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군약신강 (문단 편집) === 예외 === 그러나 이런 체제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나름 강력한 왕권을 가진 왕들도 있었다. 물론 숙청으로 권력을 쌓은 왕들도 있었지만 [[세종(조선)|세종]]이나 [[정조(조선)|정조]]의 경우에는 특이하게도 유교적 시스템이 별로 제약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왕권을 뒷받침해줄 종친, 외척, 환관 모두 막혔고 조선초 강했던 종친의 힘도 아얘 분봉까지 해버렸던 전한 초, 서진, 명나라 초기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여기다가 경연이 최종적으로 왕을 제약했지만 세종과 정조는 예외적으로 이 모든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그 시스템들을 활용해가며 강한 왕권을 가졌다. 세종의 경우 익히 알려진대로 [[책벌레]], [[공부벌레]]에 유교 뿐 아니라 국가에 필요한 거의 전방위적인 전문가 수준으로 학식이 일반 신하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고 토론을 엄청나게 좋아했다. 왕이 된 뒤에도 스스로도 내가 손을 쉬고 있을 때가 없다고 할 정도로 배우고 일하던 왕으로 '''이런 왕과 함께 일해야 하는 신하들은 당연히 고생했다.''' 경연이라는 것이 토론+공부+국무회의(일부) 역할이다보니 이런 자리에 참석해서 의견이라도 내려면 기본 학식이 충분해야 했는데 상대는 조선조 손가락안에 꼽히는 공부왕이다. 당연히 신하들은 왕처럼 열심히 일하고 공부해야했고 왕을 속이거나 할 수도 없어서 신하들끼리 짜고 조작한 보고서마저 한큐에 의심스러운걸 눈치챘다. 정조의 경우도 세종 못지않는 책벌레, 공부벌레로 아얘 유교 경전에 대해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외우던 왕이라서 어느 경전에 적힌 것을 줄줄 읊었는데 나중에 신하들이 확인해보니 토씨 하나 안 틀렸다는 위엄넘치는 왕이었다. 문제는 '''그런 왕을 신하들이 못 따라갔다.''' 덕분에 경연은 원래대로라면 신하들이 왕을 갈구며 교육해야하는 자리인데 정조때는 왕이 신하를 가르치는 정반대 현상이 벌어졌다. 이를 종합해보면 결국 왕이 엄청난 학식을 가진 공부벌레라면 이 조건에서도 나름대로 강한 왕권을 누리는건 가능하다. 특히 세종의 경우 정말 특이하게도 숙청사건 한번 없이도 강한 권위와 힘을 가졌다.[* 물론 이는 태종이 이미 세종에게 대들만한 이들을 다 죽이거나 쫓아낸 덕도 컸다.] 허나 이 단계에까지 이른 왕이라면 힘은 있어도 마음대로 휘두르지 않을 가능성이 큰데 그정도로 배운 왕이면 이미 유교적 사상에 따라 통치하는 것에 충실하기에 혼자서 독단적으로 통치하기보다는 나름대로 협치하는 형태로 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