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굴라크 (문단 편집) == 노동과 생활 == [[백해-발트해 운하]], [[시베리아 횡단철도]] 노선의 건설과 [[시베리아]] 지역 개발, [[콤소몰스크나아무레]] 등 극동 지역 개발, 2차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 생산 중 상당 부분이 여기에서 나온 성과였다. 사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의 원조격 되는 노동 정치범수용소이기에 학살을 위한 장소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의외로 굴라크의 목적 자체는 노동력 충원이었고, 실제로 소련의 노동력 충원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라크가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라크의 주요 목적은 인구가 적고, 낙후된 시베리아를 개발하는데 있었다. 따라서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보너스로 그 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다.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다. 1차 5개년 계획으로 이동 된 죄수 집단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 중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이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 일에 투입되었다. 굴라크는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부분을 책임졌으며, 단순노동에만 투입됐을 것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엘리트 두뇌들도 상당수 굴라크에 투옥돼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의 인센티브는 주로 '''형량 감경'''. --조기전역-- 어찌 보면 가장 확실한 인센티브라고 할 수 있을지도. 스탈린 시절 소비에트 러시아는 문자 그대로 '수용소에서 공돌이가 갈려들어가는' 나라였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그 시절에 수학을 대단히 잘했다는 전력 때문에 잠시 이런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얼마 뒤 벽돌을 날랐다. 그의 책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 따르면 시베리아답게 영하 30도 정도는 '''따뜻한 날씨'''이며, 작업장 난로가 수감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생산품'''이 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음식은 1끼 200g 정도의 빵과 너무 오래 끓여서 뭐가 들었는지도 모를 국[* 보통 생선이나 오래된 야채가 들어가는데, 때때로 식량이 부족할 때는 사료용 귀리, 심지어 들풀로도 국을 끓인다. 다른 작품에서는 '무만 넣고 끓인 맹탕 같은 수프' 가 나오기도 했다. 그냥 아무거나 넣고 끓이는 건가 보다.]이다. 강도 높은 처벌을 위해 '중영창'이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에 갇히면 15일도 살아남기 힘들고 살아남더라도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져 회복하기 힘들다고 한다. 수용소에 따라서는 외부로부터의 소포도 허용된 모양. 뇌물로 쓰인다. 과학자들이 주로 수용된 노동 수용소를 '샤라쉬카'라고 부르며, 유명한 과학자들도 상당수가 저 곳에 투옥되어 갈려들어갔다. 예를 들면 러시아 우주개발의 아버지 격인 [[세르게이 코롤료프]], 로켓엔진 설계자인 [[발렌틴 글루시코]], 항공기 설계자인 안드레이 [[투폴레프]]와[* 폭격기로 유명한 투폴레프 [[설계국]]의 설립자이자 수석설계자.] 페틀랴코프, 미야시시체프, 폴리카르포프 등이 있었다. 당연하지만 [[소련의 핵개발]]에도 이 굴라크의 인력을 동원했다. 단, 이 부분이 와전되어서 어차피 죽을 죄수들이니 [[방사능]]에 오염되는 위험한 일을 일부러 맡겼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사실과는 거리가 먼 냉전식 프로파간다에 가깝다. 굴라크 죄수들이 동원된 건 주로 [[우라늄]]을 [[채굴]]하는 작업이었다. 물론 [[광산]]의 채굴 작업이 안전하고 편안한 일일 리는 없지만, 적어도 방사능 문제와는 거리가 있다. 자연 상태의 [[피치블렌드|천연 우라늄]]은 방사능 수치가 그렇게 높지는 않아서 큰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 방사선 피폭의 위험이 큰 본격적인 [[핵연료]] 농축 가공 등의 작업은 애초에 고도의 지식과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끌려온 죄수가 아니라 전문 노동자들이 따로 담당했다. 미국에서도 이런 천연 우라늄 채굴은 평범한 민간 광부들이 맡았다. 굴라크에서의 생활은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수용소 군도]]'에서 잘 표현돼 있다. 솔제니친이 훌륭한 작가이기도 했지만, 그가 그러한 곳을 잘 표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솔제니친 자신이 직접 그러한 수용소에서 오래 살아봤기 때문이다. 국가 반역죄인데,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다 스탈린이라고 생각되는 인물을 [[노땅]], [[꼰대]]류로 비하한 것이 발견되어서이다. 굴라크의 벽돌 노동자부터 지식 수용소 인원, 유형지 생활까지 죽는 거 제외하고는 상당한 코스를 밟았다.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고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가한 뒤 소련 당국으로부터 귀국이 불허되어 이후 1994년까지 [[소련]]에 돌아오지 못했으며, 2008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또한 [[예수회]] [[신부(종교)|신부]] 월터 치세크(Walter Ciszek)의 자서전인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With God In Russia)'에서도 굴라크의 생활과 출소 후의 소련 생활에 대해서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사람은 [[폴란드계 미국인]] [[가톨릭]] [[신부(종교)|신부]]로, 2차 세계대전 중 소련에 있다가 [[바티칸]] 스파이로 지목되어 붙잡혀 15년간의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여러 굴라크를 돌아다니며 15년간 강제노동을 했고, 풀려난 뒤에도 감시와 거주 제한이 딸린 제한적인 생활을 했다. 그러다 1963년 미국에 침입했다 잡힌 소련 첩보원 2명과의 교환 조건으로 [[소련]]에 억류된 2명의 미국인을 풀어주는 일이 있었는데, 월터 치세크는 이 기회를 통해 23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미국에서 종교활동에 전념하다가 1984년 사망했다.] 소련의 굴라크 또한 최악의 장소라고 생각될 만한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고, 굳이 비유하자면 [[정치범수용소/북한|북한 정치범수용소]]나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보다 덜한 정도였다. 그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원조도 굴라크이고, 논픽션 [[굴락]]의 저자 애플바움도 '북한의 정치범수용소가 구 [[소련]]의 그 곳과 '''가장 근접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에 따르면 [[그린 엘리펀트|간수가 똥을 먹인다던가]] 하는 가혹행위 비인권적인 일등도 있다. 그러나 소련의 굴라크는 독일의 아유슈비츠와 근본적으로 차이점들이 있었다. [[이것이 인간인가]]로 독일의 강제수용소에 갇힌 프리모 레비가 지적한 사안이다.(한국어판 p286) 한편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1930년대부터 노동자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 누구나 경쟁하는 스타하노프 운동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관련한 포상들 가운데 기묘한 것이 있었다. 우수한 실적을 올린 노동자는 여자 죄수 수용소에 위로휴가를 갈 수 있었다. [[임신]]을 하면 3년을 감형시키는 소련 법률 때문에 여자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성관계|검열삭제]]를 원했고 [[강간]]도 횡행했다고 한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간수에게 뇌물을 주면 원하는 여자를 마음대로 취할 수 있었다. 노동자의 포상도 해결할 수가 있고, 임신을 원하는 여자들을 대체 누가 임신시킬 것인가에 대하여 쓸데없는 고민도 해결할 수가 있고. 궁극적인 목표인 인구의 증가도 해결할 수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