 이래서 조선의 왕은 중세 시절 끝판 수준의 강력한 왕권을 보유했으면서도 정작 권력 행사가 상식적 수준에서 제한이 되었고, 권력을 국가 운영에 우선시하게 되었다. 만약에 한계를 넘을 경우 연산군, 광해군의 예처럼 관료 조직을 장악한 사대부들의 다수가 동의가 있다면 교체도 가능했다. 관료 집단을 장악한 사대부가 힘을 합치면 견제가 불가능함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황희(조선)|황희]]가 사위인 서달의 죄를 감추려 했던 스캔들. 황희 자신부터 시작해서 수십 명의 관료들이 사건을 묻어버리고 왕에게 올라가는 보고서까지 가로채서 조작했던 것이다. 이때 왕인 세종이 권력이 약했던 것도 아니었음에도 관료들이 작정하고 짜고 움직이자 왕은 순식간에 고립되었다.[* 물론 세종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조선명탐정~~ 왕이었기 때문에 올라온 보고서를 보고 수상히 여겨 사건 조사를 직접 했고, 그 결과 수많은 신하들이 하루 아침에 모가지 당하고 황희는 그렇게 늙어 죽기 직전까지 세종에게 부려먹히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