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궁녀 (문단 편집) == 일본의 궁녀 == 일본의 경우는 궁녀와 내시를 통합해서 [[여관]](女官)이라는 직위를 갖고 일하는 여성이 있었다. 일본은 한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내시가 없었다. 그 이유는 일본 특유의 사무라이 문화 때문인데 당대의 일본인들은 남성의 신체 중에서 생식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거세는 참수보다 더 큰 참사로 여겼기 때문에 내시가 없었다. 남자=무사[* [[사무라이]] 또는 [[아시가루]]를 뜻한다.]='''[[전투력]]'''으로 인식하는 고대 일본인들에게 '''비전투 남성'''이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은 내시를 두지 않은 것이다.[* 물론 선천적 성불구자이거나 질병 또는 사고에 의해 후천적으로 성불구자가 된 남성들을 한국과 중국의 내시에 준하는 직위에 앉힌 경우는 적지 않았으며, [[류큐 왕국]]은 일본 본토와 달리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내시가 존재했다.] 실제로 고대 일본은 '''[[다이묘]]가 휘하 농부들에게 갑옷을 빌려줘서 병사로 삼은 것을 [[아시가루]]'''라 했다. 한국과는 달리, 일본의 궁녀는 궁을 나오면 혼인할 수 있었다. 혼인하기 전 궁에 들어가 일하거나[* 다만 궁녀 출신 여성은 좀 노는 여자 같아 꺼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아예 궁에서 좋은 남자를 만나 연애 끝에 혼인하고 출궁하기도 했으며[* [[무라사키 시키부]]는 자신의 [[일기]]에서 "액을 쫓는 금제 기간이 되면 사람들 보는 눈이 줄어드니, 이 틈을 타서 귀족들이 밤중에 자기 애인을 보러 궁중에 뻔질나게 드나든다"고 적어 놨다.] 남편과 사별하거나 이혼한 후 궁녀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궁녀로 들어가는 경우도 비교적 지체 높은 귀족 출신의 여자가 많았고, 여러 왕비들 가운데 누구를 모시느냐에 따라서 서로 간에 경쟁과 기세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쿠라노소시]]와 무라사키시키부 일기에 따르면, 당시 남성 귀족들은 궁녀들과 어울리는 걸 매우 즐겼으며, [[후지와라노 쇼시]] 중궁과 여방(女房)들의 성격이 너무 폐쇄적이라서 10년 동안 [[후지와라노 테이시]] 소속 궁녀들에게 비교당해 [[무라사키 시키부]]가 엄청 열받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의 평판이 중궁이나 여어에 대한 천황의 대우와도 연결되었기 때문에, 비들은 자신들의 평판을 올릴 만큼 교양 있고 출신이 받쳐주는 여관들을 데려오려고 애썼다고 한다. <무라사키시키부 일기>에 따르면 쇼시의 여방들 중에서는 대귀족 출신의 자기 사촌들도 있었다고 한다. <사라시나 일기>의 저자인 스가와라노 타카스에의 딸(菅原孝標女)은 [[고스자쿠 덴노]]의 딸 유시 내친왕의 여방으로 일했는데, <사라시나 일기>에 따르면 타카스에의 딸을 비롯한 몇몇 여방들은 집에서 궁에서 정기적으로 거주하는 게 아니라 집에서 출퇴근하는 방식으로 일했다고 한다. 물론 이럴 경우에는 열심히 안 한다고 대우가 상당히 안 좋았다고 한다. <무라사키시키부 일기>에도 무라사키 시키부가 집으로 갔다가 첫눈을 봤다는 기록과 모 여방은 집으로 가서 한동안 궁으로 오질 않고 있다고 까는 등의 기록을 남기는 등, 상관의 허락만 받으면 출퇴근을 마음대로 하기도 했던 모양. [[에도 시대]]의 [[오오쿠]]는 엄격히 말하면 [[쇼군]]은 왕이 아니기 때문에 궁녀 제도와는 차이가 있지만, 쇼군이 사실상 왕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에 궁녀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현대에도 [[일본 황실]]이 존재하는 일본의 특성상 현대에도 여관이 존재한다. 황족을 곁에서 모신다는 특성상 당연히 고위층 자제들이 많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