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굴라크 (문단 편집) == 기원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Gulag_Location_Map.svg.png|width=100%]] || 1918년부터 1988년까지 소련에서 운영되었던 굴라크들.[* 러시아어로 쓰인 도시들은 왼쪽 위부터 [[무르만스크]](Мурманск), [[아르한겔스크]](Архангельск), [[탈린]](Таллинн), [[레닌그라드]](Ленинград), [[리가]](Рига), [[칼리닌그라드]](Калининград), [[빌뉴스]](Вильнюс), [[민스크]](Минск), [[키이우|키예프]](Киев), [[키시너우|키시뇨프]](Кишинёв), [[로스토프나도누]](Ростов-На-Дону), [[트빌리시]](Тбилиси), [[모스크바]](Москва), [[카잔(러시아)|카잔]](Казань), [[페름]](Пермь), [[볼고그라드]](Волгоград), [[아스트라한]](Астрахань), [[바쿠]](Баку), [[아시가바트|아시하바트]](Ашхабад), [[보르쿠타]](Воркута), [[야말로-네네츠 자치구|살레하르트]](Салехард), [[예카테린부르크|스베르들롭스크]](Свердловск), [[옴스크]](Омск), [[카라간다]](Караганда), [[비슈케크|프룬제]](Фрунзе), [[타슈켄트|타시켄트]](Ташкент), [[두샨베]](Душанбе), [[알마티|알마아타]](Алма-Ата), [[노릴스크]](Норильск), [[노보시비르스크]](Новосибирск), [[크라스노야르스크]](Красноярск), [[이르쿠츠크]](Иркутск), [[야쿠츠크]](Якутск), [[스보보드니]](Свободный), [[마가단]](Магадан),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Gulag_camps|상세 목록]]] [[러시아 제국]]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시베리아를 개척하기]] 위해 정치범들을 동원해 도시와 생산 시설 건설, 벌목 같은 중노동을 시켰다. 원래는 일반인들을 시베리아 개척에 동원하려 했지만 워낙 사람들이 안 왔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죄수들을 [[시베리아]]로 보낸 것이다. 이 시베리아 유형이라는 형벌이 소련의 굴라크 제도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굴라크는 [[러시아 내전]] 때부터 본격적으로 운영되었고, 조직적이고 정교한 탄압은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정권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일단 러시아 내전기 당시에는 일반 노동교화소와 비슷하게 노가다 시키는 곳이었고, 기간이 다 되면 풀어주기는 했다.] 러시아 제국 때에는 행정력이 미비하여 대도시나 군인들이 주둔한 곳을 제외하면 각 마을별로 경찰이 몇명 정도 배치되는 수준에 그친 데다가 전화같은 통신 시설도 열악했던지라 탈출이 어렵지 않았지만, 스탈린이 떵떵거리던 시절에는 시베리아 유형을 인프라의 확충과 병행해서 업그레이드했다. 우선 유형지에 전력망과 통신망을 깔면서 관리인력과 감시인력을 대거 늘렸으며, 철조망과 담장 같은 시설도 확충시켜놓았다. 따라서 경계도 자연히 삼엄해져서 탈출을 하는 것이 힘들어지게 되었다. 조용하게 준비한다는 조건을 만족하면 비교적 쉽게 탈출할 수가 있었던 러시아 제국 시절과 달리 죄수들은 얄짤없이 형을 끝까지 마치게 되었고,[*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위조신분증으로 열차를 타면 그만이었지만 스탈린대에는 전신망과 전화망이 구축되었기 때문에 열차와 배에서 시군구 인민경찰(밀리치야)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소련은 물론 현재의 러시아에서도 사람이 사는 곳에서 일정 시간 이상 머무르려면 숙소나 관청에다가 기록을 남기도록 지정했고, 신분증이 없으면 이용하는 것조차 애를 먹게 만들었다. 결국 맨몸으로 시베리아 한복판을 지나가는 것이 탈출하는 방법인데, 물론 소련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오지]]는 널리고 널렸으니 NKVD와 인민경찰 및 스메르시와 소련군의 추적을 따돌리는 것 자체는 가능했지만 굶어죽거나, 얼어죽거나, 불곰이나 호랑이 같은 야생동물에게 물려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시도하기에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시베리아의 열악한 자연환경도 몸소 만끽해야 했던지라 굴라크의 악명이 드높아진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일부 운 좋은 사람들은 빠져나오기는 했다. 0.01%의 확률에 베팅하는 꼴이지만(...). ] 물론 단순히 인프라 시설 확충만 원인이 아니고, 정치적인 이유로 낙인찍힌 사람들이 굴라크에 수용되면서 1934년 51만 명이었던 수감자수가 1940년에 134만 명 가량으로 크게 늘어난 결과 상당수의 수용소가 과밀화된 데다가, 이들이 반역자와 마찬가지의 취급을 받으며 수감자들에 대한 처우가 덩달아 나빠진 영향이 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