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굴라크 (문단 편집) == 수감자의 숫자 == 소련 붕괴 후 [[https://en.wikipedia.org/wiki/Robert_Conquest|로버트 콩퀘스트]]와 [[https://en.wikipedia.org/wiki/Steven_Rosefielde|스티븐 로즈필드]]의 연구에 따르면 1929년부터 1953년까지 대략 총 1400만 명이 굴라크를 거쳤으며, 이 중 160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소련 공식 통계에 의하면 1921년부터 1953년까지 전체적으로 760만명 가량이 다녀간것으로 되어있다. 소련 당국에서는 이 자료들을 소련말기까지 비공개했고, 이 때문에 서양 학자들은 소련 붕괴 이전에는 소련 기록보관소에 접근하지 못해서 추정으로 어리짐작할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이 공식기록에 의하면 사망자수와 사망률이 가장 높았던 해는 [[독소전쟁]]때인 1942년과 1943년도인데 수용소 수감자들이 대거 [[형벌부대]] 등으로 징집되었고, 이들 중 많은 수가 전투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수용소에서 사망한 사람이 160만명으로 집계된것도 결국은 전쟁때문이었고, 전쟁으로 죽은 사람을 제외하면 사망자수가 많이 줄어드는것으로 나온다. 그렇지만 1932년부터 1952년까지 2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평시에도 1년에 수만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올 정도로 수감자들에 대한 처우가 나빴던것은 사실이다. 사망률이 가장 높았을때는 1933년도로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여파를 제대로 맞아서이기 때문이고, 사망자수는 1938년이 가장 많고, 전시가 아닌 평시임에도 10만명이 넘는 인원이 사망한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대숙청]]의 영향으로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도 처형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사망률과 사망자수 통계를 통해 수용자에 대한 대우수준이 어땠는지도 알수있다. 1930년대에는 평년도에도 사망률이 2~3%에도 달했을 정도로 가혹했고, 이러한 추세가 1948년까지 유지되었으나, 1950년에는 사망률이 1% 아래로 내려갔고, 1953년에는 굴라크에 수감되었던 수감자들이 대거 석방되면서 사망자수가 1만명 아래로 줄어들었으며, 1956년에는 사망자수가 3000명대까지 줄어들엇는데, 이를 통해 스탈린 사후에 수감자들에 대한 가혹행위가 줄어들고 대우도 상대적으로 나아졌다는것을 알수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